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대형 법인과의 첫 싸움
2005년엔 시설 비리와 싸우는 사람들을 모아 시설민주화연대가 구성되었어요. 거기서 한국소아마비협회 정립회관과 싸우고 있었던 박경석(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대표를 만났어요. 경석이 형은 장애인이동권연대의 대표였어요. 저는 이동권투쟁을 아주 좋아했어요. 연구소에서 활동할 때 우리도 이동권연대에 가입하자고 제안했는데 선배들끼리의 운동 계파가 달라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바로 옆에서 진짜 대중들의 투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함께하지 않는다는 게 답답했어요. 제가 속해있던 인권팀만 따로 조직해서 이동권투쟁 집회에 참여했다가 연행되기도 했을 만큼 저 혼자 이동권연대를 열렬히 짝사랑했어요. 그러던 차에 경석 형과 뭔가 함께할 자리가 생긴 거죠.
그즈음 S재단이라는 사회복지시설 노동조합 분들이 저를 찾아왔어요. 그분들은 2003년부터 재단의 비리에 맞서 싸우고 있었어요. 시설이 돈을 아끼느라고 한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는대요. 거주인 분들을 목욕시킬 때 씻기는 직원들도 손이 너무 시린데 벗고 있는 거주인들은 얼마나 춥겠느냐면서 직원분이 울음을 터뜨리셨어요. 어떤 분은 출근하자마자 거주인의 바지와 양말을 실로 꿰매놓았다가 퇴근할 때 다시 뜯는대요. 바닥이 너무 찬데도 발달장애인들이 양말을 자꾸 벗어버려서 그러신대요. 문제 상황은 여느 미신고시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하지만 규모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죠. S재단은 산하에 13개 기관이 있고 1,000명이 넘는 장애인이 살았고 정신병원까지 운영했어요. 국가 보조금만 연간 100억 원이 넘었어요. 다행인 것은 노조에 가입한 직원이 절반 이상인데 그 수가 200명이 넘는다고 했어요. 그동안의 싸움이 작은 국지전이었다면 S재단과의 싸움은 마치 세계대전 같았어요.
재단 이사장은 그 지역 유력 인사였어요. 노동조합이 아무리 고발을 해도 검찰은 기소하지 않았고 감사청구를 해도 감사원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정말 잘 싸워야겠다는 마음으로 박경석 대표와의 만남을 주선했어요. 막걸리를 앞에 두고 S재단 노조와 박경석, 그리고 제가 마주 앉았어요. 제가 미신고시설 같은 작은 시설들과 싸웠다면 박경석은 에바다복지회, 정립회관 같은 대형 법인들과 오랫동안 싸워본 경험이 있었어요. 경석 형이 감사청구 같은 건 소용없고 관리·감독 권한을 가진 종로구청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고, 시설비리의 책임이 지자체에도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했어요. 그러면서 종로구청 앞에서 딱 일주일만 농성을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내가 실무를 맡아주면 자기가 싸울 활동가들을 조직해보겠다고 했어요. 그땐 이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도 몰랐고 박경석의 정체도 잘 몰랐기 때문에 일주일이란 말에 속아서 시작했어요(웃음).
경석 형은 투쟁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 200명의 노조원이 싸우겠다고 찾아왔으니 엄청 신이 났을 것 같아요. 그 농성은 결국 143일간 계속되었어요. ‘속아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나도 좀 신났던 것 같아요. 시설과 싸우면서 여태 괴로웠던 건 실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함께 싸울 조직이나 사람이 없어서였어요. 그런데 박경석이 나타나 한 번 크게 싸워보자고, 같이 싸워주겠다고, 동지들을 데려오겠다고 하잖아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죠. 시설 비리 투쟁이 장애 대중의 현장 투쟁과 만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박경석의 경험과 전략적 판단도 믿음직스러웠어요. 그의 머리에서 나오는 걸 행동대장처럼 실행했죠. 관을 만들어서 화형식도 하고, 삭발도 하고, 이순신 동상에 올라가서 전단지도 뿌리고 종로구청 점거 투쟁도 했어요.
장맛비가 내리는 여름에 시작해서 눈이 펑펑 쏟아져서 천막이 무너질 때까지 했어요.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처절한 싸움이었어요. 봉고차 한 대를 구청 앞에 대놓고 농성을 시작했는데 그마저도 경찰이 자꾸 침탈해서 그 자리를 사수하느라 진을 뺐어요. 경찰이 우리 살림살이를 내동댕이치고 저항하는 장애인들을 짓밟으면 그거 말리려다가 나도 경찰한테 에워싸인 채로 발길질을 당했어요.
어느 날 새벽엔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데 비가 내리는 게 느껴졌어요. 점점 빗줄기가 얼굴을 세게 때리고 바닥에 빗물이 줄줄 흐르는데도 어찌나 피곤했던지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제 옆에 여럿 더 있었는데 아무도 안 일어났어요. 사람이 비를 맞으면서 길바닥에서 잠을 잘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죠(웃음). 일할 사람이 없어서 기자회견이라도 할라치면 한 손으로 현수막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마이크 잡고 보도자료 옆구리에 끼고 있다 기자들 오면 나눠줬죠. 기자회견 끝나면 장애인 동지들 화장실 가시는 거 따라가서 활동지원하고 돌아오면 농성장이 침탈당해 있는 그런 나날이었어요.
하루하루가 정말 빡셌지만 지금 생각하면 재밌었어요. 인권단체와 대중투쟁 조직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달랐어요. 인권단체는 국제 규약이나 법적 근거를 찾아내서 국가가 왜 인권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지 요구해요. 아무래도 더 논리적이고 정돈된 언어를 쓰죠. 그런데 당사자들은 그런 거 없어도 돼요. 설명하지 않아도 몸으로 보여줘요. 좀 거칠지만 호소력이 강해요. 그런 권리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있건 말건 “내가 살아봤는데 시설은 감옥이야!” 하면 감히 누구도 반대할 수 없어요. 인권단체들은 법률가, 전문가들이 있어서 내용을 정리하는 힘이 있었고 당사자 조직은 생생한 경험을 외치는 거리 투쟁에 능했어요. 두 세력이 만나 시너지가 났죠.
하지만 결국 실패한 싸움이었어요. 시설을 폐쇄하면 거기에 살던 수많은 장애인들에 대해 우리도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탈시설이란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했고 겨우 임원을 해임하라고 요구했는데 그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사회적 인식이 받쳐주지 않았어요. 법원 판결문을 보면 S재단 측의 악랄한 범죄 사실을 주욱 나열한 뒤 결국 마지막엔 “그렇지만 그동안 사회복지에 헌신했으니 선처한다”고 결론지어요. 모순 그 자체죠. 노조는 그 싸움으로 몹시 탄압을 받아서 세력이 줄었고 이사장은 감옥에 갔지만 나중에 그 아들이 재단을 물려받았으니 똑같은 상황이었어요. 장애인들의 삶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우리의 실력에 비해서 저들의 실력이 너무 막강했어요.
하지만 실패했다 하더라도 싸움에 꼭 이겨야 그게 더 의미 있는 투쟁은 아닌 것 같아요. 나에겐 대형 법인과 싸우는 첫 번째 투쟁이었어요. 우리나라 사회복지 법인의 족벌 구조와 위선을 폭로하는 투쟁이었고요.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그 경험이 있어 다음 싸움에서 더 잘할 수 있었어요.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다음 싸움이 두렵긴 했어도 그래도 최소한 가늠은 할 수 있는 거죠.
- 세계가 바뀌는 시간
2007년 3월 서울역 앞에서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요구하는 농성을 했어요. 사회복지법인의 이사회에 외부 이사를 둘 것, 회계를 외부 회계법인에서 관리하게 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외국의 경우 정부가 시설을 운영하지만 한국의 시설은 대부분 민간에서 족벌로 운영해요. 폐쇄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많죠. 그 농성을 하고 있을 때 한 여성이 저를 찾아왔어요.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여성이었는데 자신이 일하는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서울시 감사를 앞두고 장부를 사무실 천장을 뜯어서 숨기고 있다고 했어요. 들어보니 총체적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분에게 혼자 싸우면 위험하니 뜻 맞는 직원들을 모으라고 조언했어요. 저에게 제보하는 분들이 많이 찾아오시는데 보통은 흐지부지돼요.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그분이 그 일을 굉장히 빠르게 시행하셨어요.
얼마 후엔 그곳의 거주인분들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시설이 김포에 있었는데 에버랜드에 놀러 간다고 직원들한테 거짓말을 하고 나오셨더라고요. 그분 말씀이, 뉴스를 들으니 장애수당이 한 달에 7만 원씩 나온다는데 자신은 받은 적이 없다고 했어요. 과밀한 상태로 수용되어 계셨는데 복도에 누워있거나 기어 다니는 분들을 직원이나 원장이 걸어 다니다가 걸리적거리면 발로 차버린다거나 발달장애인을 문고리에 묶어두거나 팔다리를 묶는 일도 다반사였어요. 이건 딱 들어도 큰 사건이었어요. 아… 이 싸움을 또 하는 건가… 두렵더라고요.
만약 당신들이 들고 일어섰을 때 내부의 장애인 중에 뜻을 모아줄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물었더니 20명이 넘는다고 했어요. 오!!!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장애인시설이라는 곳이 구조적으로 그러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그러면 그 20명으로 조직을 만들라고 제안했어요. 기존의 싸움에서 피해 당사자인 거주인이 주체가 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석암재단은 달랐어요. 당사자들이 조직을 결성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니까 굉장한 시너지가 나더라고요.
석암재단은 장애인시설 네 개, 노인시설 두 개를 운영하고 연간 국고보조금만 70억이 넘는 대형 재단이었어요. 그중 문제의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은 거주인이 116명, 직원이 66명인 시설이었죠. 2008년 1월 직원, 거주인, 외부 단체들이 모여 책임자 처벌과 이사진 전원 교체를 요구하면서 싸움을 시작했어요. 이사장은 곧바로 구속됐어요. 석암재단은 이사장 일가 전체를 먹여 살린 그 집안의 사업이었어요. 이사장의 사위가 중증장애인 시설 원장이고 처남이 장애아동시설 원장, 공동설립자의 딸이 노인 시설 원장, 이런 식이었어요. 이사장 딸이 직원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1억 넘는 인건비를 가져가는가 하면 시설에 거주하는 경증의 장애여성을 직원으로 등록해 일을 시키고는 임금은 주지 않았어요. 이들 일가에게 장애인은 철저히 돈벌이의 수단이었죠.
시설은 김포에 있었지만 법인은 서울에 있어서 관리·감독 권한은 서울시와 양천구에 있었어요. 우리는 시설 폐쇄와 이사진 전원 해임을 요구하면서 서울시청과 양천구청 앞에서 농성했어요. 김포의 시설에 사는 거주인 15명이 매일같이 서울에 와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했어요. 이분들의 이동을 위해 매일 봉고차 7~8대를 섭외해야 했어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이 이 투쟁 판을 벌이기 위해 해야 했던 일들이 어마어마했어요. 발바닥행동은 그 싸움을 하려고 휠체어 리프트가 달린 특장차(봉고차)도 한 대 샀어요. 전장연 소속 봉고차와 활동가들은 모두 동원되어 석암재단 거주인분들의 이동을 지원했죠.
놀라웠던 건 거주인분들이 갑자기 이런 활동을 시작하셨으니까 한 번쯤 몸살이 날 법도 한데 마지막까지 성실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저희가 돈이 많지 않아서 매번 식사지원을 할 수 없어서 저녁식사는 시설에 돌아가서 드실 수 있도록 일정을 짰어요. 하루 종일 추운 데서 고생하신 분들을 늦은 오후에 시설로 돌려보낼 때마다 참 죄송했어요. 배고프다고, 지금 돌아가면 식은 밥밖에 없다고, 불만을 표하실 법도 한데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었어요. 그분들로선 자기들 문제인데 사람들이 함께 싸워주니 고마웠던 것 같고 또 문화 충격도 받으셨던 것 같아요. 전장연의 중증장애인들이 당당하게 요구하고 항의하고 경찰과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아, 장애인이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셨겠죠. 처음엔 현수막 뒤에 얌전히 앉아계시던 분들이 점점 목소리를 내고 따지고 드세지는 게 눈에 보였어요(웃음). 나중엔 광화문 사거리를 점거할 때 선두로 나서기도 하셨어요.
1년 동안 그분들과 서울과 김포를 오가는 봉고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싸우면 싸울수록 권리의식이 높아지고 보이는 게 달라지는 거예요. 예전엔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도 이젠 문제라고 인식하게 되신 거죠. 어떤 발달장애인이 방 안에서 사망했는데 오랜 시간 방치해서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들이 막 터져 나왔어요. 거주인들의 활동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막 뻗어나갔어요. 반면 직원들의 활동은 점점 쇠퇴하다 완전히 중단됐어요. 장애인들이 탈시설권리 보장하라, 같은 걸 외치는 게 시설 직원들에겐 불편했겠죠. 직원에게 시설은 일터니까 보다 민주적이고 일할만한 조직이면 족했지만 거주인에게 시설은 삶터이면서 감옥이었던 거예요. 거주인들의 권리의식이 점점 높아지면서 더 이상 시설 직원들과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없는 시기로 들어갔던 거예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