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보다 후퇴한 2심
법원 “바닥면적 기준 있는 시행령, 장애인 차별 아니다”
시행령 재·개정은 “국가 재량”
장애계 “국가가 장애인 차별해도 된다고 면죄부 준 판결”
건물의 턱과 계단 때문에 접근권을 침해당한 장애인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청구소송과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에서도 “국가 책임은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등법원 민사5부(부장판사 설범식·이준영·최성보)는 6일 오전 10시 15분에 열린 항소심에서, 바닥면적을 기준으로 장애인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하는 시행령에 대해 차별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한 재판부는 사회경제적 부담 등을 고려해 바닥면적 기준 등을 정하는 건 정부의 재량이라고 판결하며, 장애인의 항소를 기각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등 장애계는 2심 판결 직후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심 재판부는 그래도 국가가 장애인을 차별한 게 맞다고 판단했는데, 2심은 더 후퇴했다”며 “장애인권리를 국가가 외면해도 된다고 면죄부를 준 판결”이라고 강하게 규탄했다.
- 1심 “시행령은 차별 맞지만 국가 책임은 없어”
휠체어를 이용하는 김명학 노들장애인야학 교장과 지팡이를 사용하는 노인, 유아차를 사용하는 여성 등 원고 4명은 2018년 4월 11일, 투썸플레이스(카페), GS리테일(편의점) 호텔신라(호텔)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장애인차별금지법상의 차별구제소송과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기업과 국가가 편의시설 의무설치의 책임을 외면하고 장애인·노약자·임산부의 접근권을 제한한 것에 문제제기하는 공익소송이었다.
투썸플레이스, 호텔신라와는 강제조정이 이뤄졌다. 호텔신라는 2025년까지 장애인 객실 설치를, 투썸플레이스는 직영점에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할 것을 약속했다.
GS리테일은 이의신청서를 제출하며 다툼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 결과, 2월 10일 있었던 1심에서 GS리테일은 패소했다. 재판부는 GS리테일이 GS25 편의점에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하며, 설치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이동식 경사로와 호출벨 등의 대안적인 방법을 제공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1심은 정부의 차별행위는 인정하면서도, 정부 책임은 없다고 판결했다.
소규모 점포인 GS편의점에 휠체어 탄 장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것은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등편의법) 때문이다. 해당 법 시행령 3조 별표1은 바닥면적이 50제곱미터 미만인 공중이용시설에는 장애인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제외하고 있다.
1심 재판부는 “피고 대한민국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 해소 및 권리 구제에 관한 국가의 의무를 소홀히 하였음을 부정하기 어렵다”면서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 3조는 장애인의 행복추구권 또는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규정이고, 위 법령을 개정하지 않는 한 위헌적인 상황이 지속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애인의 생명·신체·재산 등에 대한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상태가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정부에 책임은 없다고 했다. 장애계는 즉각 반발하며 3월 2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 2심 “시행령은 차별 아니므로 국가 책임 없어”
1심 재판부는 그래도 바닥면적을 기준으로 장애인편의시설 의무 설치를 면제하는 시행령이 위헌적이라고 판단했는데, 2심 재판부는 이조차도 부정했다. 1심보다 더욱 후퇴한 판결이 나온 것이다.
2심 재판부는 김명학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등 원고의 항소를 모두 기각하며,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 자체가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규정하는 차별행위 유형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바닥면적 기준을 둔 게 장애인 차별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바닥면적 기준을 두는 건 “대한민국 정부의 재량”이라고도 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편의시설 설치 대상을 설정함에 있어 그 범위를 단계적으로 결정할 재량이 있다”며 “국가는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부담하게 되는 시설주의 경제적 손실, 사회경제적 부담, 사회적 비용을 조사해 탄력적으로 대상의 범위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일찍이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는 바닥면적 기준을 폐지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원고들이 권고안들을 제출한 것에 대해 재판부는 “권고안들로부터 곧바로 대한민국의 의무가 도출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국제인권기준에 배치되는 판단을 하기도 했다.
원고들의 소송대리인 중 한 명인 정다혜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재판부 판단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는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안으로부터 국가 책임이 발생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헌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 장애인등편의법에서 발생하는 책임이라고 설명했다”며 “따라서 대한민국은 현행법을 어기는 불법행위를 한 것인데 이 같은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다”고 규탄했다.
정 변호사는 재판부가 차별적 시행령 제정을 ‘정부 재량’이라고 판단한 것에 대해서도 “1심에서 위헌임을 인정받은 시행령은 20년 넘게 유지됐다. 위헌적인 상황이 장시간 유지됐는데도 이를 정부의 재량으로 볼 수 있는지 매우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소송 중이던 지난 4월, 바닥면적 기준을 300제곱미터에서 50제곱미터로 강화했다. 장애계는 “개악안”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바닥면적 기준을 폐지하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고 김명학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은 “법이 정의로운 줄 알았는데 오늘 판결을 보니 아니다”라며 강한 실망감을 표했다. 이어 “우리의 권리를 찾는 더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연 장추련 사무국장은 “사기업도 조정에 응하며 노력하겠다고 했는데,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할 책임이 있는 국가는 책임을 방기했다. 심지어 법원까지 차별 상황을 묵인하는 판결을 했다”며 “법원은 국가의 손을 들어주면서 장애인권리를 국가가 외면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줬다. 공정성은 어디 갔나”라고 성토했다.
박김영희 장추련 상임대표는 “법원마저 외면하니, 계단 앞에서 좌절하는 장애인은 이제 어디 가서 우리가 받은 차별을 얘기해야 하나. 한국은 장애인차별금지법도 있고, 유엔장애인권리협약도 비준한 나라인데 이런 판결이 나오다니, 장애인은 대체 어느 나라 국민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박김영희 대표는 “김순석 씨는 30여 년 전, 서울시 거리의 턱을 없애 달라는 유서를 쓰고 죽음으로 저항했다. 우리는 죽음으로 저항하지 않겠다. 차별적인 시행령에 저항할 것이다. 법원이 국민 권리를 보장하지 않으면 국민인 우리가 스스로 나서서 법을 바꿔낼 것이다. 2심 판결에 절대 순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지난해 8월 24일, 바닥면적 기준을 폐지하는 장애인등편의법 개정안이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대표로 발의됐지만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계류돼 있다.
양성일 보건복지부 전 제1차관은 당시 법안심사소위에 출석해 “시행령을 개정해 50제곱미터 이상까지 장애인편의시설 의무설치 대상을 확대했다”, “갑자기 의무설치 면적기준이 한꺼번에 사라지면 혼돈이 있을 것이다”,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등의 주장을 펼치며 바닥면적 기준 폐지에 우려를 표했다.
또한 이번 소송의 원고들은 소송 중 법원에 해당 시행령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서를 제출한 상태다. 법원은 시행령에 위헌 소지가 있다 판단하며 원고들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헌법재판소 변론은 아직 진행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