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임소연 활동가. 사진 현다혜 
임소연 활동가. 사진 현다혜 

- 사람이라는 신세계

복지관은 수녀회가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수녀님이 친근하게 다가와 이것저것 물었어요. “근데 직장은 다녀요? 무슨 일해요?” 직장 그만두고 잠시 쉬고 있다니까 “대학은 나왔어요?” 하고 물어보셔서 전산학과 나왔다고 했어요. 수녀님이 어느 순간부터 말을 놓으면서 “어머, 잘됐다! 그럼 컴퓨터 교육 자원봉사 좀 하면 안 돼?” 했어요. 그 말이 마법처럼 들렸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어렸을 때부터 나는 기도할 때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살게 해주세요, 아픈 사람이 없게 해주세요, 가난한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하면서 마무리를 했어요. 나중에야 그런 마음이 측은지심이라는 걸 알았어요.

복지관을 오가면서 수녀님한테 물었어요. “근데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뭘 공부해야 돼요?” 그때 사회복지학이라는 학문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막연하게 좋은 일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만 있었는데 무얼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계속 갈증만 느끼고 있었던 나에게 신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었어요. 공부를 새로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사회복지학과를 야간으로 편입했어요. 1998년이었고 나는 서른이었죠. 사회복지학은 세상에나… 너무 재미있었어요. 무엇보다 나를 흔들었던 것은 ‘사람이 우선이다’라는 가치였어요. 자본주의의 폐단을 보완하기 위해서 발달한 학문이니까 사회구조도 공부하지만 그래도 핵심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제도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공부하는 거예요. 기존의 공부가 논리를 배우는 거였다면 사람을 중심에 두는 사회복지학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학문이었어요.

나는 뼛속까지 이과형 인간이라 처음엔 힘들었어요. 이과 쪽 책들은 아무리 설명이 길어도 마지막엔 수학 공식처럼 박스 안에 간단하고 명료하게 정리해주는데 문과 쪽의 어떤 책은 몇 페이지를 읽어도 도통 이해가 안 됐어요. 대학 때 읽었던 역사책처럼 재밌지도 않고요. 완전히 다른 세계더라고요. 한 번은 시험을 보는데 뭘 쓰라는 건지 질문 자체를 모르겠더라고요.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썼더니 선생님이 왜 이렇게 썼냐고 물었어요. 솔직하게 말을 했어요. “저는 이과에서 와서 문과 쪽 공부가 너무 어렵고 적응이 잘 안 됩니다. 모르는데 아는 척하면서 쓰지를 못하겠어요.”

선생님이 네 마음 이해한다면서 그렇지만 네가 뭘 모르는지를 잘 살펴보라고 했어요. 공부가 부족해서 못 쓰는 걸 수도 있고 아는 데 자신이 없어서 못 쓰는 걸 수도 있다고요. 그러면서 누군가 당신을 찾아와서 뭔가에 대해 묻는데 밑도 끝도 없이 “몰라요” 하고 일갈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했어요. 내 태도는 어떤 사람이 나한테 상담하러 왔는데 “당신한테 줄 서비스는 없습니다. 자, 다음 분!”하는 식이었던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죠.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제가 한번 볼게요” 하고선 최선을 다해 상대방과 소통하고 지원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주려고 해야 한다는 거예요. 문과적인 세계, 혹은 사회복지의 세계를 접하면서 그런 걸 많이 깨우쳤어요.

열쇠고리에 세계인권선언문 1조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가 영어로 쓰여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 정부의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이행 심의가 있던 지난 8월, 이곳에 참관하러 갔던 활동가가 선물해 준 열쇠고리다. 사진 현다혜
열쇠고리에 세계인권선언문 1조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가 영어로 쓰여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 정부의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이행 심의가 있던 지난 8월, 이곳에 참관하러 갔던 활동가가 선물해 준 열쇠고리다. 사진 현다혜

그때 나의 심금을 울린 책이 있었어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아래 연구소)에서 나온 『함께걸음』이라는 월간지예요. 지하철 가판대에서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런 신세계가! 시설 문제, 인권침해, 장애인 정책 등이 총망라되어 있었는데 장애인에게 집중한 전문 잡지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거기에 나온 사람들의 삶은 너무 비참했어요. 아, 사람들이 이렇게 두들겨 맞으면서 학대를 받으며 살고 있다니… 가슴이 아팠죠. 한 달에 한 번 책이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날짜가 되면 가판대에 가서 “『함께걸음』 아직 안 나왔어요? 사장님, 내 꺼 꼭 남겨주세요!” 하고 신신당부했어요.

어느 날 수업을 듣는데 강사가 자기를 연구소 소장이라고 소개해서 눈이 번쩍 뜨였어요. 얼마 후 그 선생님과의 인연을 이용해 용기를 내 연구소에 찾아갔어요. 자료실에 들어갔더니 우리나라 장애인 정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어요. 와… 입이 떡 벌어졌어요. 자료의 보고인 거예요! 졸업 논문을 여기서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연구소를 들락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때의 나를 누군가는 이렇게 기억하더라고요. 어느 날 갑자기 뽀글뽀글 파마를 하고 새빨간 립스틱 바른 사람이 나타나 쨍쨍한 목소리로 왔다 갔다 했다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힘이 나를 장애 쪽으로 계속 이끌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는 동정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측은지심이라 부르는 그 마음을 잘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애틋하게 생각하고 돕고 싶은 그런 마음이 내내 있었어요. 재숙 언니가 환경운동 하자고 꼬드겼는데 2000년 1월부터 연구소에 출근하기 시작했어요. 장애인운동에 첫발을 내디뎠죠. 남들보다 늦은 서른둘이었어요.

20대의 나를 돌아보면 주장이 강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깍쟁이였어요. 여성의 삶이 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나한테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나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20대 후반으로 가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접점이 넓어지다가 장애인운동을 만났죠. 이 운동을 하는 비장애인들이 보통 학생운동을 하다 연결되거나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거나 본인이 겪은 어떤 어려움 때문에 문제의식을 느껴 시작했다면 나는 그렇지 않았어요. 결핍이 없는 대신 나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으로 충만했어요. 당시엔 결핍이 없다는 게 콤플렉스였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내가 오래도록 운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것 같아요.

액자 속에서 임소연 활동가가 환하게 웃고 있다. 2018년 4월, 첫 번째 ‘대항로 파티’가 열렸던 날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비롯한 진보적 장애인단체는 대학로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보증금 마련을 위해 대항로 파티를 열었다. 이동권 투쟁, 탈시설 투쟁까지 장애인운동의 물꼬를 튼 대학로를 장애인권운동이 나아갈 큰(大) ‘항로’이자 불의에 대항하는 ‘대항’의 길(路)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이들은 이곳을 ‘대항로’라고 부른다. 사진 현다혜
액자 속에서 임소연 활동가가 환하게 웃고 있다. 2018년 4월, 첫 번째 ‘대항로 파티’가 열렸던 날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비롯한 진보적 장애인단체는 대학로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보증금 마련을 위해 대항로 파티를 열었다. 이동권 투쟁, 탈시설 투쟁까지 장애인운동의 물꼬를 튼 대학로를 장애인권운동이 나아갈 큰(大) ‘항로’이자 불의에 대항하는 ‘대항’의 길(路)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이들은 이곳을 ‘대항로’라고 부른다. 사진 현다혜

- 1 더하기 1은 무한대

연구소에서 처음 맡았던 건 회원 사업이었어요. 사람을 만나는 일로 이 운동을 시작했다는 게 굉장히 좋은 출발이었다고 생각해요. 운동 용어로 바꾸면 ‘조직 사업’이라는 것인데 우리의 운동을 사람들에게 잘 알려서 우리 편을 만들어내는 일이었어요. 그때 박옥순을 만났어요. 나에게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에요. 나는 계획적인 사람인데 박옥순은 좀 날아다니고 꿈꾸듯이 말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1 더하기 1이 2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면 박옥순은 10도 되고 1000도 되고 마이너스도 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충격이었어요. 가령 어떤 사안에 대해 토론해서 집행하기로 했는데 진행이 잘 안 됐어요. 내 생각엔 우리가 잘못 판단했거나 누군가 잘못한 건데 옥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해석하면 좋을 것 같고 저렇게 생각하면 더 좋을 것 같다면서 같은 현상에 대해 때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았어요.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처음엔 적응이 안 되었어요.

회원 100명이 모이는 행사가 있다면 나는 일단 100명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요. 식사를 준비할 텐데 밥을 먹고 갈 거냐, 뭘 좋아하시냐, 언제 돌아가실 거냐, 뭘 타고 올 거냐, 하나하나 묻고는 계획을 완벽하게 세워요. 하지만 돌발적인 상황들이 생기겠죠. 10시 행사인데 사람들이 11시나 12시에 온다거나, 100명이 온다고 했는데 130명이 온다거나, 50명이 식사를 한다고 했는데 80명이 식사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려서 30인분의 식사가 모자란다거나. 나는 틀에 박힌 사람이라 계획대로 착착착착 진행되지 않으면 아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경직된 사람이었다면 옥순은 그런 상황에서도 여유와 넉넉함을 잃지 않고 굉장히 순발력 있게 대응하더라고요.

2015년 12월 29일, 연말을 맞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소속 센터들에 활동가들이 직접 손글씨를 써서 연하장을 보냈다. 임소연 활동가가 인천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보낸 연하장. 사진 제공 임소연
2015년 12월 29일, 연말을 맞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소속 센터들에 활동가들이 직접 손글씨를 써서 연하장을 보냈다. 임소연 활동가가 인천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보낸 연하장. 사진 제공 임소연

운동을 하려면 사람이 많이 모여야 하고 사람들이 모이면 오만가지 일이 다 일어나요. 거기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운동의 저력이라는 걸 깨달아가는 시간이었어요. 그러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하다는 걸 인식해야 하는데 옥순이 그걸 아주 강조했죠. 회원사업의 기본은 사람들한테 주기적으로 연락해서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행사가 있으면 정확하게 안내하고 어떤 편의가 필요한지 묻고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잘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1 더하기 1의 답을 열어두는 거예요. 나 혼자 살 때는 크게 적용되지 않는 규칙인데 다른 사람과 함께 살겠다고 할 땐 너무나 중요한 가치예요. 크게도 생각해 보고 작게도 생각해보고 멀리 떨어져서도 생각해보고 가까이 딱 붙어서도 생각해보는 거죠.

책으로 배웠을 땐 막연했던 사회복지의 지식들을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배우고 깨우치는 과정이 신나고 재밌었어요. 배움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는 태도, 삶에 대한 열린 사고를 단련시킬 수 있었던 실천적 전환의 시기였어요. 어떤 사람을 만나든 적어도 그를 서비스 대상으로만 보지 않아야 한다는 깨우침, 어떤 제도적 불합리함 앞에서 딱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그 현실을 뛰어넘어보려는 태도 같은 걸 배웠죠. 그런 상상력과 해석력, 확장성이 경직되어 있던 내 삶 또한 풍족하게 만들어줬어요. 회원 사업 외에도 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활동, 당사자들과 함께하는 문화체험 활동 같은 것도 했는데 그 모든 것이 결국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최적의 연습이었다고 생각해요.

장애인운동을 비롯해 임소연 활동가가 모으고 있는 여러 배지들. 사진 현다혜
장애인운동을 비롯해 임소연 활동가가 모으고 있는 여러 배지들. 사진 현다혜

- 우리 한 시간만이라도 더 같이 있자

그때 만났던 사람 중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어요. 근육장애인 이현준이에요. 현준 형은 연구소에서 상근활동을 했는데 점점 장애가 진행됐어요. 나중엔 호흡기 근육까지 마비되고 침도 뱉을 수 없어서 썩션을 하고 저녁마다 호흡기를 끼고 지냈어요. 글을 잘 썼는데 손가락에 힘이 점점 빠져서 아주 아주 느린 속도로 컴퓨터 자판을 치던 모습이 생생해요. 형이 활동하려면 이동을 지원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기업의 후원을 받아 이동 도우미를 고용했어요. 현준 형은 도우미가 올 때까지 사무실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을 때가 많았어요. 내가 먼저 퇴근하면서 “현준이 형, 안녕!” 인사하곤 했는데 나중에 형이 그러더라고요. “나는 너희들이 인사할 때 뒤를 돌아볼 수가 없어. 눈을 마주치고 인사할 수 없어서 속상해.” 형은 목을 조금 돌리는 것도 어려웠던 거예요. 그 얘길 들으니까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어요.

그 시기 연구소에서 논쟁이 됐던 사안이 있었어요. 조직에서 돈을 대서 현준에게 개인 활동지원사를 붙여주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어요. 현준 형은 24시간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돈이 아주 많이 들고 또 누군 해주고 누군 안 해주느냐 하는 형평성 문제도 있어서 논의가 진척되지 못했죠. 지금처럼 활동지원서비스가 제도화될 거라곤 상상도 못하던 시대니까요. 지금이라면 문제 될 게 없고 조직이 돈을 대든 제도적으로 싸우든 방법을 모색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땐 그러지 못했다는 게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에겐 한으로 남아있어요. 우리들의 멍이에요.

연구소에서 일한 지 5년쯤 됐을 때 여기서 계속 장애인운동을 할지 아니면 환경운동을 하러 갈지 고민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참 어렸었는데, 장애인운동을 하는데 내가 장애인이 아닌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운동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을 내가 장애인이 아닌 것에서 핑계를 찾으려 했던 거죠. 나의 본질이 장애인이 아닌데 내가 과연 이 운동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대학 시절 노동운동으로부터 도망쳤을 때의 두려움 같은 게 다시 고개를 든 거죠. 흔들리고 갈등하는 나를 붙잡아줄 무언가가 없으니까, 마음속으로 차라리 내가 장애인이었으면, 팔이 하나 부러졌으면, 다리 하나가 없었으면,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환경운동은 당사자 주체라는 개념이 없는데 장애인운동은 당사자의 주체성이 굉장히 중요해요. 나는 비장애인인데 주체성을 갖고 이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과 두려움이 엄습해왔던 때였어요.

지난 9월 2일, 임소연 활동가가 집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9월 2일, 임소연 활동가가 집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그러다 2005년도에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어요. 1월에 연구소에 불이 났어요. 그날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퇴근했는데 집으로 가던 도중에 연락을 받았어요. 사무실 나온 뒤 불과 30분이 흘렀을 뿐인데 다 타버리고 아무것도 안 남았더라고요. 경찰조사를 받으러 가는데 온몸이 덜덜덜덜 떨렸어요. 불이 시작된 곳이 우리 팀이라고 해서 더 충격이 컸어요. 누전으로 추정할 뿐 정확한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어요. 재해라는 게 순식간에 모든 걸 무너뜨릴 수 있구나… 사람이 있었다면 죽을 수도 있었겠다… 그게 트라우마가 됐고 불면증이 생겼어요. 그리고 3월 15일 현준 형이 죽었어요. 호흡기 근육이 점점 마비되다가 결국 호흡이 멈춘 거예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우리한테 너무나 소중했던 당사자 활동가의 첫 번째 죽음이었죠. 두 사건의 영향이 너무 컸어요. 너무 힘들어서 여길 나가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4월에 퇴사했어요.

그때 나는 30대 중반이었는데 20대 시절보다 더 힘든 혼란을 겪고 있었어요. 다른 활동가들이 너도나도 연구소를 그만두겠다고 하던 상황이었는데 옥순이 모이자고 했어요. 김정하, 여준민, 박숙경 등이 모여서 그 유명한 주점결의를 했죠. 너 진짜 나갈 거니? 나가서 뭐 할 건데? 몰라, 일단 나가야지, 이런 얘기하면서 깔깔거리다가 자연스럽게 어느 시설에 갔더니 너무 끔찍하더라, 하면서 깔때기처럼 시설문제로 이야기가 흘렀어요. 그때 우리가 내린 결론은 지역사회에선 당사자들이 주체적으로 운동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시설 안에 있는 당사자는 그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외부에 있는 누군가가 시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이건 한 번 해볼 만하지 않아? 우리가 모이면 재밌게 잘할 수 있지 않겠니?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이었어요.

“딴 데 가지 말고 우리 장애인운동 계속하자.”

“같이 탈시설운동 해보자!”

“우리 한 시간만이라도 더 같이 있자. 한 달이라도 더, 1년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있을 때 더 같이 있자. 그럴 거지? 그럴 거지?”

그렇게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이 탄생했죠.

2015년 10월, 발바닥 활동가들과 함께. 왼쪽에서부터 여준민, 김정하, 박옥순, 임소연. 사진 제공 임소연
2015년 10월, 발바닥 활동가들과 함께. 왼쪽에서부터 여준민, 김정하, 박옥순, 임소연. 사진 제공 임소연

- 전제를 부수는 질문들

그해 발바닥행동의 첫 사업으로 김정하와 함께 미신고 장애인시설 조사사업을 했어요. 2002년부터 미신고시설에서 자꾸 문제가 터지니까 정부는 시설에다 수억씩 보조금을 주면서 시설 양성화 정책을 펼쳤어요. 그 정책에 반대했던 우리가 직접 시설에 찾아가서 조사를 하겠다고 한 거죠. 단체는 만들었지만 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베트남어를 배우던 ‘나와우리’라는 단체의 작은 방 한 칸을 빌려서 일했어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5천만 원을 받아 진행한 이 조사는 발바닥행동에도, 한국사회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돼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국가기관에서 기획한 첫 번째 시설조사였다는 거예요. 둘째, 인권활동가들이 처음으로 시설 안으로 들어가 장애인을 만났다는 거예요. 그동안은 인권침해가 제보된 문제시설에만 들어갔던 것이죠. 셋째, 조사원들을 광범위하게 조직했어요. 장애당사자, 활동가,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 변호사, 대학생 등 사돈에 팔촌까지 총망라되었어요. 그들을 통해 탈시설운동의 진지를 구축했죠. 넷째, 시설 측에서 거주인 중 말을 잘할 대표선수를 내세울 수 없도록 거주인 전수 조사를 했어요. 시설 측에서 기겁을 했죠. 우리는 의사소통이 어려운 발달장애인도 모두 만났어요. 다섯째, 인권을 침해당한 개인을 구제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시설이라는 구조를 드러내고 그 자체를 문제 삼는 접근을 했다는 거예요. 이 조사를 통해 우리는 시설 안에 ‘사람’이 있다는 확신, 어떤 사람도 거기서 살아선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지난 9월 2일, 임소연 활동가가 집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9월 2일, 임소연 활동가가 집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새벽에 집을 나와 새벽까지 일을 했어요. (주먹을 불끈 쥐며) 정말, 진짜, 전심전력을 다했어요. 조사 설문지를 만들 때 아주 중요한 고민이 있었어요. 군대, 감옥, 학교, 그리고 장애인시설이 모두 구조가 비슷한데, 바로 소수가 다수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단체생활이라는 거예요.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까지 씻고 7시에 밥을 먹고 8시까지 작업장에 가고 11시에는 성경책을 읽고 11시 반부터 점심을 먹고 4시 반에 퇴근해서 저녁을 먹는 생활, 외출했다 4시 반을 어겨서 들어오면 밥을 못 먹는 그런 생활이죠. 우리의 머릿속엔 ‘단체생활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단단하게 깔려있어요. 그걸 인정할 거냐 말 거냐, 오래 논쟁했죠. 우리는 결국 그 전제에 도전하기로 했어요. 감히 아무도 묻지 못했던 질문을 하기로 한 거죠.

“당신이 원할 때 외출하실 수 있습니까?”

“당신이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습니까?”

“당신이 파마하고 싶을 때 파마할 수 있습니까?”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생각을 깨는 것이 이 조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어요. 아주 잘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물으면 대부분이 “아니오, 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예,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어요. 외출할 수 있다고,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다고 답한 거죠. 우리는 더 물었어요. “그렇다면 언제 외출해 보셨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작년 크리스마스 때 단체로 나갔어요”라고 대답했어요. 그걸 ‘외출할 수 있다’로 답하는 거죠. 조사와 통계에서 누락되는 진실들이죠. 그리고 ‘예’, ‘아니오’ 보다 더 많았던 답은 이런 것이었어요.

“(단체생활인데) 그래도 되나요?”

“제가 먹고 싶은 걸 요구해서 먹을 수 있나요?”

“내가 파마를 할 수 있다고요?”

“장애인인 내가… 그럴 수 있다고요?”

그리고 아주 중요한 질문이 더 있었어요. 바로 이것이었죠.

“당신이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인 것을 알고 계십니까?”

시설 거주인들은 운영자가 선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우산을 씌워주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실이 아니죠.

“당신은 당신의 돈을 내고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시설 측에서 교묘히 알려주지 않는 그 중요한 사실, 그걸 아는 순간 판도는 바뀌어요.

임소연 활동가가 자신이 인상 깊게 읽은 책 『생존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테렌스 데 프레 지음, 차미례 옮김, 서해문집)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현다혜
임소연 활동가가 자신이 인상 깊게 읽은 책 『생존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테렌스 데 프레 지음, 차미례 옮김, 서해문집)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현다혜

놀라웠던 점은 거주인분들이 너무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누군가 찾아와서 자기 이야길 들어주는 게 처음이니까 그런 만남에 얼마나 목말랐던지, 가족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2시간이 훌쩍 넘어갔어요. 내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남성분에게 물었어요.

“시설 직원들이 어떻게 부르나요?”

호칭에 관한 질문이었어요. 우리는 “반말을 한다” 정도를 예상했죠.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대답했어요.

“모르겠어요. 시설에서 지냈던 20년 동안 한 번도 이름을 불려본 적이 없어요.”

나는 할 말을 잃었어요. 너무너무 가슴이 미어지더라고요(눈시울 붉어짐). 어머, 왜 눈물이 나지… 정말 기가 막히는 거예요. 사람의 존재라는 게 도대체 뭘까… 이름을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다는 그 삶은 도대체 뭘까… 그가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 너무 상상이 되잖아요.

어느 날은 누워있는 분에게 “뭐가 제일 힘들고 어려우세요?”하고 물었어요. 인권침해 당한 일이 있는지 묻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나한테만 주스를 안 줘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서 다시 물었어요.

“뭘 안 준다고요?”

그랬더니 그분이 서글픈 얼굴로 말씀하시더라고요.

“간식이 나올 때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있는 사람들한테는 빵도 주고 주스도 주는데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줘요. 먹고 싶어 죽겠는데 말도 못하겠고요.”

물론 인권침해, 폭력이나 학대에 관한 이야기도 많았어요. 하지만 우리를 더 압도했던 건 바로 이런 이야기들이었어요.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삶,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느낌이 우리를 강타했어요.

임소연 활동가가 과거 사용했던 노트. 오래된 노트는 누렇게 색이 바라고 얼룩져 있다. 공책에는 “임소연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이라는 글자와 함께 개인 휴대폰, 사무실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잃어버리면 꼭 찾아주세요. 저에게 매우 중요한 공책이랍니다”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사진 현다혜
임소연 활동가가 과거 사용했던 노트. 오래된 노트는 누렇게 색이 바라고 얼룩져 있다. 공책에는 “임소연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이라는 글자와 함께 개인 휴대폰, 사무실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잃어버리면 꼭 찾아주세요. 저에게 매우 중요한 공책이랍니다”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사진 현다혜

조사를 끝내고 서울의 내 일상으로 돌아오면 이곳은 너무 신나고 밝고 생기가 넘쳤어요. 하지만 낮에 만난 어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 색깔도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고 있었어요. 모두가 추리닝을 입고 모두가 빡빡머리인 그곳, 그 음침한 분위기, 그 냄새, 사람들의 무기력한 얼굴들이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돌아와서도 내내 시달렸어요.

왜 어떤 사람들은 저곳에 사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지지? 우린 왜 그런 걸 좋은 일이라고 칭송하지? 시설에 자원봉사 다녀온 것을 왜 그렇게 뿌듯해하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무기력에 빠졌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였죠. 탈시설운동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고 모두가 시설에서 나와야 한다는 방향에 강한 확신을 얻었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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