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임소연의 영혼은 몇 개인가
임소연의 생애는 많은 사람들로 와글거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모든 관계엔 각양각색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등급만은 똑같이 최상위급이다. 정신적 지주가 된 공동체, 인생 팀, 인생 선배,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비장애인과 장애인, 1분도 허투루 쓰지 않았던 시절, 전심전력을 다한 사업, 전심전력을 다했다는 말로는 부족한 투쟁, 영혼을 갈아 넣어 개정한 법률, 나의 운동에 미션을 준 조직,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준 사람들, 축복 같았던 농성, 내 인생에 큰 획을 그은 사람,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해준 고양이….
그는 하나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되돌아보면 그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하며 아낌없는 찬사로 마무리했다. 그러고 나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면 마치 죽었다 깨어난 사람처럼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와! 이건 너무 신세계인 거야!”
모든 이야기의 절정에선 약간 쉰 목소리로 독백하듯 읊조렸다.
“어디 가서 그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을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니?”
“어떻게 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있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소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자의 만족스러움, 그 시간을 온전히 감당해낸 자의 자부심이 흐르는 얼굴이었다. 나는 이번 인터뷰 작업을 하는 동안 네 명의 활동가를 인터뷰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빼놓지 않고 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힘들었을 때 왜 떠나지 않았어요?”
그런 걸 묻기에 적절한 타이밍이 언제나 있었다. 소연과 세 번의 인터뷰를 하고 긴 이야기를 정리한 후에야 나는 소연에게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가장 힘들었을 때마저도 너무나 열렬했고 그런 소연이 나는 진심으로 신기하고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내 몸과 영혼의 에너지를 다 쏟아 부었던 일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소연에겐 어떻게 그런 일이 파도처럼 계속 밀려오는가. 그때마다 소연은 어떻게 저토록 기꺼이 파도 위에 올라타는가. 왜 떠나지 않았느냐고 묻는 대신 나는 이렇게 물었다.
“언니는 영혼이 대체 몇 개예요?”
저 언니의 영혼은 왜 갈아도 갈아도 또 갈 것이 생기는가. 열변을 토하고 있는 내 눈앞의 임소연은 몇 번째 인생을 사는 중일까. 나는 그런 게 궁금했다.
임소연은 2000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2005년 탈시설운동단체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을 창립했다. 이후 시설비리 및 인권침해에 대응하고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의 탈시설을 지원해왔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 ‘장애인생활시설 인권실태 조사’, 2008년 서울시 ‘시설장애인 탈시설 욕구조사’ 등을 기획·진행했으며 2011년 ‘광주인화학교성폭력사건해결과사회복지사업법개정을위한도가니대책위’에 들어가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이뤄냈다. 진보적 장애인운동과 탈시설운동의 힘이 지역의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2015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전국 100여 개의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들을 만나 운동의 방향을 제안하고 조직 운영을 지원하며 7년간 쉼 없이 달려왔다. 그는 2022년을 안식년으로 삼고 활동을 쉬는 중이다.
-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서울 길동에 있는 소연의 집 아담한 거실엔 그리 크지 않은 책장이 있다. 손이 가장 잘 닿는 칸엔 장애, 환경, 페미니즘, 동물권에 관한 책들이 꽂혀 있다. 책장 위엔 고양이 ‘자바’의 유골로 만든 반려석이 작은 그릇에 담겨 있다. 2019년 세상을 떠난 자바는 사는 내내 자유롭게 집 밖으로 외출하며 고양이의 생을 살았다. 창가 벽면엔 크고 작은 초록 식물들이 햇볕을 쬐고 있다. 식물들이 신선한 바람을 쐴 수 있도록 소연은 항상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켜둔다. 비가 오면 소연은 화분들을 집 밖으로 모두 데리고 나가 흠뻑 비를 맞게 한다. 식물들이 빗물의 영양을 흡수하며 식물의 일을 하는 걸 바라보면서 소연은 인간의 일을 한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이다.
소연의 손에 들려있는 책은 『백년 허리』다. 저자인 ‘척추의 신’ 정선근 박사가 운영하는 유튜브도 소연이 즐겨보는 채널이다. ‘병원 안 가고 요통 낫는 법’이나 ‘무릎에 좋은 뒤꿈치 들기 운동’ 같은 것을 보며 부지런히 따라 하는 것이다. 반백 년을 산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공부는 허리-어깨-무릎-발-무릎-발 같은 것이다. 바야흐로 소연의 ‘인생 선생님’이 한 명 더 추가되는 중이다. 올해 쉰넷의 소연은 스스로 몸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배워가는 중이다. 그건 장애를 가진 이들에 대한 다른 깊이의 존경심이 생긴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어도 배울 게 넘쳐서 소연은 나날이 기쁘게 겸손해지는 중이다. 책을 완독하면 정선근 씨에게 편지를 써야지, 하고 소연은 다짐한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장애인단체에서 일하는 임소연이라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걷기와 바른 자세, 신전운동과 스트레칭 방법을 열심히 익히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귀한 지식을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제 동료들은 장애가 있어서 선생님이 제안하는 자세나 운동, 걷기가 불가능합니다. 비장애인들은 유튜브만 봐도 할 수 있는 운동이 쏟아지는 시대에 정작 운동이 필요한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운동을 가르쳐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제 친구들을 위해 장애인도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개발해 책을 써주시거나 유튜브를 제작해주시면 어떨까요? 제 친구들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우리가 누구인지 정체를 밝히는 게 득일까 실일까 소연이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비가 그쳐 있다. 비를 흠뻑 맞은 식물들은 엄마 젖을 충분히 먹은 아기들처럼 포실포실해져 있다. 빗물을 잔뜩 머금고 무거워진 화분을 소연이 허리와 무릎을 아끼면서 집 안으로 낑낑대며 데리고 들어온다. 그에겐 챙겨야 할 존재들이 줄을 서 있다. 어제 하다 만 바느질을 시작한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쏟는 것도 좋아하지만 얼마 전부턴 재봉틀을 배워서 대량생산을 꾀하고 있다. 복귀하기 전에 100개의 마스크를 만들어 고생하는 동료들에게 선물할 계획이다. 마스크에 박을 라벨은 세 가지 버전으로 준비해두었다. ‘저항하라’, ‘시설 밖으로’, ‘디스어빌러티 프라이드(장애 자부심)’. 바느질을 하며 소연이 중얼거린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쉬는 중에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은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인터뷰는 세 차례 모두 그의 집에서 했고 마지막 인터뷰는 추석 연휴에 했다. 소연의 캘린더에 비어 있는 날이 그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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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핍이 없는 것이 결핍
아빠는 1937년생인데 서울대를 나오고 엄마는 1941년생인데 여수여고를 나왔어요. 그 연배에선 보기 드물게 ‘배운’ 분들이죠. 자식도 딸 둘 낳고 끝냈는데 그런 경우도 흔치 않았어요. 엄마는 꼼꼼하고 바르고 공부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불합리한 일 있으면 그냥 넘기지 않고 꼭 확인하고 따지는 스타일. 아빠는 선비 같은 사람이에요. 사업을 하셨는데 잘 안된 경우가 많았고 보증을 잘못 서서 어려움이 많았어요. 가난했지만 그 가난이 아이들한테 상처가 되지 않도록 튼튼한 바람막이가 돼줬던 부모였어요. 나는 공부하는 거 좋아했고 열렬한 천주교 신자였어요. 성당 가서 오빠들하고 책 읽은 거 자랑하면서 잘난 척하고 배틀하는 거 좋아했어요. 대체로 모범생으로, 정석대로 살았어요. 가족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주변 사람한테도 사랑을 듬뿍 받았죠. 대학에 간 이후엔 그게 오히려 콤플렉스였어요. 상처가 없다는 거. 결핍이 없다는 거.
1988년 숙명여대 전산학과에 들어갔어요.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으며)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가톨릭학생회 ‘글라라’에 들어갔는데… 웬걸, 다 데모꾼들이었어요. 동아리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담배 피고 있는 언니들이 나를 반겨줬죠. (웃음) 신입생들 겁먹을까 봐 미사도 몇 번 데리고 다니더니 얼마 후 본색을 드러내 본격적으로 세미나를 시켰어요. 유물론은 기본이고 마르크스, 별의별 철학서들을 다 읽어야 했어요. 나는 책만 주면 밑줄 긋고 앉아서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 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선배들이 대답 못하는 게 재미있어서 선배들 골탕 먹이려고 공부를 진짜 열심히 했어요.
세미나도 데모도 열심히 했는데 3학년으로 올라갈 즈음 나는 운동을 계속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했어요. 그때의 경찰폭력은 너무 무서웠거든요. 백골단(1980~1990년대 시위 진압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부대)이 저벅저벅 걸어오다가 퍽! 하면서 갑자기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오는 그 소리는 정말 소름이 끼쳐요. 하루는 집회하다가 경찰을 피해 버스를 탔는데 바깥에서 어떤 남학생이 내가 탄 버스를 따라오면서 “세워주세요! 세워주세요!” 했어요. 백골단한테 쫓기고 있었던 거예요. 다행히 기사님이 세워줘서 그 학생이 탔어요. 그런데 백골단이 버스를 향해 몽둥이를 던지면서 “세워! 세워!” 하니까 기사님이 어쩔 수 없이 또 세워준 거예요. 백골단이 버스 안으로 들어와서 그 학생을 어마어마하게 패다가 질질 끌고 내려가는 걸 눈앞에서 지켜보는데…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2학년이 되면 1학년 후배들에게 바람막이가 되어줘야 하는데 나도 너무 무서우니까 그 스트레스가 되게 심했어요. 그런 시대에 앞에 나서서 싸운다는 게 무섭더라고요. 선배들을 보면 공장에 위장취업하고 경찰에게 쫓겨 다니기도 하고 갑자기 사라진 선배도 있었어요. 누구누구 선배 어디에 끌려갔었다더라, 정신이 이상해졌다더라, 하는 소문도 들렸고요. 감성보다는 이성의 논리를 더 좋아했던 나는 세미나하고 토론하는 건 아주 좋아했지만 노동자,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갈 자신은 없었어요. 근본적으로 나의 결핍이 없기 때문에 이 운동을 지속할 힘이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3학년이 되면서 나는 못하겠어, 하고 도망을 갔어요.
그래도 후배들과 세미나를 하는 일처럼 제가 할 수 있는 걸 했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가톨릭학생회 글라라는 정신적 지주 같은 공동체예요. 내 전체 삶과 운동의 철학적 기반은 그때 다져졌어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가난한 게 그 사람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 체제가 부조리하고 불평등해서라는 것, 그러니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걸 알게 해줬어요. 신세계였죠. 특히 고마운 건 그들이 여성 집단이었다는 거예요. 여성주의적 관점을 가진 20대 초반의 어린 여성들이 서로 걱정해 주고 소통하려 애쓰고 남을 위해주고 챙겨주고 무엇이든 함께하려고 했던 그 문화가 제가 사람을 바라보고 관계 맺는 태도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죠. 그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의 든든자 후원자가 돼주고 있어요.
- 채워지지 않는 갈망
나는 데모도 열심히 했지만 전산학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전산학은 수학을 기반으로 프로그램을 짜고 코딩을 하는 건데 논리적이면서도 창조적인 학문이에요. 지금으로 치면 우리 집에서 천호역까지 최단 거리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길 찾기 프로그램’ 같은 걸 개발하는 거예요. 신학문이어서 젊은 교수들이 많았고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학문적 즐거움도 컸어요. 대학원에 진학해 1994년에 졸업했어요. 여성이 대학 나와서 취직하는 것이 어려운 시대였는데 전산학은 기능직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취직이 잘 되었어요. 기업들이 기존에 수작업으로 하던 걸 모두 전산화시키고 대량생산 시스템을 막 구축하기 시작할 때여서 고급 인력들이 많이 필요했죠.
공부를 좋아했지만 마음속엔 계속 운동의 길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있었어요. 젊음과 열정을 무언가 정의로운 것에 써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갈증, 혹은 갈망이 있었어요. 빡센 노동운동은 못해도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여기저기 찾고 기웃거렸어요. 어느 날 환경운동연합 시민환경연구소에서 6개월 계약직으로 자료를 전산화하는 사람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어요. 그렇게 처음으로 시민단체에 발을 들여놓게 됐죠.
환경 관련 자료를 분류해서 스캔하고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작업을 했는데 그때 알게 됐어요. 아, 우리는 핵폭탄으로 망하는 게 아니라 쓰레기로 망하겠구나! 자본주의 사회는 돈을 벌려면 계속 생산을 해야 하니까 더 쓸 수 있는 물건도 안 쓰고 버리도록 작동해요. 그렇게 버려진 물건들은 모두 쓰레기가 되는데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죠. 여성, 장애, 공장식 축산 문제처럼 폭력이 보이지 않도록 감춰지는 구조가 있었어요. 그렇게 환경 문제에 눈을 떴고 거기서 최재숙 언니를 만났어요. 언니는 나의 운동을 지탱하게 해준 정신적 지주 같은 사람이에요. 만날 틱틱거리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나의 고민들을 잘 들어주었어요. 언니는 에코생협에서 활동하던 2020년에 회의하다 쓰러져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때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6개월 뒤 재숙 언니가 정식으로 활동해보자고 제안했어요.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돈을 벌어야 해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취직을 하기로 결심하고 기아정보시스템 프로그램 개발팀에 들어가 3년 일했어요. 재밌었어요. 여기가 또 나의 인생 팀이에요!(웃음) 일반 회사의 상사는 권위 없으면 시체인데 우리 팀장은 보기 드물게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분이었고 여성에 대한 차별도 하지 않았어요. 회사 내 산악회도 들어서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면서 놀았어요. 그 시기 나의 관심은 여성으로서 능력을 인정받는 거였어요. 최선을 다해 일하고 여자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만만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팀 성과가 좋아서 회사에서 미국에서 열리는 콘퍼런스에 포상 휴가를 보내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 갈증이 문제였어요. 팀원들도 좋은 사람들이었고 성취감도 있었는데 보람을 느끼진 않았던 것 같아요.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잠재울 수가 없었어요. 고민 끝에 사표를 냈는데 사표가 세 번 반려됐어요. 동료들과 상사들이 그만두지 말고 여성으로서 능력을 발휘하고 성공해보라고 나를 계속 설득했어요. 그 시절 나는 발랄하고 발칙하고 에너지가 넘쳐서 거침없이 회사를 휘젓고 다녔어요. 나이 든 사람들이 보면 되바라졌다고 할 수도 있는 캐릭터인데 좋게 봐준 거예요. 멋진 동료들이었어요. 그들이 나의 20대 중후반을 탄탄하게 만들어줬죠.
환송회 하던 날 술을 많이 먹고 인사불성으로 집에 돌아왔어요. 다음 날 아침 쓰린 속을 부여잡고 일어나 옷을 정리하는데 주머니 속에 종이쪽지가 들어 있었어요. 펼쳐보니 ‘잠실 종합사회복지관 수화 교육’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아마 술집에서 오줌 누다가 화장실 벽에 붙어있던 걸 뗀 것 같아요. 수화라는 단어도 종합사회복지관이란 단어도 처음 봤어요. 오후에 복지관에 전화를 걸어서 “수화가 뭐예요?”하고 물었더니 청각장애인들이 손으로 하는 언어래요. 재밌겠다 싶어서 수화수업 들으러 복지관에 쫄래쫄래 갔어요. 그 쪽지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준 역사적인 쪽지였죠.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