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지난 9월 5일, 장애인권리예산을 요구하는 지하철 시위에서 김정하 활동가. 몸자보에는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고 지역사회 함께 살자!”고 적혀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9월 5일, 장애인권리예산을 요구하는 지하철 시위에서 김정하 활동가. 몸자보에는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고 지역사회 함께 살자!”고 적혀 있다. 사진 현다혜

- 1라운드, 승

2021년 정부가 ‘탈시설 로드맵’을 발표했어요. 2041년까지 거주시설에 사는 2만 9천 명의 장애인을 탈시설시키겠다는 계획이었어요. 2012년부터 전장연이 5년 동안 광화문 지하보도 안에서 ‘수용시설 폐지’를 위해 농성한 결과였고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발표한 탈시설 정책이었어요. 그러자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 시설기득권 세력들의 움직임이 거세졌고 시설에 자녀를 보낸 부모들의 조직이 꾸려졌어요. 그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저와 프리웰이 되었죠. 우리가 무연고 발달장애인을 강제로 퇴소시켜서 그들이 지금 골방에 갇혀있다는 내용을 언론에 계속 뿌리고 있어요.

어떤 토론회 갔더니 탈시설 반대하는 거주시설 이용자 부모님들이 조직적으로 오셔서 진을 치고 계셨어요. 저를 향해 막 열변을 토하셨어요. 당신 자녀는 아무것도 못해서 오직 보호만이 살길인데 현실도 모르는 내가 탈시설을 주장한다는 것이었죠. 눈 딱 감고 받아드렸어야 하는데 그만 정의롭게 설파하고 말았어요. 부모나 전문가들이 발달장애인들을 무능력한 존재로 취급하니까 사회가 더 격리 정책을 펼친다고요. 그분은 더 흥분하셨죠. 제가 잘못한 거예요.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의 상처를 더 후벼 판 거니까. 알고 있었는데 순간 감정이 격해져서 그렇게 말해버린 걸 오랫동안 후회했어요.

모든 거주인이 탈시설한 후 문을 닫은 향유의집. 곰팡이가 핀 누런 벽지에 지난 시간의 흔적이 보인다. 사진 현다혜
모든 거주인이 탈시설한 후 문을 닫은 향유의집. 곰팡이가 핀 누런 벽지에 지난 시간의 흔적이 보인다. 사진 현다혜

어느 날은 국회에서 탈시설에 관한 전시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분들이 또 몰려오셨어요. 이거 다 치우라고 소리를 지르시면서 나를 향해 온갖 악담을 퍼부으셨어요. 이번엔 대응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날 국회에 와 있던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인 한종선에게 빨리 와달라고 연락했어요. 종선은 당사자였고 또 누나가 정신장애가 있는데 시설에 오랫동안 살았어요. 종선이 달려와서 “어머니, 시설에서 살아봤어요? 나는 살아봤어요!” 하면서 눈에 쌍심지를 켰고 곧 장애당사자들도 여럿 오니까 어머님들이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물러나시더라고요.

그날 국회 밖에선 미류와 이종걸 활동가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농성을 하고 있었어요. 오후에 동조단식을 하러 갔어요. 참가자들이 조용히 앉아서 국회의원들한테 법 제정을 촉구하는 문자를 보내고 있었는데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측에서 나온 젊은 분들이 “며느리가 남자라니, 사위가 여자라니” 하면서 막 악을 쓰시더라고요. 미류는 단식 40일이 넘었을 때였어요. 내가 “미류야” 하면서 어깨에 손을 댔는데 어깨뼈와 등뼈가 앙상하게 만져졌어요. 마르다 못해 부서질 것 같더라고요. 나중에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데 그날 겪은 일들이 막 떠오르면서 눈물이 왈칵 나버렸어요. 국회에서 했던 전시는 장애인들이 시설에서 어떤 학대를 당했는지 보여주는 사진과 글이었어요. 형제복지원에서 엄청난 폭력을 겪었던 한종선과 그 누나의 삶도 마음이 아프고요. 그런데 그 어머님들은 그런 삶에 대해 들으려고 하지 않고 소리 지르고 함부로 말하시니까 뭔가 꽉 막힌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프리웰 대표가 된 후 안팎으로 너무 큰 주목을 받았어요. 지지도 혐오도 이토록 난무할 줄 몰랐어요. 어쨌든 1라운드는 우리가 이겼어요. 언젠가 한 번은 치렀어야 하는 싸움이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서울시 탈시설지원조례가 통과됐어요. 탈시설지원법 제정으로 가는 전초전이었는데 그것도 이겼죠. 이것은 시작일 뿐이에요. 우리 법인에도 두 개 시설이 더 남아있고 전국엔 수많은 시설이 있어요. 모두 프리웰 같은 방식으로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계속 이렇게 의지 있고 능력 있는 장애인들 중심으로 시나브로 자립하는 흐름은 안 돼요. 시설엔 무수히 많은 최중증장애인들이 있고 그들은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스스로 나올 수 없어요. 늙어가고 있는 그분들의 하루하루가 중요해요. 이미 너무 늦었어요.

지난 2021년 10월에는 향유의집에서 ‘관람모드 - 있는 방식’이라는 제목의 공연이 진행됐다. 향유의집 곳곳을 당사자의 증언으로 채운 이 공연에서 과거 시체실로 사용된 방에 그 거주자의 증언이 벽과 바닥에 새겨져 있다. 공연은 끝났지만 공연 당시 사용한 것을 그대로 두었다. 사진 현다혜
지난 2021년 10월에는 향유의집에서 ‘관람모드 - 있는 방식’이라는 제목의 공연이 진행됐다. 향유의집 곳곳을 당사자의 증언으로 채운 이 공연에서 과거 시체실로 사용된 방에 그 거주자의 증언이 벽과 바닥에 새겨져 있다. 공연은 끝났지만 공연 당시 사용한 것을 그대로 두었다. 사진 현다혜

- 맛없는 떡볶이라 할지라도

뭘 위해 싸웠다기보다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가치와 신념이 받쳐줘야 더 보람 있다고 느끼는 성향인데다 주변의 동료들이 너무 좋았어요. 학생 운동이 좀 추상적이었다면 장애인운동은 내가 정붙인 사람들이 사는 사회를 바꾸는 것이라 좋았어요. 여러 현장이 눈 앞에 펼쳐지고 그들과 함께 좌충우돌하면서 사람들의 삶이 바뀌는 걸 목격하는 이 운동이 매력적이었어요.

탈시설한 분들이 자기 삶의 어떤 장면을 나한테 막 좋아서 이야기할 때 참 좋아요. “임대 아파트 당첨됐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우리 집에 놀러 와” 그런 거요. 발달장애인 분이 나를 초대하셔서 떡볶이를 해주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설탕도 안 넣고 진짜 떡하고 고추장만 넣으신 거예요. 그래도 맛있게 먹었어요. 그런 때가 너무 좋아요. 그분은 S재단 시설에서 강제 노동을 하던 분이었어요. 나중에 친해졌을 때 저한테 얘기하셨어요. “시설에 살 때 직원들이 김정하 무서운 사람이라고 그랬어, 만나면 안 된다고.” 과거를 알기 때문에 그분들이 지역사회에서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훨씬 크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에 내가 초대되고 그 일상의 장면을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리는 게 기쁘죠. 물론 그분들의 일상에 사건·사고도 우여곡절도 많아요. 그래도 좋아요. 다들 그렇게 사는 거잖아요.

이제 곧 발바닥행동 20주년이 다가오는데 내가 마지막 남은 창립멤버예요.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때는 화도 나고 어떤 때는 슬프고 외로워서 무너지기도 했어요. 같이 할 동료들을 만들어내는 게 제일 중요한 건데 그걸 잘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떠났던 게 제일 속상해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가장 마지막에 남을 거라는 걸. 중간에 유혹이 없진 않았어요. 운동하지 않고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해도 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부모님이 아프셨을 때나 여러 가지 개인사가 무거울 때마다 떠날 것에 대한 변명거리를 끄집어서 붙여봤어요. 나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대는 다음 사람들이 그들의 방식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안 되더라고요. 하면 할수록 책임감이 커져요. 살면 살수록 삶의 무게가 무거워져요. 내 무덤을 내가 판 거죠. 마지막 프리웰의 해산까지 꼭 내 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리 운동하는 사람이라도 사유화할 수 있다는 걸 경계해야죠. 지금은 대안이 없으니 제가 하지만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할 수도 있죠. 다만 내가 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은 지고 가보려고요.

공휴일인 8월 15일, 김정하 활동가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공휴일인 8월 15일, 김정하 활동가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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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하로 산다는 것

“언니는 못하는 게 뭐예요?”

칭찬도 아니고 놀리는 것도 아닌 진짜 질문이었다. 정하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노래. 그리고 위로. 나는 위로를 하는 게 그렇게 어렵더라.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그러면서 정하는 자신이 힘들었던 인생의 고비마다 나타나 쓰린 마음을 위로해주었던 ‘쓰리박’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옥순, 박래군(인권재단사람 대표), 그리고 박경석이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일할 때 발달장애 당사자를 직접 지원해서 돌보는 일을 했는데 나는 남의 감정을 잘 못 읽으니까 잘 안 맞더라고. 내 마음도 모르는 사람이 발달장애인의 마음을 어떻게 읽겠니… 그만두려고 했는데 옥순 언니가 해물찜을 사주면서 나를 마악~ 위로해줬어. 그러면서 인권팀으로 옮겨서 정책 운동을 해보자는 거야. 그 말에 혹해서 주저앉았지. 거기서 시설문제를 만났어. 몇 년 했더니 처참한 상황을 계속 목격하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 그때 래군 형이 술을 사줬어. 돌아가신 동생 박래전 열사 이야기를 해주면서 인권 운동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마악~ 얘기해주셨지. 그 말에 혹해서 또 주저앉았어. 그러다 전장연 운동을 만났는데 이건 몸이 너어~~무 고된 거야. 농성을 하면 야간에 중증장애인 농성자들 활동지원하고 주무시는 거 확인한 뒤에 내일 있을 기자회견에 대해 밤새 토론하는데 그러면 새벽 두세 시가 돼. 밑도 끝도 없는 이 운동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도망갈 때를 노릴 때… 경석 형이 약물 치료라면서 술을 사주며 장애 대중과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가를 또 마악~ 설파하셨지…”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와 김정하 활동가. 사진 현다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와 김정하 활동가. 사진 현다혜

탈시설운동을 위해 태어났을 것 같은 이 비범한 언니도 뜨겁게 젊었을 땐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었다는 말처럼 범상한 후배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정하가 계속 말했다.

“하여간 힘들 때마다 쓰리박께서 나타나 알코올로 나를 위로하셔서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거 아니냐… 나중에는 내가 후배들을 붙들고 술을 사주면서 이 운동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마악 설파하고 있더라… 내가 쓰리박이 된 거지.”

“그래서 언니가 붙잡은 사람은 누구예요?”

정하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야, 못 잡았으니까 내가 이렇게 사는 거 아니냐… 다 떠났어… 나는 너무 진지충이라, 애들이 재미없어하는 것 같아.”

정하의 속이 진심으로 쓰린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이 위로 무능력자 언니를 위로해 줘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꼈다. 역시 위로는 어렵다고 생각하며 나는 느닷없이 세대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언니가 위로를 못해서가 아니라… 선배가 술 사주면서 후배를 위로하고 운동하자고 붙잡는 시대가 이제 끝난 게 아닐까요?”

그러자 정하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밝은 얼굴로 핸드폰을 뒤적이더니 ‘멸망전’이라는 행사의 포스터를 보여주었다. 멸망전은 젊은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술 먹는 모임이었다. 포스터엔 연태고량주와 칭다오맥주가 행진을 하듯 일렬로 도열한 이미지 위에 다음 모임의 날짜와 장소, 슬로건이 적혀 있었다. 슬로건은 “오래오래 함께 투쟁하면서 살자”였다. 정하가 포스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런 건 우리 때 끝난 줄 알았더니 요즘 애들도 멸망 어쩌구 하면서 모이대? 근데 오래오래 함께 투쟁하면서 살자니… 너무 아름다운 말 아니냐? 이런 슬로건을 보고 내가 어떻게 술값을 지원하지 않을 수가 있겠냐…”

선배들 없이도 알아서 서로를 위로하고 조직하는 요즘 애들이 정하 눈엔 예쁘고 고마워 죽겠다. 그러다 다시 정하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졌다.

“근데 은전아… 내 인생 이야기 너무 힘들어 보이지 않니? 이런 이야기가 과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나는 내 삶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후배들이 떠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거든. 선배들의 삶이 기쁘고 행복해 보였으면 사람들이 안 떠나지 않았을까…?”

요즘 그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힘들어하는 젊은 동료들인 것 같았다. 자신이 그들에게 힘이 되지 못한다는 슬픔과 그들이 떠난 뒤의 상실감으로 쓰라린 마음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남들보다 곱절은 고단하게 살면서 자신이 힘든 것마저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가련한 언니를 보면서 나는 김정하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2009년 6월, 박옥순 활동가와 함께. 사진 전진호
2009년 6월, 박옥순 활동가와 함께. 사진 전진호

정하는 그저 성실하고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집요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다. 그는 꽉 막힌 세상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때면 자기 몸을 끼워 넣어서라도 기어이 돌파구를 만들고 새로운 국면을 열어냈다. 2008년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의 비리에 맞서 1년간 싸웠던 거주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보란 듯이 시설을 뛰쳐나와 탈시설 권리를 외치며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그들이 그토록 무모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김정하라는 믿음직한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대해 정하는 이렇게 말했다.

“시설 안의 비리와 싸우는 건 해볼 만큼 해봤으니까, 이제 한발 더 나아가야지.”

정하는 집도 절도 없는 중증장애인 8명과 함께 2개월간의 노숙투쟁을 감당해냈다. 시설비리 척결 운동은 그렇게 다음 단계인 탈시설 권리 운동으로 도약했다. 2018년 정하가 프리웰 이사장이 되었을 때 그는 시설폐지를 의결하며 이렇게 말했다.

“능력 있는 장애인들이 시나브로 탈시설하는 건 할만큼 했으니까 한발 더 나아가야지.”

반대 세력의 맹렬한 공격을 견뎌내면서 그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탈시설과 시설폐지가 가능함을 증명해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2001년, 학대가 자행되던 미신고시설 믿음의집에 쳐들어간 날에 대해서도 정하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문이 열리면 한 발을 문 안으로 딱 집어넣어야 돼. 내 정체를 알면 저들은 곧바로 문을 닫으려고 하니까. 그때부턴 오직 힘으로 버티면서 밀고 들어가야 되는 거야.”

지난 9월 5일, 장애인권리예산을 요구하는 지하철 시위에서 김정하 활동가와 사람들이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9월 5일, 장애인권리예산을 요구하는 지하철 시위에서 김정하 활동가와 사람들이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현다혜

20대엔 감히 외칠 수도 없었던 ‘탈시설’을 30대엔 권리로 만들어냈고, 30대엔 씨알도 안 먹히던 ‘시설 해체’를 40대에 기어이 실현하는 사람,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온몸의 무게를 싣고, 열렬한 지지와 맹렬한 공격을 동시에 받는 사람, ‘누구도 배제하지 마라’ 같은 원칙을 끝내 지켜내려 애쓰고, 콧줄을 낀 최중증장애인들 편에 서서 대형교회와 시설을 운영하는 복지권력자들에 맞서는 사람, 가장 앞에 나서고 가장 아래를 버티며 가장 끝까지 지키는 사람, 적들을 향해선 코뿔소처럼 용맹하게 돌진하지만 친구들에겐 코끼리처럼 순하고 든든한 사람. 내 눈엔 정하의 넓은 등을 타고 앉아있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보이는데 정하 눈에만 안 보인다. 김정하라는 존재 자체가 위로이고 자부심인 사람들, 김정하가 있어서 이 거친 정글을 헤쳐 나가는 게 덜 두렵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 중엔 쓰리박도 있다. “내가 김정하를 붙들었다구! 으하하하” 하며 그들은 자다가도 의기양양해질 것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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