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몇 년 전 친구를 떠나보냈다. 학창시절을 함께한 친구는 눈을 감고 내 앞에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울 줄 모르는 이도 울게 만드는 비참함이 내 곁에 한참을 머물렀다. 49재를 지내러 그의 장례를 치른 절에 갔다. 49재가 끝나고,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나는 그 장소를 떠날 수 없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절의 처마 끝을 찍었다. 날아다니는 새들을 찍었다. 절의 수풀을 찍었다. 타오르는 어떤 불길들을 찍었다. 집 근처 사람 없는 냇가에서 쓰러진 나무를 찍었다. 흐르는 물을 찍었다. 걷는 길을 찍었다. 부서진 벽돌을 찍었다. 버려진 의자를 찍었다.
나는 사람 한 명도 담기지 않은 사진과 영상들을 혼자서 이리저리 배치하고 합쳤다. 편집도 할 줄 모르면서 핸드폰에 내장된 프로그램을 서툴게 만졌다. 그렇게 짧은 영상이 만들어졌다. 누구의 목소리도 없고, 누구의 얼굴도 없는, 물 흐르는 소리와 염불 외는 소리 외에는 소리도 없는 영상. 그때 내 안의 무언가가 잠깐 풀려나는 것 같았다. 49일 동안 나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몇 분 동안이나마 나를 위해 시간을 양보해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시민 연극에 배우로 참여했다. 연습 과정 중에 아무 소리나 내는 시간이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울고 있었다. 친구를 떠올리면서 울고 있었다. 다른 배우들도 있는 연습실 한복판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그때 내 안의 무언가가 잠깐 풀려나는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조용히 내 일상을 붙들고 수시로 나를 괴롭히던 무언가가 몇 시간 동안이나마 나를 위해 시간을 양보해 주었다.
지난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벌어진 참사는 그 자체로 믿을 수 없이 충격적이었다. 한 다리 건너 희생자가 있었다. 그런데 참사 이후 발생한 일들은 그 충격을 함께 고민하는 대신 빠르게 처리하려는 듯했다. 정부는 분향소를 설치하며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고, 지자체들은 관내 음식점과 클럽들에 휴업을 권고했다. 그리고 수많은 문화예술 행사들이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
국가는 지극히 특정한 형태의 애도만을 승인하고 있었다. 추모와 안전을 명분으로 나온 조치들은 결과적으로 참사가 일어난 곳에서는 식사를 할 수 없게 하고, 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 곳에서는 사람이 모일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 곳으로 언급되는 곳은 사람들이 모여 축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장소다. 그런 장소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문화예술을 즐겨선 안 된다. 그것은 추모와 애도에 어긋난다. 방송계에서는 심지어 올해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핼러윈과 관련된 방송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국가가 규정한 추모 혹은 애도는 ‘순수한’ 슬픔이다. 그것에는 어떤 즐거움도 섞여선 안 된다. 슬픔과 즐거움은 아주 뚜렷이 구분되고, 문화예술 행사나 축제, 방송은 모두 즐거움과 동일시된다. 유일하게 허락되는 슬픔은 국가가 설치한 분향소에 방문하는 일이다. 국가가 이처럼 애도를 특정한 기간과 장소에 격리하여 처리하는 일은 우리에게 특정한 일상과 감정을 강요함으로써 특정한 삶을 만들어낸다. 특정한 기간과 장소에 애도를 가둠으로써 국가는 일상과 애도를 분리한다. 이는 ‘슬퍼해야 할 시간’과 ‘슬퍼하지 않아도 될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국가애도기간 이후 우리에게는 슬픔을 잊고 즐거움을 되찾을 의무가 생긴다.
그렇게 국가애도기간에 우린 어딘가로 나아갈 어떤 힘을 갖고 살아가기보다 그저 ‘연명’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온전한 슬픔 안에서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에 짓눌리기를 요구받는, 슬퍼하는 일 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존재. 참사 희생자에 대한 추모를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은 이렇게 남은 자들의 역량을 억누르게 된다. 참사의 무력화는 남은 이들의 무력화로 이어진다.
49재가 있던 날에 영상을 만들었던 것, 연극 연습을 하다가 엉엉 울었던 것은 슬픔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나를 짓누르던 죄책감과 비참함에서 잠시나마 풀려나서 더욱 온전히 친구를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고, 나의 고통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나의 일상 안에 친구의 죽음을 다른 방식으로 새기고 기억하는 일이었다. 예술은 죽음의 한복판에서 감응하는 수많은 경로를 발명하고 슬픔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게 했다. 이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 슬픔과는 전혀 관련 없이 느껴지는 케이팝 곡들을 틀어놓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슬픔이 지워지기보다 그 노래들 안에도 새겨지고 있듯이.
국가는 참사와 핼러윈과 축제의 즐거움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참사의 책임을 피해자들에게 돌리는 동시에 그것을 일상으로부터 격리하여 삭제하려 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흘러가야 한다. 마치 그런 참사는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참사는 일상에 어떠한 변화도 줄 수 없도록 무력화된다. 이를 위해 국가애도기간 동안 문화예술은 슬픔과 애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수적이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문화인류학자 이지은은 중증치매환자의 경관급식 실행에 관한 논문에서 영양학적으로는 무의미한 ‘단맛’이 환자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말한다. 단맛이 들어간 식단은 미각이 전반적으로 퇴화한 환자에게 여전히 ‘맛있는’ 것이며, 단 음식을 먹으며 그는 치료 대상을 넘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 즐거움이 없는 행위를 거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간다. 그렇게 돌봄 인력과 환자는 서로에게 감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가며 “‘연명’이 아닌 삶”의 모습을 찾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맛’은 부수적이거나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수적이거나 불필요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를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감응하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경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즐거움이나 문화예술이 ‘단맛’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참사에서 지금 필요한 것보다 유예 혹은 연기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처럼 불필요해 보이는 무언가야말로 우리가 슬픔을 일상 안으로 깊이 들여오고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면서 산 자와 죽은 자가, 그리고 남은 이들이 서로에게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을 활성화한다.
참사에 대한 애도는, 참사 이후의 정의는 참사의 시공간적 행정 격리가 아니라 모두의 일상 안에서 참사를 끌어안고 나아가는 매 순간 만들어진다. 세계 또한 그렇다. 세계는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실천 하나하나로 만들어진다. 애도는 적극적 실천이다. 세계는 애도들로 만들어진다. 지워지지 않는 슬픔들로 만들어진다.
온갖 방송과 행사들의 취소와 연기는 추모와 애도의 이름으로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일인 동시에 죽음과 삶 사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감응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갈 능력을 참사 안에서부터 길어낼 수 없도록 차단하는 일이다. 애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닌 국가였다. 격리되지 않는 애도가 필요하다. 애도가 모든 곳으로, 모든 순간에 스며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슬픔은 지워지지 않는 얼굴을 드러낸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살아내야만 하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세계가 만들어진다.
* * *
* 이지은, <‘연명’이 아닌 삶: 중증치매에서 경관급식 실행의 윤리적 문제들>, 《과학기술학연구》 20(3), 2020, 1-29.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며, 질병과 장애를 중심으로 사회를 고민하려 노력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과학잡지 에피: 16호-장애와 테크놀로지》(공저), 《아픈 몸, 무대에 서다》(공저), 《몸이 말이 될 때》(공저) 등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