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계, 편의시설 설치 의무 기준 유지는 “역사적 범죄”
법원 ‘장애인 접근권 막는 조항 위헌적’이라면서 국가 책임 인정 안 해
장애계, 국가 책임 묻는 항소 진행 알려
법원 판결 무시한 채 개악안 강행하는 복지부, 장애계 규탄
장애계가 장애인 접근권 보장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다시 묻기 위해 항소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018년 4월, 장애계는 GS리테일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장애인차별금지법상의 차별구제소송과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올해 2월 10일, 소를 제기한 지 3년 10개월 만에 1심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GS리테일이 경사로 등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며 개선 명령을 내렸다. 바닥면적을 기준으로 편의점 등의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해주는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 자체가 무효라는 판결도 내놨다. 그러나 정작 그 시행령을 만든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기각했다. 한편 정부는 장애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바닥면적 기준을 남겨놓는 시행령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이에 이번 소송을 함께 준비했던 ‘장애인의 생활편의시설 이용 및 접근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2일 오전 10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시행령 개정안 추진 중단을 촉구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1984년에 ‘거리에 턱을 없애 달라’는 편지를 당시 서울시장에게 남기고 음독자살한 김순석 열사에 대해 얘기하며 “너무 오래 참아왔다”라고 분노했다.
- 장애인은 편의점도 못 가는 게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은 아니라는 법원
1998년 4월 11일에 시행된 장애인등편의법은 시행령 제3조 별표 1을 통해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이에 따르면 바닥면적이 300㎡(약 90평) 미만인 공중이용시설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 장애계는 바닥면적을 기준으로 장애인의 접근권을 제한하는 정부의 시행령은 차별이라며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왔다. 이런 장애계의 주장은 지난 2월 10일의 1심 판결에서도 인정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0민사부(재판장 한성수)는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이 “장애인들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고 평등원칙에 위배되어 무효”라고 판시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런 시행령을 만든 정부가 손해를 배상할 의무까진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고 대한민국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 해소 및 권리 구제에 관한 국가의 의무를 소홀히 하였음을 부정하기 어렵다”면서도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 제3조가 장애인의 행복추구권 또는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규정이고, 위 법령을 개정하지 않는 위헌적인 상황이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장애인의 생명·신체·재산 등에 대한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상태가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장애계 측 소송대리인인 이주언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재판부의 기각 사유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은 편의점에 들어가 물 한 모금도 사 먹을 수 없다. 여전히 기본적인 생존권도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법원은 이것이 ‘중대한 위험상태’가 아니라는 말인가?”라며 항소를 통해 법적 다툼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 장애인 출입 불가 구역 남겨놓겠다는 정부
바닥면적 기준을 폐지하라는 장애계의 요구에 정부는 엉뚱하게 응답했다. 지난해 6월, 보건복지부(아래 복지부)는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장애인 편의시설을 반드시 둬야 하는 건물의 바닥면적 기준을 기존의 300㎡에서 50㎡(약 15평)로 바꾸겠다는 게 골자였다. 이에 장애계는 개정안을 ‘개악안’으로 규정하며 즉각 반발했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전국 편의점의 약 22.5%가 50㎡ 미만이다. 이곳들은 여전히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나머지 77.5%에 편의시설이 의무적으로 설치되는 것도 아니다. 이번 조치는 바뀐 시행령이 시행된 이후에 지어진 건물에 대해서만 적용된다. 따라서 장애인이 지금까지 못 들어갔던 곳은 앞으로도 계속 못 들어간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건물의 바닥면적을 기준으로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하지 않는다. 나동환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변호사는 시행령 개정안의 기만성을 비판했다. 그는 “300㎡든 50㎡든 1㎡든지 간에, 만약 장애인의 동등한 사회참여와 접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장애인등편의법의 입법 목적에 반해 위법한 것이며 장애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것”이라며 정부를 규탄했다.
한편 지난해 8월,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장애인등편의법의 바닥면적 기준을 폐지하는 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은 현재 국회 법안심사소위에 계류 중이다. 나동환 변호사는 “만약 정부가 진정으로 장애인의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한 책무를 다하고자 한다면 기만적인 바닥면적 기준의 개정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최혜영 의원의) 개정안의 통과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또한 영세사업자들도 경사로와 같은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비용에 대한 부담을 가지지 않도록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다해야 한다”라고 힘줘 말했다.
김강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정책국장은 정부의 개정안 추진 과정에서 장애계와의 소통이 부재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은 국가의 정책을 수립할 때 장애인단체와의 협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복지부는 시행령 개악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어떤 성실한 협의도 청해오지 않았다. 장애인단체들의 절대다수가 반대했음에도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라며 정부의 일방통행식 처리를 꼬집었다.
이런 장애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복지부는 개정안을 그대로 추진 중이다. 예산이 부족한데다 소상공인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면적 기준 폐지는 과도하다는 것이다. 현재 복지부의 개정안은 모든 절차를 마치고 국무회의 의결만 남겨둔 상태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30분 뒤 뒤편의 정부서울청사에서는 올해 10번째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날 국무회의에서는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 개정안이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복지부가 지난 2월 15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4월부터 시행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힌 만큼, 국무회의 안건 상정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장애계는 시행령 개정안 저지를 위해 투쟁을 이어나가겠다는 입장이다. 박경석 대표는 “불법을 저지른 사람은 엄벌하면서, 정작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정부의 범죄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면서 “애초에 이 사회는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졌다. 장애인의 접근권조차 막아놓은 역사적 범죄에 대해 무관용의 원칙을 갖고 싸우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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