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부터의 기후정의
정의로운 전환과 기후정의를 위한 투자가 필요하다
- 전환의 방법론: 체제 전환 vs. 시장주의
더 이상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보수 정치인도, 대기업과 금융기관 모두 기후위기 대응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삼성, 포스코, 현대차, SK 등 재벌이 탄소중립을 선도하겠다고 선언했다. 기후위기에 대한 현재의 담론과 운동이 이들의 이해관계를 위협하지 못한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대자본은 현 상황을 이미지 갱신과 새로운 사업 기회로 삼고 있다.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에서 ‘체제 전환’이 울려 퍼졌지만 급진적인 변화 자체는 물론이고, 그 방향과 방법에 대한 이견이 있다. 시민사회 내에서도 최근에 부상한 몇몇 단체들은 ‘시장주의적 해결책’과 ‘민영화를 통한 에너지 전환’을 강력히 옹호한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이 전 사회적으로 각인된 지난 3년은 시장주의 단체 – 정치권(특히 민주당) – 전문가 – 언론의 동맹이 공고해진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다수의 시민사회와 기후운동이 이념적 시장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기후위기 대응의 긴급성에 압도된 상황에서,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공세적으로 제기되는 시장주의 이데올로기와 민영화를 통한 전환론에 눈길을 빼앗긴 상황이다. 유럽과 미국의 초국적 대기업이 주도한 여러 재단에서 매년 수백만 달러가 NGO나 시민단체라는 외피를 쓴 우리나라의 시장주의 단체에 지원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또한 국내외 자본과 금융은 기존의 민영화론을 포장해 교묘한 그린워싱을 시도하고 있다. 근래에 시장주의 이데올로기는 선명한 녹색 외양을 띤다. ‘신자유주의로 가는 길은 녹색으로 포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 발전공기업이 초점이 된 국민연금 탈석탄 투자
최근 쟁점이 된 국민연금기금의 탈석탄 투자 논의가 한 사례다. 2021년 5월 국민연금기금이 탈석탄 투자 선언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거주하는 모든 민중들이 낸 돈으로 조성된 국민연금기금이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전환을 위해 역할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에 따라 올해 석탄기업에 대한 투자제한을 시행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되고, 올 11월 또는 12월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시행방안을 의결할 예정이다.
석탄 투자제한 전략 시행방안의 핵심 쟁점은 국민연금기금이 어떤 기업을 투자제한 대상인 석탄기업으로 선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현재 제출된 안은 석탄 채굴과 석탄 발전 사업을 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최근 3년간 평균 석탄 사업의 매출 비중이 30% 또는 50% 이상인 기업을 투자제한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30% 기준 적용 시 국내 10개 기업 3조 1,900억 원, 해외 32개 기업 9,500억 원이 해당한다. 50% 기준 적용 시 국내 8개 기업 3조 1,500억 원, 해외 24개 기업 6,400억 원이 해당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전력의 40% 이상을 공급하고 있는 발전공기업 5개 사가 주요 대상이라는 것이다. 국민연금기금이 발전공기업 5개 사에 투자 중인 금액은 약 3조 원으로, 철회할 투자 금액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 공공부문의 전환 역량 훼손과 민영화
그렇다면 발전공기업에 초점이 맞춰진 투자제한이 우리나라의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촉진하고 지원할 수 있을까? 발전공기업은 추가로 석탄발전소를 건설할 계획이 없다. 제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2034년까지 30기의 석탄발전소를 폐쇄하고 24기의 LNG 발전소를 대체 건설할 계획이다. 또한 재생에너지 사업 계획도 가지고 있다. 석탄발전소 추가 건설 계획이 없고, 정부 계획에 따라 석탈발전소를 폐쇄하고 다른 발전소로 대체할 공기업에 대해서 국민연금기금이 투자를 제한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여기서 LNG 발전으로의 전환을 에너지 전환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쟁점까지 다룰 수는 없다. 다만 다른 화석연료 민간자본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최근 에너지 위기 상황에서 부당한 초과이윤을 크게 늘려왔지만, 발전공기업은 석탄발전소 30기의 폐쇄를 결정했다는 점을 기억하고 싶다. 또한 발전공기업이 재생에너지 사업을 대대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이유의 핵심에도 정부의 시장주의적 에너지 정책과 발전공기업에 대한 부채 관리 압박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국민연금기금의 결정은 국내외 금융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결정될 기준은 수십 개의 위탁운영사에 즉시 적용되고, 전체 금융시장에도 영향을 준다. 기후·환경단체들 역시 모든 금융기관이 탈석탄 투자를 시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연금기금의 결정은 발전공기업에 조달금리 상승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을 넘어서 공기업 자체가 부실화되고 신규 사업 여력은 더욱 제약되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다. 일각에서는 녹색채권을 통해서 신규 사업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발전공기업 5사의 기존 회사채와 장기차입금이 약 20조 원에 달하기 때문에 녹색채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더 이상 자금을 동원하기 힘들고 기존 부채 연장마저 어려운 공기업에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의 역량이 있을 리 만무하다.
결국 지금과 같은 논의를 따를 경우, 국민연금기금의 탈석탄 투자 시행으로 공공부문의 에너지 전환 역량은 훼손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특히 최근 윤석열 정부의 긴축과 부채 비율 감축 압력으로 발전공기업은 2조 원 규모의 재생에너지 사업 축소 계획을 정부에 제출했고, 인력 감축도 종용받고 있다. 정부의 강요대로 발전공기업이 부채 비율 200%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는 에너지 전환을 위한 신규 사업에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최근 적자와 부채 위기 속에서 비용 절감을 위해 LNG 발전 가동을 줄이고 석탄발전으로 대체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신규 사업 자금조달 여건이 악화할 시에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면서 결국 발전공기업이 에너지 전환에 성공하지 못하고 석탄기업으로 남다가 도태될 수 있다. 이런 미래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모른 척할 수 없다.
또한 공공부문의 약화는 민자발전 확대와 에너지 산업 전반의 민영화로 이어진다. LNG 발전에 SK, GS, 포스코 등이 진출했고, 최근 천연가스 사업을 수직계열화하고 확대 중이다. 재생에너지에도 민자 기업 비중이 매우 높으며, 특히 수조 원 이상이 소요되는 해상풍력에 맥쿼리 등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민자발전이 확대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발전공기업의 사업 역량 약화와 의도적 부실 유도는 민영화를 통한 에너지 전환론을 강화하고, 추가적인 민영화로 이어질 공산이 높다.
- 상이한 운동 맥락과 에너지 산업 구조
화석연료 기업에 대한 투자철회 운동은 미국에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투자철회 운동은 해당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는 정치인에 대한 압박과 함께 대기업의 권력을 제한하는 아래로부터의 기후정의운동의 전술로 구사되었다. 반면, 한국에서 금융기관에 대한 화석연료 투자 제한은 해외에서 자금을 지원받는 일부 전문가 단체 중심으로 제기되면서, 기후정의가 아니라 주로 금융투자자의 수익률과 연동되어 이야기되었다. 좌초자산이나 ESG 용어의 유행과 유사한 맥락에서 금융투자자나 기업가적 관점의 기후 정책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 결과 기업과 금융의 권력을 통제하기보다는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어질 위험이 큰 상황이다.
에너지 산업 구조도 중요한 차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일부 주처럼 에너지 산업이 완전히 민영화·자유화된 곳에서 투자철회는 민간기업의 행위를 규제하는 역할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의 에너지 산업 구조는 발전과 천연가스 부문에서 여전히 공공부문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전력 정책이 정부의 계획에 종속되어 개별 공기업의 사업 자율성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런 구조에서 정부 정책 변화 없이 금융투자자의 행위만 변화할 경우 공공부문의 자금조달 역량이 크게 훼손되고, 결국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금융자본은 수익률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한다. 금융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 노동, 생명에 대한 파괴가 극대화되었다. 석탄산업 매출이라는 수량적 기준을 절대적 잣대로 하여 국민연금기금의 투자가 결정될 경우에 한국 에너지 산업의 공공성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현실을 도외시한 획일적인 기준 적용으로 금융자본이 강제해온 수량화의 폭력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국민연금기금이 탈석탄 선언을 한 취지에 비춰보면, 앞으로의 투자는 공공적이고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촉진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 정의로운 전환과 기후정의를 위하여
이런 위험을 피하고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는 국민연금기금의 탈석탄 투자에 관한 접근을 새롭게 해야 한다. 부족한 내용이지만, 기후운동과 시민사회에 세 가지 대안을 제안한다.
먼저, 현재 부각된 30% 대 50% 구도는 허구적이어서 본질 파악과 중요한 문제제기를 방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왜곡된 논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 30% 기준이 기후위기 대응에 부합하고 에너지 전환을 촉진하며, 50% 기준은 이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 기업과 금융의 행태를 어떻게 규제하고 통제할지가 문제의 본질이다.
둘째, 공공부문의 재생에너지 사업에 국민연금기금이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에너지 공기업을 죽이면서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공부문의 개혁과 동시에 민주적인 계획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재생에너지 확대가 필요하다. 따라서 기후운동은 윤석열 정부가 부당하게 강제하고 있는 공공부문에 대한 긴축과 부채 관리에 함께 저항해야 한다. 국민연금기금의 적극적 투자 기준에 노동자와 지역사회를 전환의 주체로 참여시키고, 기존의 경제·사회적 불평등(예를 들어 비정규직 정규직화)을 해소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전환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요컨대 네거티브 방식의 투자철회보다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지원하는 포지티브 방식의 투자가 필요하다.
셋째, 사회정의 없는 환경정의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후운동의 더 큰 기획과 투쟁이 필요하다. 정의로운 전환을 더 이상 마지막에 추가되는 립서비스로 취급하지 말고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민영화를 통한 전환은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키고, 자연과 인간을 파괴해온 기업과 금융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킨다. 녹색으로 포장된 잘못된 해법을 가려내고 강력히 비판해야 한다. 우리 현실에서 기후정의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치 중 하나는 사회공공성 강화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필수적인 공공재를 탈상품화하여 권리로서 제공하려면 공적 영역에 대한 재공영화와 탈시장화가 필요하다. 사회공공성은 빠르고도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지만 필수조건임은 분명하다.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은 지난 3년간 성장한 기후운동이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체제 전환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지구와 우리 삶을 파괴해온 재난을 막기 위해서는 체제 전환을 지향하는 기후정의운동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국민연금기금의 탈석탄 투자 논의에 대한 대안적 접근은 이런 운동의 일환이다. 선명하고 단순한 숫자 속에 감춰진 진실을 보자. 부정적 미래가 그려지지만, 기존에 해왔던 말과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하던 대로 그대로 하자는 식으로 현상 유지를 선택하지 말자. 공공부문을 파괴하는 윤석열 정부나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동조하지 말자. 기후정의는 기업과 금융 권력을 통제하고 사회공공성을 강화할 때 가능하다.
구준모의 아래로부터의 기후정의
기후정의동맹과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정한 변화는 아래로부터 가능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