[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약통에서 쏟아진 색색의 알약들. 언스플래시
약통에서 쏟아진 색색의 알약들. 언스플래시

나는 약발이 잘 듣는다. 맞는 약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맞는 약을 만나기만 하면 효과가 워낙 좋아서 조절을 잘해야 할 만큼. 그런데 약이 잘 든다는 게, 약이 처음 목표로 한 효과만 잘 드는 게 아니다. 예상치 못한 효과도 진하게 나타난다.

원래도 크론병 때문에 수면의 질이 좋지는 않았다. 속이 불편해서 잠에 쉽게 들지 못하고, 잠들더라도 자주 깨다 보니 하루도 아침에 개운한 적이 없었다. 아니,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는 날이 거의 없었고, 개운하다는 감각 자체를 잊어버렸다. 그런데 하는 일의 가짓수가 많아지고, 생활하는 공간이 달라지면서 불면 문제가 더욱 심해졌다. 결국 나는 정신과에 방문해야 했다.

효과는 상당히 빠르게 나타났다. 약을 먹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잠드는 시간이 빨라졌다. 그러나 문제는 아침에 발생했다. 안 깨고 자긴 했는데, 눈만 뜨면 머리가 띵해서 어떤 생각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고, 뜻대로 걷기도 어려웠다. 평상시에 겪는 두통과는 다소 다른 차원의 문제였고, 무슨 약을 먹어야 이 상태가 나아질지 몰라서 아침에 눈을 뜨면 그 뒤로 대략 서너 시간은 거의 누워만 있었다. 다시 잠을 잘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일어나서 무언가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은 매일같이 찾아왔다.

병원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약이 한 알 늘었다. 무슨 약인지는 잘 모르지만 머리가 띵한 걸 해결해준단다. 나는 다시 약발 잘 받는 내 몸을 믿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정말 아침에 일어나도 머리가 멀쩡했다. 여기서 멀쩡하다고 함은 물론 불면 때문에 정신과약을 먹기 전과 비슷한 정도로만 피곤하다는 뜻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두어 시간 뒤에 다시 낮잠을 자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제 일어나서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여기서 난데없는 부작용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갓생.’ 갓생이란 ‘인생’에다가 ‘갓’을 붙인 것으로, 아주 건강하고 생산적인, 자본주의적 양식에 잘 부합하는 삶을 의미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아침을 챙겨 먹고 할 일을 성실하게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운동도 한 번씩 하고, … 대략 이런 것이 ‘갓생’의 모습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몽롱한 상태로 몇 시간을 누워 있고, 대체로 방에서 글을 읽거나 쓰는 나는 ‘갓생’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는데,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이르면 6시, 늦어도 8시에는 잠에서 깨기 시작했다.

수험생활로 돌아간 듯한 생활패턴은 실로 경이로웠다. 나는 3~4시에 자고 12~1시에 깨는 극단적인 올빼미형 인간에서, 순전히 약의 부작용 덕분에 아침형 인간으로 변했다. 면역 수치는 여전히 낮을 테고, 피로는 여전히 만성적이고, 소화도 여전히 잘 안 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나는 굉장히 건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난다’라는 데에 함축된 생산성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어 뿌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평소에 그렇게 비판해 마지않던 기준에 내가 낑겨 들어갈 수 있는 순간이면 찾아오는 이 간사한 기쁨이란.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 기세를 몰아서 정말 갓생 한 번 살아 보자. 갓생 뭐 별 거냐?’ 내가 12시에 자든 새벽 3시에 자든 늦어도 8시에는 깨도록 만든 이 괴이한 부작용 덕에 나는 매일같이 일찍 일어나서 공부나 일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잠드는 시간은 조정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원래 자던 패턴이 있어서 그런지, 아무리 일찍 일어났어도 밤 12시가 넘어가기 전에는 잠이 오지 않았고, 그러다 보면 이전처럼 3시에 자는 날도 생겼다. 잠드는 시간은 늦는데 깨는 시간은 고정되어 있으니 수면의 양이 부족해졌고, 이는 자연스럽게 몸의 전반적인 컨디션 저하로 이어졌다. 그러나 컨디션 난조가 워낙 익숙한 나로서는 특별한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건강’해지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까만 배경 아래에 한 사람이 자고 있다. 이미지 픽사베이 
까만 배경 아래에 한 사람이 자고 있다. 이미지 픽사베이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서 오랜만에 배드민턴을 쳤다. 몇 년 만에 쥐어보는 라켓인지, 다음 날에 온몸이 쑤셨지만 근육통 정도는 영광의 상처로 견딜 만했다. 이토록 게으르고 골골대는 내가 몇 시간이나 배드민턴을 치다니! 그리고 2주 뒤, 다시 주말에 친구들과 만나 배드민턴을 쳤다. 전보다 몸이 잘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아, 이제 몸이 풀리는구나.’ 배드민턴을 치고 있으면 병을 진단받기 전인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코트에서 뛰고 있으면 내가 나의 몸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까지도 있었던 그때로.

분위기를 탔으니 이제 뛰어 봐야지. 그래도 무리는 하면 안 되니까 배드민턴을 치고 며칠은 쉰 뒤에 밤에 뛰러 나갔다. 적당히 선선한 여름밤 공기를 마시며, 1시간 정도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했다. 애플리케이션을 확인해 보니 대략 10분에 1킬로미터씩 뛰었다고. 정말 오랜만에 뛰는데 이 정도면 매우 선방했다. 동네 친구와 조만간 함께 뛰기로 약속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목이 아프고 코가 막히기 시작했다. 불길한 신호. 면역억제제를 먹으니 워낙 조심하며 지내서 감기에 안 걸린 지 한참 되었는데, 이렇게 갓생 사는 지금 나에게 감기가 찾아온다고? 혹시나 해서 코로나19 검사를 했는데 음성이 나왔다. 그래, 이건 정말 감기였던 것이다. 면역력이 낮아서 한번 감기 걸리면 길게는 두 달까지도 가는 나에게 감기는 갓생의 탈을 쓰고 찾아왔다. 무슨 트로이 목마도 아니고.

아, 이게 질병갓생인가. 약 부작용으로 얼떨결에 시작된 갓생을 충실히 살아보려던 아픈 사람의 노력은 그렇게 일단락됐었다. 감기가 걸리고 며칠 동안 운동 근처에도 못 가고 요양했다. 종일 따뜻한 차를 끓이고, 이 여름에 집에서 긴팔 후드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물론 이번 일은 내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때로부터 한두 달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지만 그래도 오전에 일상을 시작한다. 여전히 피곤하지만, 어쩌면 내게도 갓생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나도 조금은 ‘청년답게’ 살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얄팍한 희망이 나를 다시 뛰게 한다.

건강해지려는 노력과 희망이 나에게 또 다른 질병을 가져다 줄 때, 자꾸만 나의 일상이 정말 질병으로 환원될 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건강하게 살아 보겠다는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지만, 나에게 질병이라는 경험은 다시 건강해지는 과도기보다 점점 건강과 멀어지는 진행기에 가깝다.

그러니 나에게 질병갓생은 아픈 사람도 ‘노오력’해서 갓생 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파도 놓을 수 없는 건강에 대한 욕구, 이따금 보이는 희망에 사로잡혀 또 다른 질병의 굴레로 들어가는 어리석음, 이런 일들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갓생’에 대한 동경, 그리고 부작용으로 경험되는 ‘갓생’, 이 모든 게 지저분하게 엉겨 있는 팥죽 같은 질감의 감각이 질병갓생이다.

질병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야기들, 질병을 정체성이나 프라이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지고 헛발질하는 찝찝한 이야기들, 그럼에도 ‘극복’은 거부하는 혹은 거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질병을 설명하는 말끔하게 정리된 언어보다도, 몸속에서 우글거리며 우리를 괴롭히는 수치스러운 감각들을 그 생김새 그대로 지저분하게 내어놓는 언어다.

동성애가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로 인한 결과라는 식의 차별적인 말들에 대항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폭력 사이에 어떠한 관계도 없다고 부인하곤 한다. 하지만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 자긍심》에서 수치심과 자신이 겪은 폭력, 섹슈얼리티 사이에 존재할지 모르는 관계를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의 정체성이 폭력의 빌미가 되어 둘 사이의 연관성이 만들어지는 사회에서, 이 연관성을 일단 부인하고 시작할 때 과연 우리는 정말 우리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 안의 수치심을 직면할 때만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이 열린다고 나는 믿는다. 자긍심이 아닌 수치심이 만들어갈 세계를 상상한다.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며, 질병과 장애를 중심으로 사회를 고민하려 노력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과학잡지 에피: 16호-장애와 테크놀로지》(공저), 《아픈 몸, 무대에 서다》(공저), 《몸이 말이 될 때》(공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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