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9월 19일, “서울 거리의 턱을 없애달라”
서울시장에게 유서 남기고 목숨 끊은 장애인, 김순석 열사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보장되지 않는 장애인의 접근권
장애계 “국가는 장애인의 평등한 접근·이동의 권리 보장하라”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 놓았읍니다. 시내 어느 곳을 다녀도 그놈의 턱과 부딪혀 씨름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부딪쳐보지 못하고 피부로 못 느껴본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장애자들은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조그마한 꿈이라도 이뤄보려고 애써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저를 약해지게만 만듭니다.”
1984년 9월 19일, 휠체어 이용 장애인 김순석은 염보현 서울시장을 향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김순석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되는 오늘,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에는 바닥면적 50㎡(약 15평) 미만인 건물은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규정이 있다. 건물 크기에 따라 장애인들은 시설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19일,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장애계는 김순석 열사의 40주기를 맞아 국가에 장애인의 접근권 보장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결의대회를 진행했다.
- 바닥면적에 따라 설치되는 장애인편의시설… ‘정부의 책임은 없다’?
지난 2018년 4월, 장애계는 GS리테일(편의점)·투썸플레이스(커피 전문점)·호텔신라(호텔)와 대한민국을 상대로 장애인차별금지법상의 차별구제소송과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이 중 2020년 2월 호텔신라와 투썸플레이스와는 강제조정이 성립됐다. 호텔신라는 2025년까지 장애인 객실 설치를, 투썸플레이스는 직영점에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2022년 2월에는 소를 제기한 지 3년 10개월 만에 1심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GS리테일이 경사로 등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며 개선 명령을 내렸다. 바닥면적을 기준으로 편의점 등의 장애인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해 주는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 자체가 무효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그 시행령을 만든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기각했다. 정부의 차별행위는 인정하면서도, 정부에게 손해를 배상할 의무까진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이에 장애계는 국가의 책임을 다시 묻기 위해 항소를 진행했다.
2022년 6월, 2심에서도 재판부는 국가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바닥면적을 기준으로 장애인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하는 시행령이 차별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하며 1심보다 후퇴한 판결을 내놓았다. 재판부는 사회경제적 부담 등을 고려해 바닥면적 기준 등을 정하는 건 정부의 재량이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이에 장애계는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2022년 12월 상고했다.
- “장애와 같은 ‘다름’으로 인한 ‘출입금지 구역’ 있어서는 안 돼”
장추련은 19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면적을 기준으로 장애인편의시설 설치 의무에 예외를 두는 것은 ‘장애인의 접근권을 침해하는 악법’이기 때문에 ‘면적기준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해 왔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는 법원의 판결도 무시한 채 사업주의 어려움을 핑계로 장애인편의시설 설치 의무에 예외를 두는 면적기준 규정을 강행했었다”며 “국가가 법에서조차 면적을 기준으로 장애인이 아예 접근할 수 없는 시설을 만들고,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법을 장애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법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추련은 “세상에 권리를 침해받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국가는 모든 국민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의무와 책임이 있으며, 장애인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어느 누구도 장애와 같은 다름으로 인해 출입할 수 없는 ‘출입금지 구역’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김순석 열사,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어”
이날 오후 1시,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김순석 열사 40주기 맞이 서울시 장애인권리 쟁취 결의대회’를 시청역 1~2호선 환승통로에서 진행했다. 박김영희 장추련 상임대표는 “서울교통공사가 우리에게 계속 하는 말이 있다.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법을 어기는 자는 누구인가. 제정된 지 27년이 된 장애인등편의법, 제정된 지 17년이 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다. 국가와 서울시가 법을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박김 대표는 “40년 전 오늘, 김순석 열사가 돌아가셨다. 그가 간절히 원한 것은 서울시에 있는 턱을 없애 물을 마시고 싶을 때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싶을 때 밥을 먹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40년 전의 소망이 지금은 이루어지고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여전히 장애인의 접근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김순석 열사의 소망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며 “김순석 열사는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다. 장애인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접근하지 못하는 모든 순간에 살아계신다. ‘김순석들’의 권리가 보장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국가의 접근권 보장 의무와 관련해 장애인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논하는 대법원 공개변론은 10월 23일 오후 2시 대법원 대법정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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