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의 서재]『집으로 가는, 길』, 홍은전 외 5인, 오월의봄
탈시설 ‘이후’를 고민하다
‘집으로 가는’과 ‘길’ 사이에 쉼표가 찍혀있는 책을 받아들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사자와 조력자들이 고군분투하며 집으로 가기 위해 함께 버텨냈을 ‘길 위의 시간들’이었다. 시설을 나온다고 바로 살 집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살 집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게 해주었던 건 바로 이 쉼표였다.
2008년, 석암재단 산하 석암베네스다요양원의 거주인과 직원들은 재단의 비리와 거주인에 대한 인권유린을 폭로하며 문제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운동을 조직했다. 그 후 5년간 시민사회의 끈질긴 개입을 통해 재단 운영진이 완전히 교체되면서, 석암재단은 사회복지법인 프리웰로 다시 태어났다. 프리웰은 2021년 4월 30일 향유의집(구 석암베네스다요양원) 폐지를 시작으로, 법인 산하에 있는 나머지 거주시설들도 점진적으로 폐지할 계획을 하고 있다.
탈시설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워 왔고, 프리웰 이사장이 되어 거주인 모두를 탈시설로 이끌고 시설폐지를 이뤄낸 김정하는 탈시설운동이 다름 아닌 ‘주거권운동’이라고 강조한다. 장애인들에게 시설을 나온다는 건 ‘집을 만드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화성외국인보호소 ‘새우 꺾기’ 고문 피해자 M이 우여곡절 끝에 보호소를 나오게 되었을 때, 그를 조력하면서 제일 먼저 고민했던 것도 바로 ‘살 집’이었다. 미등록인 상태에서는 자기 이름으로 월세 계약을 할 수도, 통장을 만들거나 휴대폰을 개통할 수도 없다. M에겐 누군가의 이름을 빌려서만 살아낼 수 있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물해방공동체직접행동DxE가 공개구조한 돼지 ‘새벽이’도 끔찍한 축사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갑자기 ‘살 집’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생추어리(sanctuary, 구조한 동물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조성한 안식처)로 갈 때까지 활동가의 집을 비롯해 여러 곳을 거쳤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의 조력과 헌신이 있었다.
- 시설을 탈출한 M과 새벽이, 여전히 숨 막히는 ‘시설 밖 생활’
M이 ‘밖’으로 나왔을 때, 그가 했던 말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일 년 만에 신발을 신으니 걸음이 어색하다”는 말이었다. 그에게 함께 싸워나가자고 했지만 일상의 회복은 생각보다 더뎠고, 구금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M은 여러 공론장에서 “나는 지붕 없는 감옥에 살고 있다,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주장을 해왔다. 보호소 ‘밖’으로 나온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취약성을 강화하는 삶의 조건들 속에 놓인다. 미등록이주민은 노동이 금지되어 있고, 대부분의 의료혜택에서도 배제되어 있으며, 매달 출입국에 출석해서 도망치지 않았음을 몸소 증명해야 하고, 석 달마다 체류기한을 연장해야 하는 삶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취약함을 간파하고 있는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보호소는 ‘풀어주고 숨통을 조이는’ 통치 기술을 구사하여,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된 이들이 제 발로 이 나라를 떠나게 하는 ‘자진출국’이라는 이름의 ‘추방’을 기획해 왔다.
동물해방운동을 하는 동료들에게서도 비슷한 곤경을 보게 된다. 새벽이가 생추어리에서 살게 된 이후 시작된 활동가들의 ‘돌봄투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 과정은 새벽이와 활동가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만나고, 갈등하고, 실패하고, 도전받는 모든 시간이 기존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관계를 맺는 과정이다. 탈시설 이후 장애인의 삶, 외국인보호소의 구금에서 풀려난 미등록외국인의 삶, 공개 구조된 이후 동물들의 삶이 드라마틱한 탈출 서사 ‘이후’에 우리에게 요청하는 실천이 있다면 그것은 순탄치만은 않은 새로운 관계적 삶과 기존의 지배적인 지식 체계에 근거하지 않는 대안적 앎이 아닐까.
- 당사자와 조력자, 새로운 관계성에 대한 고민
당사자들의 요청은 조력자에게도 많은 부분 영향을 끼친다. 향유의집 마지막 원장 정재원은 지원주택(거주자가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생활전반의 서비스가 포함된 주택)을 만난 후 자신의 삶이 크게 바뀌었다고 말한다. 서비스 대상자와 맺는 관계가 새로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관리적인 측면에서, 모든 것을 ‘보호’라는 관점에서 접근했지만, 지원주택은 지원, 지지, 동행이라는 시각이 요청되었고, 시설에서처럼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할지가 아니라 욕구의 복합성과 다양성에 착안하여 개별 대상자의 상황에 맞게 조력을 연결해 주는 사례지원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외국인보호소에서 나와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미등록이주민들과 축산업 축사에서 나와 생추어리에서 살게 된 동물들과의 관계 맺기에도 커다란 참조점을 제시해 준다. 이는 당사자의 고유성 혹은 본연의 모습을 존중하는 문제이기도 하고, ‘피해’의 폭로에 그치거나 피해자-조력자 관계의 전형성에 머무르지 않는 새로운 관계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본래 돼지들은 8개의 송곳니가 날카로운 엄니로 자라난다고 한다. 점점 자라나는 새벽이의 송곳니를 마주한 향기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새벽이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다가오면 쫓아내려고 입을 벌린다. 송곳니를 보이고 무는 시늉을 한다. 안전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방어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그러나 축산업은 돼지들의 안전을 위해 이를 자른다고 말한다. 그들을 좁은 우리에 몰아넣은 뒤 ‘안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 말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향기 외 2인, 호밀밭, 2021, 44쪽)
‘스스로를 보호하고 방어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안전’이라면, 시설은 바로 이러한 ‘안전’을 앗아가는 장소가 아닐까. 이처럼 탈시설을 향한 조력과 연대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갈등’을 새롭게 인식하고, 현장에서 길어 올린 관계 맺기의 경험을 벼려내는 말들이 필요하다.
- 시설의 본질 : 시설은 ‘누구를’ 보호하는가
시설은 시설 ‘안’에 갇혀 지내는 존재들이 아닌, ‘바깥’의 안락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존속한다는 점에서 위의 운동들은 ‘항거’의 지평을 공유한다. 비국민, 장애인, 동물을 가두는 시설은 시설 ‘바깥’의 안전과 안락함이 이들을 우리 삶에서 격리하여 가둠으로써만 확보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의 체계로 지탱된다. 비국민을 가둠으로써만 국민의 안전이 보장되고, 장애인을 가둠으로써만 비장애인들의 삶이 방해받지 않고, 동물을 가두고 수탈함으로써만 인간의 삶이 지속된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물음의 좌표를 원점으로 되돌려 관행이 되어버린 ‘감금/구금’이라는 폭력을 다시 문제 삼아야 한다. 시설은 누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보호’로 확보되는 ‘안전’이란 누구의 것인가.
그래서 “오랜 기간 우리 사회는 장애인이 특정 병원이나 시설에서 살아가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여겼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분리, 억제, 통제와 같은 차별화 조치가 ‘그들’을 위한 것인지, 그들에 속해있지 않은 ‘우리’를 위한 것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렀다”(338~339쪽)는 전근배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보호’의 실체가 ‘감금/구금’이라면, ‘보호’는 명백히 지배자의 언어다. 더욱이 비장애인, 국민, 인간의 ‘안전’을 담보로 하는 ‘보호’는 노골적으로 겹겹의 차별과 혐오를 양산하며 통치 기술로 작동한다. 외국인보호소라는 공간에서 정신장애인, HIV감염인, 약물의존증, 알콜의존증 등의 취약성을 가진 이들은 그러한 취약성이 강화되고 극대화되는 구금환경 속에서 상해와 사망 등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기 쉽다.
두 달 전 부산출입국외국인청에서도 입소 여덟 시간 만에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의료적 판단 없이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끌려다니다가 제대로 된 의료 조치도 받지 못한 채 길바닥에서, 구급차 안에서 허망하게 숨을 거두었다. 독방 감금, 제압 과정, 고문 도구와 흡사한 ‘보호장비’ 사용, 호송 과정, 의료시설 미비 등 그의 취약성을 강화하는 조건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개인의 취약성 때문이 아니라, 그의 취약성을 강화하는 조건들 속에서 죽음에 이르렀다.
- ‘시설을 개선하겠다’는 말이 가리는 시설 문제
“계속 시설을 유지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인권침해 없이 민주적으로 운영한다? 그런다 한들 거주인들의 삶은 달라질 수 없어요.” (프리웰 초대 이사장 박숙경, 189쪽)
“2008년 늦여름, 비리에 연루된 (재단) 사람들이 재판을 받고 실형을 살게 됐어요. 그러니까 노조에서는 투쟁을 그만두자고 했어요.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은 달랐죠. 이 투쟁의 동력을 더욱더 끌고 가서 탈시설-자립생활 투쟁까지 이어가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때부터 노조와 장애 당사자, 외부 활동가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죠.” (시설비리 최초 고발자 한규선, 224쪽)
박숙경과 한규선의 말은 ‘여세’를 몰아가는 직접행동의 중요함을 상기시킨다. 외국인보호소와 관련해서 폐지 운동과 면회 활동을 병행하다 보니, 시설폐지를 주장하면서도 시설 ‘안’에 있는 이들의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분열증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시설 ‘밖’에 대한 상상력은 곧잘 시설 ‘안’의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잠식당하고 만다.
작년 가을,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발생한 이른바 ‘새우 꺾기’ 고문 사건 이후, 법무부는 외국인보호소를 ‘인권친화적인 개방형 시설’로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며, 깨끗한 바닥과 방 사이 이동이 가능한 넓은 공유 거실로 리모델링한 사진을 대대적으로 공개했다. 그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시설 좋아졌다”는 말을 했다. 이렇게 계속 시설이나 처우를 개선해 나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중요하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한국의 축산 관련 기업들의 홈페이지에는 동물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동물복지’에 힘쓰고 있다는 홍보문구가 넘쳐난다. 이러한 담론은 축산업 시설의 정당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전략적으로 기획된다. 외국인보호소폐지운동이 시설 ‘개선’이 아닌 ‘폐지’를, 동물해방공동체직접행동DxE가 축산업을 존속시키는 동물‘복지’가 아닌 축산업 폐지를 통한 동물‘해방’을, 장애인 탈시설운동이 시설의 ‘민주적 운영’이 아닌 ‘탈시설’을 주장하는 것에는 공동의 문제의식이 있다. 아무리 시설이 나아진다 한들, 시설 ‘안’의 삶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설 ‘안’에서는 관리와 통치의 대상이 될 뿐, 삶의 주체 혹은 권리의 주체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권친화적인 외국인보호소, 동물친화적인 축산업 축사, 장애인 친화적인 시설은 애초에 존립불가능한 장소이며, 이때 ‘~친화적’이라는 수식어는 본질을 가리는 수사일 뿐이다.
- ‘그런 세상이 올까’ 상상에서부터 시작하는 항거
프리웰 이사장이 된 탈시설운동가 김정하는 시설에 사는 장애인이 지역사회로 나오기 위해서는 활동지원서비스, 소득 그리고 집, 이렇게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시설에서는 대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9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개최한 이주구금 국제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그럴싸한 말들이 오가는 공론장에서 옆자리에 앉아있던 동료 림보가 이런 말을 건넸다. “우리의 운동은 구금의 대안을 찾자는 것이지, 대안적 구금을 모색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즉, 우리는 시설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형 숙소’처럼 아무도 가두지 않는 방식으로 체류기간이 지난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길 요구하는 것이다. 가두거나 감시하지 않는 생활형 숙소는 ‘자유로운 외출’과 ‘경제활동’이 보장되는 구금의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얼핏 생활형 숙소로 보이지만 실상은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특별기여자’로 호명된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에게 임시거처로 제공되었던 진천 공무원연수원과 여수 해경교육원은 외출이나 변호사 접견, 일체의 면회가 금지되었다는 점에서 ‘생활형 숙소’가 아닌 ‘구금시설’이며, 이곳은 난민들의 삶보다 행정상의 편의를 우선하여 운용되었다.
‘또 다른 구금’을 초래하는 형태로 구금의 대안이 제시되어서는 안 된다. 최대한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생활형 숙소야말로 아무도 가두지 않는 대안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구금의 대안은 반드시 구금이 아닌 방식으로, 노동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이주구금의 문제는 무엇보다 불안정한 노동의 문제와 연쇄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대안적 구금’은 누군가는 갇혀있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사회적 유대감을 끊어내며 통치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구금의 대안’은 분리된 세계를 종식시키겠다는, 아무도 가두지 않겠다는 의지와 그 이후의 상상력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대안적 구금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장애인시설이 없는 세상, 외국인보호소가 없는 세상, 축산업이 철폐된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우리의 항거는 시작된다고 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과연 그런 세상이 올까’ 하는 마음이 들 때면, 『집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이들과 그들의 이야기에 개입하며 기록한 이들의 노고에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그들과 함께 싸우면서도 그들이 가리킨 미래가 실현될 것을 믿지는 않았다. 믿기지 않는 말들이었다. 수많은 장애인들이 시설에 묶여 살고 맞아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믿어지지 않는 말을 진지하게 자꾸 반복하는 그들을 믿었다. 그런 이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믿어지지 않는 세계를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나는 경험적으로 알았다. 이동권 투쟁이 그랬고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이 그랬다. 탈시설운동은 바로 그 경험과 성과 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홍은전, 36쪽)
필자 소개
심아정. 외국인보호소폐지를위한물결IW31, 화성외국인보호소방문시민모임 마중, 동물해방공동체직접행동DxE에서 활동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