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너무한 정하 씨
김정하의 지난 20년은 한국 장애인 탈시설운동이 도전하고 실패하고 도약하며 전진해온 역사 위에 그대로 포개어진다. 2001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재직 시절, 미신고 장애인시설의 인권침해에 대응하기 시작한 그는 2005년 탈시설운동 전문 단체인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을 창립했다. 2006년에는 대형 사회복지법인의 비리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고, 2009년에는 석암재단이 운영하는 거주시설에서 뛰쳐나온 장애인들과 함께 본격적인 탈시설 권리 투쟁을 일으켰으며, 2013년 서울시 1차 탈시설화 계획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2018년 김정하는 사회복지법인 프리웰의 이사장이 되었다. 프리웰은 10년 전 문제시설이었던 석암재단이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새롭게 탄생한 법인으로, 산하에 3개의 장애인거주시설을 운영하는 대형 사회복지법인이었다. 권력에 맞서 싸우던 사람이 그 권력에 앉는 이야기엔 필연적인 위태로움이 있다. 그 자리에선 누구나 높은 확률로 ‘사회적 합의’나 ‘절차적 민주주의’, ‘나중에’ 같은 말을 자꾸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그런 우려에 선을 긋듯이 매우 원칙적이고 급진적으로 ‘시설 폐지’를 의결했다. 산하 시설인 향유의집에 사는 모든 거주인을 안전하고 빠르게 자립시킨 뒤 누구도 다시는 이곳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시설의 문을 닫는 것이었다.
2021년 향유의집은 정말로 문을 닫았다. 텅 비어있는 장애인거주시설 향유의집과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탈시설’의 선례를 만든 김정하는 탈시설의 상징이 되었고 동시에 반대 세력들의 맹렬한 공격대상이 되었다. 그는 현재 10년 안에 전국의 모든 장애인거주시설을 폐지한다는 어마어마한 내용을 담은 탈시설지원법을 제정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내 핸드폰에 그의 이름은 “너무한 정하 씨”로 저장되어 있다. 그는 너무 성실하고 너무 올바르고 너무 책임감이 강하고 너무 용감하고 너무 멋있고 그리고 너무너무… 미련한 것이다. 2011년 광주 인화학교의 폭력을 다룬 영화 ‘도가니’로 전국이 들썩이던 때 정하는 도가니대책위에 들어가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위해 밤낮없이 뛰었다. 어느 날 오전 기자회견을 앞두고 정하가 봉고차에 발전기를 싣기 위해 끙, 하며 힘을 주는 순간 그는 허리 어딘가에서 뻑, 하고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발전기는 비장애 남성도 둘이 함께 들어야 할 만큼 육중한 물건이지만 그즈음 정하는 그걸 혼자서 싣고 내리며 하루에도 몇 건의 일정들을 소화하고 있었다. 바쁜 동료들에게 도와달라고 하기 미안했고 불행히도 그의 허리가 매우 튼튼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하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날 하루 종일 진짜 미치겠대… 진짜 심하게 고통스럽더라고.”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정하가 자기 입으로 힘들다고 말할 정도면 그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지.”
남들은 다 아는 걸 정하 자신만 몰랐다. 너무한 정하 씨는 그날 낮 기자회견 두 개를 진행하고 저녁엔 장애인권영화제 사회를 보았다. 행사를 마친 뒤엔 광주에서 온 사람들을 용산역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일어나지 못했고… 병원에 실려 가 의사로부터 디스크가 터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척추 뼈 사이에서 충격을 흡수하던 디스크가 더 이상의 격무를 견디지 못해 찢어지자 그 안에 얌전히 있어야 할 수핵이 바깥으로 주르륵 흘러내린 것이다. 자신의 몸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엑스레이 사진을 본 정하는 아픈 와중에도 뭔가 시원하다고 느끼며 읊조렸다.
‘아, 내가 진짜 아팠구나…’
얼마만큼 아파야 진짜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정하는 항상 어렵다고 느꼈다. 세상엔 자기보다 더 아픈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하가 너무 어려워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속이다. 마음도 엑스레이처럼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그것은 너무나 복잡하고 미묘하다. 거기엔 물론 자기 자신의 마음도 포함된다.
첫 번째 인터뷰는 2022년 봄 여의도에서 했다. 우리는 금요일 오후 4시, 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마친 뒤 바로 옆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하의 오랜 팬인 나의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언니는 몇 살 때부터 그렇게 열심히 살았어요?”
정하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앉았다. 이것은 칭찬인가 놀림인가 진짜 질문인가(그 모든 것이다). 너무 당황스러운 와중에 정하의 수학적인 뇌가 ‘나는 몇 살부터 열심히 살았더라…?’ 하며 데이터를 돌리기 시작하지만 그는 역시 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얼마만큼 열심히 살아야 ‘열심히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딱 떨어지지 않는 모든 것이 정하를 얼어붙게 만든다. 얼음이 된 정하는 좀 귀엽기 때문에 얼른 ‘땡’을 해주고 싶은 마음과 조금 더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든다. 나는 노래하듯 경쾌하게 말한다.
“언니는 쭉~~ 열심히 살았구나~?”
이럴 땐 겸손해야 할까, 진실해야 할까, 대인배처럼 굴어야 할까, 갈팡질팡하던 정하가 이도 저도 아니게 대답하고 만다.
“으응, 아니, 뭐, 그, 그, 그렇지.”
그날도 정하는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이야기했다. 금요일 저녁 7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정하는 결코 힘들다고 말하는 법이 없지만 그의 얼굴엔 애써 견디고 있는 자의 고단함이 늘 비친다. 무엇을 보고 겪으면 이토록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되는지 밤새도록 듣고 싶으면서도 어쩐지 그 얼굴이 애처로워서 나는 정하의 말을 끊었다.
“언니, 이 인터뷰는 그렇게까지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어요.”
바쁜 그를 붙들고 계속 말을 시키고 있는 건 정작 나이면서도 그런 소릴 한다. 정하가 뒤로 순하게 물러앉으며 착한 어린이처럼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의 얼굴에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은전이 말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 근데 내가 대답을 잘 못하면 은전이가 정리하느라 고생을 많이 하게 될 텐데 미안해서 어쩌지, 아, 내 생애 인터뷰라니 너무 부담스러워, 역시 안 한다고 할 걸 그랬어’ 하는 마음들이 순차적으로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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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하고 키 크고 힘이 센
1975년 서울 왕십리에서 아들만 셋 있는 집 막내딸로 태어났어요. 공주처럼 컸을 것 같지만 그런 건 순정만화 속에서나 있는 일이죠. 내가 나중에 운동을 하게 된 이유엔 엄마가 너무 ‘아들, 아들’ 하신 것에 대한 불만도 영향을 줬을 거예요. 오빠들 입던 내복 물려 입고 여자 앤데도 오빠들 입던 남자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를 갔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가 처음으로 빤닥빤닥한 에나맬 구두를 사줬는데 너무 좋아서 학교에 매일 신고 갔어요. 체육 하는 날도 구두 신고 축구했어요. 오빠들하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서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오빠들은 내 생활 반경에 없었어요. 언니 있는 애들이 너무 부러워서 오빠들이 집으로 돌아올 땐 언니로 바뀌어 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어요.
내성적이고 속 얘기를 잘 못하던 아이였어요. 어렸을 때 집안이 경제적으로 힘들었는데 엄마가 애를 넷이나 키우느라고 고생이 많았어요.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의식적으로 착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뭔가 부탁하면 거절을 못했고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친구 하나가 매일 자기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거절을 못해서 1년 동안 그 애를 데려다줬어요.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었는데 걔는 왜 그랬을까?(갸우뚱) 나는 왜 또 그걸 거절하지 못했을까?(갸우뚱) 착한 어린이상을 두 번이나 받았어요. 학생들이 투표해서 주는 상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좀 이상한데, 그런 상을 왜 줬을까?(생각에 잠김)
지금 내 키가 168cm인데 이게 초등학생 때 키예요. 다른 애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어서 애들이 나를 언니나 누나 같은 존재로 느꼈던 것 같아요. 항상 맨 뒤에 앉고 우유 나르는 일, 힘써야 하는 일 같은 걸 많이 맡았어요. 100미터 달리기를 15초에 달리고 운동신경도 좋아서 선생님들마다 나한테 육상선수 해라, 사격선수 해라, 농구선수 해라, 권했어요. 아무 노력도 안 했는데 근육이 많은 스타일. 이 운동(데모)이 아니라 다른 운동(스포츠)을 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 집은 가난해서 네 번째 자식한테까지 쓸 돈이 없다는 걸 잘 알았으니까 아예 생각을 안 했죠.
쾌활하고 유쾌하게 유년기를 보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해서 고등학교까지 쭉 열심히 활동했어요. 교회는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어요. 노래도 부르고 악기도 연주하고 문학의 밤 행사하면 연극도 하고 크리스마스엔 초도 들고 다녔죠. 부모님은 내가 교회에 다니는 걸 반대하셨어요. 오빠도 교회에 다녔는데 집안에서 반대하니까 그만뒀어요. 그런데 나는 친구들과 너무 정이 들어서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내가 고집을 굽히지 않으니까 엄마가 목사님께 따지러 오신 적도 있어요.
명동에 있는 숭의여고를 다녔는데 그때부터 아주 바빠졌어요. 신문반에 가입하고 친구들이랑 풍물패 동아리도 만들었어요. 풍물패는 학교에서 못 만들게 해서 몰래 만든 거였어요. 자원봉사 동아리도 만들어서 한 달에 한 번 홀트아동복지원에 갔어요. 홀트아동복지원은 중학교 때부터 교회 사람들이랑 꾸준히 봉사하러 다니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담당하던 전도사 선생님이 갑자기 그만두면서 활동이 중단됐어요. 지난번 복지원에 봉사하러 갔을 때 “다음에 또 올게요” 하고 헤어졌는데 갑자기 안 가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학교 친구들을 모아서 가기 시작한 거죠. 고3 때도 계속 갔어요. 공부해야 하니까 못 간다는 게 저 스스로 납득이 안 되더라고요.
처음엔 12명이었는데 많을 땐 20명까지 됐어요. 봉사하러 간다는 사실을 알리는 게 좀 낯간지럽고, 성경에 보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으니까, 이건 비밀로 하자고 친구들과 약속했어요. 대형시설이었는데 우리가 갔던 공간엔 스물여섯 명이 생활했어요. 제일 어린 분이 일곱 살, 나이 많은 분은 40대 정도였어요. 그분들과 반나절 정도 같이 할 수 있는 간단한 놀이를 준비하고 간식도 나눠 먹었어요. 동정이라면 동정인데, 그것과는 또 결이 좀 달랐던 것 같아요. 내가 누군가를 동정할 만한 그런 처지는 아니었고 그냥 연민 혹은 인간애 같은 감정이 아니었을까. 이분들의 무료한 시간 중 일부라도 함께 보내면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 자신들을 환대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게 이분들에게도 좋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었어요.
비밀동아리니까 신경 써야 할 게 많았어요. “이번에 갈 거야?” “신촌역 1시 집결” 이런 걸 쪽지에 써서 몰래 친구 손에 쥐여 주고 와요. 밤에 야간자율학습 끝나면 잠깐 모여서 얘기했는데 다들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하고 친구에게 의지하고 싶은 그런 시기니까 점점 자기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만나다 보니까 비밀 아지트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 지붕을 타고 건너가면 옆 건물 옥탑에 보일러실 같은 공간이 하나 있었어요. 먼지가 엄청 쌓여있는 그곳을 싹 청소해서 거기다 일기장 같은 것도 갖다 놓았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학생들이 몰래 모여서 시를 낭독하던 동굴 같은 곳이었죠. 어떤 친구들은 죽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해줬죠. 그렇게 살았으니 공부할 시간이 없었겠죠(한숨).
- 딱 떨어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1994년에 한신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했어요. 전산과에 가고 싶었는데 떨어져서 유사한 학과에 간 거였죠. 수학을 좋아했어요. 공식을 이해하고 그 공식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논리를 전개하면 정확하게 값이 딱 떨어지는 게 좋았어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 보니 생각과 달리 수학도 철학이더라고요. ‘0은 아니지만 0에 가까이 있는 값을 뭐라고 정의할 것이냐’ 같은 문제를 생각하고 그래서 ‘리미트’ 같은 개념과 용어를 창조해내고, ‘리미트 값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은 무엇이냐’ 이런 걸 치밀하게 탐구하는 학문이더라고요. 철학은 내 성질에 잘 안 맞았어요. 고민하다가 2학년 때 신학과로 옮기려고 알아봤어요. 민중신학을 알게 됐는데 민중의 입장에서 신을 이야기하는 게 너무 매력적이었거든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녀서 기독교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어요. 종교가 가르치는 사랑이나 선함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자랐는데 민중신학 수업을 듣고는 그 선함이 허상이란 걸 깨달았어요. 민중신학은 예수가 태어났던 로마 제국주의 시대의 횡포와 불평등부터 말했고 예수는 그런 지배계급에 항거하는 존재라고 했어요. 본래 종교는 그런 것인데 인간사회가 종교를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데 이용했다는 것이죠. 기독교에선 6년 일하면 7년째엔 쉬는 안식년이라는 게 있어요. 안식년이 일곱 번째 도래했을 때인 50년을 희년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빚을 다 청산해줘요. 빈부격차가 생기더라도 50년이 되면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 평등해지는 게 바로 희년이에요. 보수적인 종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었죠.
그런데 학교 규정상 다른 학과로는 전과가 가능하지만 신학과는 안 된다고 했어요. 한신대가 미션스쿨이라 신학과만 예외적으로 우대하는 규정이 있었어요. 불합리하다고 항의했더니 그게 받아들여져서 규정을 바꾸는 데 1년이 걸렸어요. 2학년이 끝날 즈음 이제 신학과로도 전과할 수 있다고 연락이 왔는데 그사이 마음이 바뀌어서 안 간다고 했어요. 수업을 몇 개 들어보니 신학도 철학이더라고요. 유명한 수학자가 알고 보면 철학자이기도 하고 종교학자인 이유가 있었어요. 나는 구체적인 게 좋았어요. 유년 시절을 생각해보면 나는 착한 어린이 증후군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왠지 그렇게 살아야 할 거 같았어요. 그리고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있는 구체적인 현장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나에겐 사회복지가 맞을 것 같아서 3학년 때 사회복지학과로 전과했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