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10월 19일, 서울시립승화원 추모의집 송국현 봉안당 앞에 임소연 활동가가 서 있다. 사진 현다혜
10월 19일, 서울시립승화원 추모의집 송국현 봉안당 앞에 임소연 활동가가 서 있다. 사진 현다혜

- 한 문장의 의미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투쟁 중 하나는 2014년 송국현의 장례투쟁이었어요. 그때 구호가 “장애등급제가 송국현을 죽였다”였는데, 우리 집 현관엔 아직도 그때 입었던 몸피씨가 걸려 있어요. 나는 장애인운동사를 우리의 언어로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보건복지부에서 매년 발간하는 장애인 활동지원사업 안내 책자에 보면 이 서비스가 처음엔 1급 장애인만 신청할 수 있었다가 2013년 2급까지, 2015년 3급까지 확대되었다고 딱 한 줄로 적혀 있어요. 건조하게 적힌 그 한 줄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2012년 우리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면서 광화문역에서 농성을 시작했어요. 그해 10월 장애당사자 활동가였던 김주영이 화재로 사망했어요. 우리는 활동지원서비스 24시간 보장을 요구하면서 싸웠고 1급만 받을 수 있었던 서비스가 2급까지 확대됐죠. 그리고 2014년 국현 형이 돌아가셨어요.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어마어마하게 싸웠어요. 그리고 3급까지 확대됐죠. 이런 제도적 변화는 복지부가 알아서 해준 것이 아니에요. 장애인들의 죽음과 우리의 투쟁으로 만들어 낸 것인데 그게 무미건조한 짧은 문장으로 적혀있는 걸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임소연 활동가의 집 현관문에는 송국현 장례투쟁 당시 입었던 몸피씨가 걸려 있다. 근조 리본과 함께 “장애등급제가 송국현을 죽였다”는 문구가 있다. 사진 현다혜
임소연 활동가의 집 현관문에는 송국현 장례투쟁 당시 입었던 몸피씨가 걸려 있다. 근조 리본과 함께 “장애등급제가 송국현을 죽였다”는 문구가 있다. 사진 현다혜

국현 형은 2013년에 꽃동네에서 탈시설하셨어요. 그땐 2급까지 활동지원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던 때였어요. 국현 형은 언어장애 3급, 지체장애 5급이었어요. 서비스 신청 자격이 안 됐지만 재심사를 받으면 충분히 2급으로 등급이 조정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조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서비스를 신청조차 못하게 됐어요.

나는 평소에 국현 형과 전화도 많이 하고 만나서 놀기도 했어요. 형과 팀을 이뤄서 자립생활교육 강사도 하고 노들야학에 다녔던 형이 등하교를 할 때 이동지원을 맡기도 했어요. 형을 보면서 탈시설한 장애인에게 안전한 지원체계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언뜻 보면 장애가 경증인 듯 보이지만 곁에서 살아보면 총체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었어요. 손으로 뭔가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밥을 먹을 수 없었고 아주 느리게 걸었기 때문에 이동하기도 어려웠어요. 하루는 국현 형이 자기만 너무 장애인 같다면서 슬퍼했어요. 시설에 살 땐 다 장애인이니까 밥을 흘리면서 먹어도 그만이었는데 나왔더니 온통 비장애인이고 다 걸어 다니고 다 말을 잘하고 다 똑똑한 거예요. 불안과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과 약도 챙겨 먹어야 했어요. 그런 사람이 비장애인 사회에 갑자기 뚝 떨어졌으니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고 두려웠겠어요. 많은 활동가들이 국현 형 곁에 붙어서 이질감을 줄이고 소속감을 갖도록 애써주었어요.

송국현의 유품. 윗줄에는 송국현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 임소연 활동가가 직접 종이에 적어준 연락처가 있다. 아래에는 송국현이 알아보기 쉽게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만든 지하철 노선도(왕십리 집에서 노들야학까지)와 사람들의 생일이 적힌 종이가 있다.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탈시설자립생활교육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우리는 탈시설 공동체’라며 서로를 챙겨주기 위해 생일을 주고받았다. 종이에는 이름과 나이, 생일이 적혀 있다. 사진 강혜민
송국현의 유품. 윗줄에는 송국현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 임소연 활동가가 직접 종이에 적어준 연락처가 있다. 아래에는 송국현이 알아보기 쉽게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만든 지하철 노선도(왕십리 집에서 노들야학까지)와 사람들의 생일이 적힌 종이가 있다.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탈시설자립생활교육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우리는 탈시설 공동체’라며 서로를 챙겨주기 위해 생일을 주고받았다. 종이에는 이름과 나이, 생일이 적혀 있다. 사진 강혜민

생활이 안정되려면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아야 하는데 장애등급제에 가로막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는 장애등급센터에 가서 심사를 다시 해달라고 요구했어요. 국현 형은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운영하는 체험홈에서 지내셨어요. 활동가들이 돌아가면서 지원하다가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 성동센터에서 매월 400~500만 원을 들여서 활동지원사를 연결해 근근이 버티고 있었어요. 2014년 4월 11일엔 장애등급제의 문제를 알리고 송국현에게 활동지원서비스 긴급지원이 필요하다는 기자회견도 했어요.

4월 12일에는 국현 형과 함께 탈시설을 준비하는 50대~60대 발달장애 어르신 분들을 만났어요. 국현이 막내여서 다들 너무 예뻐하셨어요. 그날 국현이 집에 가기 싫다면서 형님들 집에 가서 자고 싶다고 했어요. 혼자 자는 걸 많이 두려워하셨어요. ‘오늘 말고 다음에’ 가는 걸로 마무리됐어요. 형이 나한테도 “집에 같이 가자, 우리 집에서 자고 가” 그랬는데 “형,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다다음 주에 만날 때 그때 갈게” 하면서 헤어졌어요. 다음날이 일요일이었는데 아침부터 전화가 왔어요. 주말 아침의 전화는 불길해요. 아니나 다를까 형이 살던 집에 불이 났다고 했어요.

병원으로 달려가면서 너무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뭔가 허를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죠.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민감하지 않았나? 정말 죽을 것 같이 안 싸워서 그런 건가? 굉장히 괴로웠어요. 내가 어제 국현의 집에 가서 잤으면 어땠을까. 국현이 어제 만났던 그 형님들 집에 가서 잤으면 이런 일이 안 일어났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국현은 전신에 화상을 입고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어요. 우리는 돌아가면서 중환자실 앞을 지켰어요. 17일 새벽 의사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우리에게 결정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매번 면회할 때마다 “형, 우리랑 계속 같이 살 거죠? 기운 차려야 해요. 살고 싶은 거 맞지?” 하고 물었고 형이 계속 응, 응, 그랬는데… 심폐소생술을 해도 살진 못한다고 했어요.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 그 순간이 참… 힘들었어요. 호흡기를 떼기로 하고 그렇게 형을 보내드렸어요.

송국현 사망 후, 장애계는 서울시청 앞에 분향소를 차렸다. 송국현이 사망한 날은 세월호 참사 다음 날인 2014년 4월 17일이다. 사진 비마이너DB
송국현 사망 후, 장애계는 서울시청 앞에 분향소를 차렸다. 송국현이 사망한 날은 세월호 참사 다음 날인 2014년 4월 17일이다. 사진 비마이너DB

- 나의 소중한 사람 송국현

형을 이대로 보내줄 수는 없었어요. 일단 시신을 모시고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경찰이 우리를 가로막았어요. 우리가 이 죽음을 갖고 대대적인 투쟁을 벌일 게 뻔하니까 시신을 데려갈 권한이 우리에게 없다면서 꽃동네에 연락을 해봐야 한다는 둥 시비를 걸었어요.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으로 시신을 모셔 와서 이제 무엇부터 해야 하나 논의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경찰로부터 국현의 가족을 찾았다고 연락이 왔어요. 가족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심지어 가까이 살고 있었더라고요. 시설에서 수급자를 만들려고 행정적으로 부양가족이 없게 처리한 것을 경찰이 찾은 거죠. 국현의 가족에게 경찰이 “이 사람들이 송국현의 시신을 끌고 다닐 거다, 빨리 화장하시고 장례를 치르시라”고 했대요.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 복도 끝에서 국현의 가족을 만나 여섯 시간 넘게 설득했어요. 경찰들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힘든 일 많았어도 국현 형이 사람들과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 모른다고, 억울하게 죽은 거라고, 활동지원서비스만 제대로 받았어도 이렇게 죽지 않았을 거라고, 우리는 이 죽음을 슬퍼하고 알릴 거라고 말씀드렸어요. 장례가 얼마나 길어지던 그 비용은 우리가 책임질 것이고, 마지막에 형을 어떻게 보내드릴지에 대해서도 가족분들과 상의하고 함께 결정하자고 말씀드렸어요. 울기도 하고 무릎 꿇기도 하고 큰소리를 치기도 하면서 간곡하게 요청했어요. 가족분들이 결국 장례 권한을 위임하셨어요. 우리가 이 죽음을 이용해 뭔가 이득을 취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믿어주셨던 것 같아요.

한 활동가가 도로 위에서 “장애등급제가 송국현을 죽였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사과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한 활동가가 도로 위에서 “장애등급제가 송국현을 죽였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사과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4월 17일 형이 세상을 떠난 그날부터 투쟁이 시작됐어요. 한편에선 이 죽음을 알리기 위해 장례식장에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오도록 조직하고 한편에선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집 앞에 찾아가 사과하라고 매일 집회를 했어요. 내가 총책을 맡았어요. 정말 열심히 했어요. ‘누가 죽어야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과 ‘죽지 않았어도 우리 진짜 열심히 했는데’ 하는 생각 사이에서 괴로워했어요. 사람들이 투쟁을 계속하면서도 돌파구가 안 보이니까 저한테 물었어요. 이 투쟁을 계속하는 게 맞을까? 이렇게 한다고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 밤마다 장례식장에서 성동센터 소장이었던 진영이를 껴안고 울었어요. 성과고 나발이고 아직은 국현 형을 보내줄 수가 없다고, 둘 다 잠을 못 자서 밤새 국현 형 얘기하면서 울다가 웃다가 했어요.

사망 26일 만인 2014년 5월 12일, 서울시청에서 장례식을 했다. 장례식 전에 박경석 대표와 임소연 활동가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사망 26일 만인 2014년 5월 12일, 서울시청에서 장례식을 했다. 장례식 전에 박경석 대표와 임소연 활동가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내가 에너지를 완전히 쏟아서 너덜너덜해져 가니까 경석(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형이 나한테 물었어요. “더 할 수 있겠냐?” 내가 아직은 형을 보낼 수가 없다고, 도리가 아닌 것 같다고 했어요. 경석 형이 “알겠다, 네가 그렇다면 더 하자, 받아낼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가보자” 했어요. 그렇게 싸운다고 금방 구체적인 성과가 생길 게 아닌데 그래도 그렇게 지지해준 게 큰 힘이 됐어요. 그때 나는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투쟁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한 달 뒤 서울시청 광장에서 대규모 장례식을 치렀어요. 형의 시신이 든 관을 광장에 내리고 헌화를 했어요. 장사법에 금지된 사항인데 경찰과 싸워서 그렇게 했어요. 당사자들에겐 언제든 자신에게 닥쳐올 수 있는 죽음이었기 때문에 슬픔과 분노가 어마어마했어요. 그 죽음에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국현이 형 죽음에 대해서도 그런 거죠.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그건 투쟁이었던 거 같아요.

그렇게 해서 2015년 7월부터 활동지원서비스가 3급까지 확대됐어요. 국현은 죽고 없었죠. 그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커서 심한 불면증이 시작됐어요. 마침 안식년이 되어서 숨을 좀 골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임소연 활동가가 송국현 봉안당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 현다혜
임소연 활동가가 송국현 봉안당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 현다혜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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