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9월 2일, 임소연 활동가가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9월 2일, 임소연 활동가가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 미래에서 온 장애인

744명이 넘는 거주인을 만났는데 그중에 핸드폰을 가진 사람은 다섯 명도 안 됐어요. 그 중 한 사람이 김선심이었어요. 누워서 생활하는 분이었는데 나이가 마흔이라고 해서 내가 “언니라고 부를 게요, 편하게 얘기하세요” 하고는 조사를 시작했어요. 누워서 생활하는 중증장애인이었는데 글을 아셨어요. 어떻게 배웠냐고 물으니까 포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종교를 믿으면 정기적으로 사람들이 방문해서 한글을 가르쳐준다는 말을 듣고 종교를 갖게 됐대요. 언니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라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고 자길 찾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했어요.

그때 언니는 시설에 우호적인 이야기만 했어요. 원장도 좋고 여기 살만하다고, 가족들이 고생하니까 스스로 결정해서 들어왔다고 했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조사를 앞두고 시설 측에서 미리 교육을 받은 거였죠. 언니와 헤어지면서 무슨 일이 있거나 얘기가 하고 싶으면 전화하라고 명함을 놓고 왔어요. 그게 가을이었는데 12월에 전화가 걸려 왔어요.

첫 마디가 이랬어요.

“나 나갈랜다.”

너무 당황스러웠죠.

“네? 어떻게요? 어디로요?”

그랬더니 언니가 자기 나갈 거니까 내가 다 해줘야 한대요.

“뭘 해줘요?”

언니가 말했어요.

“내가 나가려면 집이 있어야지. 네가 나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거 도와줘야지. 그리고 내가 먹고살려면 네가 나 돈도 벌어줘야지.”

다시 생각해도 참 아득하네요. (소연이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멍한 얼굴로 말하다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듯이 피식피식 웃었다.) 그때가 2005년이었는데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8년에 우린 또다시 대대적인 시설조사를 벌였어요. 이번엔 ‘탈시설 욕구조사’라는 거였어요. 수천 명을 만나서 탈시설 하려면 뭐가 필요한지 묻고 그걸 집계했는데 1번이 집, 2번이 활동지원서비스, 3번이 돈 혹은 직장이었어요. 2005년 조사에선 감히 탈시설의 ‘탈’자도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저 시설이라는 구조가 얼마나 문제인지 그 증거를 조사했던 거예요. 그런데 선심 언니는 꼭 미래에서 온 사람처럼 세 가지를 얘기했죠.

9월 2일, 임소연 활동가가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9월 2일, 임소연 활동가가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정하(현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와 상의해서 일단 선심 언니에게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어요. “언니, 집 없어요. 나와도 누가 도와줄 수도 없어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 돈은 나오는데 수급권이 유지될지 아닐지 확실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언니가 나오겠다면, (침을 꿀꺽 삼키며) 최선을 다해 알아볼게요”하고 말씀드렸어요. 언니가 생각해 보겠다고 전화를 끊었어요. 정하한테 “선심 언니가 생각을 더 해 보겠대… (우리 어떡하니…)” 했어요.

그때 우리는 나와우리 사무실에서 나와 천주교인권위원회에 얹혀 지내며 밤낮으로 결과 보고서를 쓰고 있었어요. 밤새 일하고 새벽에 찜질방 가는 생활이 이어졌죠. 우리가 만날 야근을 하니까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들이 자기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기름값이 30만 원 넘게 나왔다면서 혀를 내둘렀어요. 발바닥행동 초창기에 아낌없이 물적·인적 지원을 해준 천주교인권위원회에 이 기회에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하고 싶어요. 그렇게 뜨겁고 맹렬하고 행복하게 일하고 있는데 선심 언니가 우리를 꽁꽁 얼어붙게 만든 거죠. 정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정신없이 바빠서 결혼 준비를 하나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한 달 후 2006년 1월 언니에게서 드디어 전화가 걸려 왔어요.

“그래도 나 나갈랜다.”

언니의 목소리에선 단호함이 느껴졌어요.

‘올 게 왔구나…’

언니한테 차마 아직은 안 된다는 얘기를 못하겠더라고요.

“알겠어요. 집이 있는지 알아본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하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어요. 지하철 환승하러 가던 길이었는데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어요. 근데… 그게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언니도 우리도 어떻게 그렇게 무모할 수가 있었을까.

2007년 4월 14일,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는 집회에서 임소연 활동가와 김선심 씨. 사진 전진호
2007년 4월 14일,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는 집회에서 임소연 활동가와 김선심 씨. 사진 전진호

그리고 선심 언니가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있는지 수소문했어요. 그 시기 서울에 장애인자립생활센터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극소수 센터들이 중증장애인들이 자립을 준비할 수 있는 체험홈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다행히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길 들었어요. 한동안 지낼 집이 해결됐고 수급권은 아마도 유지될 거라고 가정했어요. 하지만 활동지원은 대책이 없는 상태였죠. 그렇게 그해 8월 선심 언니가 탈시설을 했어요.

체험홈에서 선심 언니랑 부둥켜안고 많이 울었어요. 언니가 혼자 자는 걸 아주 두려워했어요. 40년 동안 혼자 자본 적이 없고 불이라도 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언니의 활동지원을 할 사람들을 촘촘하게 조직해서 스케쥴 표를 만들었어요. 이번에도 사돈의 팔촌까지 총동원되었죠.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 임소연, 10시부터 1시까지는 어느 단체 활동가, 1시부터 5시까지는 누구누구… 언니의 24시간을 채워주려고 무진장 애를 썼는데도 공백은 생겼고 그 공백이 선심 언니에겐 너무나 큰 공포였겠죠.

내가 “언니, 24시간 다 채워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면서 울면 언니는 또 “그러면 네가 자고 가면 안 돼?” 그러고, 나는 또 “언니, 나도 집에 가야지, 만날 언니랑 같이 잘 순 없잖아” 하면서 또 울어요. 그러다 언니가 신경질을 내면서 “니가 나오라고 했잖아!” 하면서 울면 나는 “우리가 다 해줄 수 없다고 했는데 언니가 나왔잖아” 하면서 울었어요.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다 생각해낸 묘책이 있었어요. 그해 여름 발바닥행동이 종로구청 앞에서 S재단 비리 척결을 요구하는 농성을 시작했거든요. 언니에게 양해를 구해서 낮엔 농성장에 나와 있기로 한 것이죠. 농성을 하느라 활동가들은 더욱 시간에 쫓기게 됐고 언니도 혼자 있는 것보단 바깥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더 나았으니까요. 하지만 매일 그 뙤약볕에서 언니는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 그렇게 몇 달 보내니까 언니의 얼굴이 완전 새까매졌더라고요. 이듬해 2007년 활동지원서비스가 제도화되어서 언니는 한 달에 180시간(하루 평균 6시간) 서비스를 받기 시작했어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죠.

선심 언니를 만나면서 장애인이 탈시설을 하려면 지역사회에 지원체계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쓰나미처럼 우리를 덮쳐왔어요. 여기선 다 풀어놓을 수 없이 수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중증장애여성이었던 언니가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서울에 떨어져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신변 처리 지원을 받으면서 그마저도 없어 혼자서 겪어내야 했던 그 무지막지한 시간들과 우리가 함께 통과했던 그 지긋지긋한 경험들을 통해 배운 게 많았어요. 아무리 활동가들이 운동적 의지를 갖고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금방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 이것은 권리로서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예산이 필요하다는 것 등이었죠. 다음 단계의 탈시설운동과 일련의 요구안이 그 시간 속에서 정비되어 가고 있었어요.

장애계가 S재단에서 발생한 시설 비리 척결과 사회복지사업법 전면 개정을 촉구하며 종로구청 앞에서 농성하고 있다. 2006년 8월 13일 농성 19일째의 모습. 당시 종로구청장이었던 김충용 씨의 퇴진을 요구하는 붉은 색 라카가 구청 앞에 칠해져 있다. 사진 n_m
장애계가 S재단에서 발생한 시설 비리 척결과 사회복지사업법 전면 개정을 촉구하며 종로구청 앞에서 농성하고 있다. 2006년 8월 13일 농성 19일째의 모습. 당시 종로구청장이었던 김충용 씨의 퇴진을 요구하는 붉은 색 라카가 구청 앞에 칠해져 있다. 사진 n_m

- “시설에서 나가고 싶습니까?”라는 놀라운 질문

우리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와 함께 탈시설 공동투쟁단을 만들고 2006년 S재단 비리 척결 투쟁, 2008년 석암재단 비리 척결 투쟁을 했어요. 우리가 계속 탈시설을 주장하니까 서울시에선 주장의 근거가 뭐냐면서 자꾸만 “그래서 몇 명이나 시설에서 나오고 싶어 하는데?”라고 했어요.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서울시가 조사를 하라고 요구했죠. 그래서 2008년 서울시 탈시설 욕구조사(탈시설화 정책 및 주거환경 지원 연구)가 진행됐어요. 2005년 처음 시설에 들어가 시설의 구조가 얼마나 문제인지 조사했던 우리는 불과 3년 사이 시설 장애인들이 얼마나 나오고 싶어 하는지를 묻는 대대적인 조사에 도전했어요. 서울시 관할 시설 거주 장애인 3,300명을 세 그룹으로 나눠 조사했는데 그중 하나의 그룹을 내가 총괄했어요. 장애인들을 만나 정보를 주고 탈시설 할 당사자를 조직하면서 또 한 번 탈시설운동의 도약을 이뤄낸 조사였죠.

이때 논쟁이 됐던 질문은 이거였어요.

“시설에서 나오고 싶습니까?”

활동가들은 질문을 이렇게만 던져선 안 된다고 주장했어요. 전제가 되는 정보를 더 많이 줘야 한다고요.

“‘생계비를 보장받고 활동지원서비스가 제공되고 장애인콜택시 등의 이동권이 보장된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시설에서 나오고 싶습니까?”

시정개발원 측과 갑론을박하다 결국 두 가지 버전으로 다 묻기로 했어요. 전제 없이 먼저 묻고 전제를 바꾼 뒤 한 번 더 묻는 거죠.

이때도 조사원을 장애인 당사자들로 조직했어요. 그 조사원만 보더라도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잘 살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고 탈시설 욕구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려고요. 결과는 집을 제공하면 퇴소하겠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응답한 사람이 57%였고, 각종 서비스와 제도를 충분히 설명하면서 정보를 준 뒤 물었을 때 퇴소하겠다고 응답한 사람이 70%였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증명하고 싶었던 거예요. 지원 체계를 갖추면 더 많은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요. 우리가 만났던 3,300명 중 응답이 가능했던 사람이 1천여 명이었고 어쨌든 그중 57%가 나오고 싶다는 답을 한 거예요. 집과 활동지원서비스가 제공되고 수급비를 받을 수 있으면 지금 당장 나오고 싶은 사람이 600명이니까 서울시가 이들에 대한 탈시설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우리도 구체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죠.

오랜 시간에 색이 바랜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회의록들. 사진 현다혜
오랜 시간에 색이 바랜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회의록들. 사진 현다혜

2008년엔 한 해 내내 석암재단의 시설비리에 맞서서 투쟁을 했어요. 석암재단 산하 김포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거주하는 장애인분들이 비상대책위를 조직하고는 매일같이 김포와 서울을 오가면서 기자회견을 하고 집회를 하고 농성을 했어요. 탈시설 욕구조사와 맞물리면서 우리는 이 싸움이 시설 안의 비리를 척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당사자들이 시설 바깥으로 나와 탈시설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이어지도록 조직했어요. 2009년 마침내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살던 8명의 장애인이 시설을 뛰쳐나오기로 결심하고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하죠.

시설이라는 구조 안에서 장애인은 최약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싸우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 어려운 일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 일은 아마 앞으로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시설 바깥의 단체들이 끝까지 함께 싸워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여덟 명은 그렇게 결심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분들을 아주 집중해서 만나왔던 김정하의 공이 정말 크다고 생각해요. 정하의 말과 행동들이 깊은 감동과 믿음을 주었던 거예요. 그리고 혁혁한 공을 세운 또 한 명의 일등 공신이 있어요. 정종훈 동지인데, 우리는 그분을 수연아버님이라고 불러요. 중증장애인 딸을 둔 아버지인데 석암재단 비리 투쟁이 있었던 1년 동안 거주인들이 김포와 서울을 오갈 수 있도록 이동지원과 활동지원을 맡아주셨어요.

활동가들은 농성 실무에 몰두해 있으니까 당사자들과 일상적으로 충분한 관계를 맺을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어요. 수연아버님께서 새벽같이 봉고차를 몰고 김포에 가서 그분들을 모시고 왔고 하루 종일 같이 투쟁한 뒤 늦은 밤 다시 모셔 드렸어요. 차에 버너를 싣고 다니면서 커피도 타서 한 잔씩 드리고 주말이면 나들이도 가셨어요. 그분들의 인생 이야기 다 들어드리면서 발바닥행동이나 전장연을 믿어도 좋다고, 절대 당신들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음을 주셨죠. ‘마로니에 8인’은 수연아버님이 조직한 거예요. 그의 노고를 절대 잊으면 안 돼요. 중증장애인이 시설에서 뛰쳐나온다는 게 인생을 건 모험인데 동지들에 대한 아주 견고한 신뢰가 없었다면 절대 도전할 수 없는 일이죠. 아버님이 그 역할을 해줘서 너무너무 고마워요.

2009년 6월 15일,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서울시에 탈시설지원제도를 요구하며 마로니에공원에서 농성 중이다. 가운데 일어나서 말하는 사람이 임소연 활동가. 사진 전진호
2009년 6월 15일,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서울시에 탈시설지원제도를 요구하며 마로니에공원에서 농성 중이다. 가운데 일어나서 말하는 사람이 임소연 활동가. 사진 전진호

- 운명처럼 축복처럼

2006년 선심 언니 한 명이 탈시설한다고 했을 땐 바깥에 진짜 아무것도 없었어요. 당사자와 활동가 몇몇이 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너무 컸죠. 하지만 2009년 8명의 장애인이 탈시설한다고 했을 땐 무섭지 않았어요. 그동안 우리는 성장했거든요. 개인이 아니라 전장연이라는 조직이 이 삶을 운동적으로 감당하겠다는 결의와 당사자들의 투쟁을 통해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의 확장을 만들어낸 거죠. 우리의 실력과 연대가 탄탄하게 다져지고 있었죠. 그때는 뭐랄까, 신났던 것 같아요. 이건 정말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건 정의로운 비장애인이 옳은 말을 설파하는 그런 투쟁이 아니잖아요. 당사자들이 노숙을 하는 한이 있어도 시설에서 더 이상 살지 않겠다는데, 권리로서의 집을 내놓으라는데, 자기 삶을 걸고 싸움에 나선 이들이 있는데 더 바랄 게 뭐가 있어요! 무조건 싸워야죠! 아무리 힘들어도 해내야죠! 이 또한 운명처럼 거대하게 밀려왔어요. 탈시설이 우리 모두의 운동이 되었다는 든든함과 희열로 가슴이 벅차올랐죠.

그 투쟁은 전심전력을 다했다는 표현도 부족하고 최선을 다했다는 말도 충분치가 않아요. 농성 기간 동안 장애인 8명의 활동지원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사돈의 팔촌까지 전화를 돌렸어요. “무조건 하루는 농성장에 와서 자야 한다”고 했죠. 그랬더니 사람들이 내 전화를 안 받았어요(웃음). 이씨, 그럼 김정하 핸드폰으로 해야지, 그래도 안 받네? 좋다, 사무실 전화로 해봐, 그랬더니 받아, 이씨, 너 왜 우리 전화 안 받아? 그런 식이었죠. 두 달간 농성했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물심양면으로 돕고 연대해줬어요. 이때 저를 가장 감동시킨 게 바로 장애 당사자 활동가들이었어요.

마로니에공원에서 농성하던 2009년 7월 농성장 사수표. 시간대별로 농성 지킴이 이름이 빼곡히 쓰여 있다. 사진 현다혜
마로니에공원에서 농성하던 2009년 7월 농성장 사수표. 시간대별로 농성 지킴이 이름이 빼곡히 쓰여 있다. 사진 현다혜

지역의 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거기에 소속된 장애 당사자들은 석암에서 뛰쳐나온 8명의 농성자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이고, 동지, 얼마나 고생 많았습니까? 우리 같이 탈시설운동 잘해봅시다” 하면서 손잡아줬어요. 돌아가면서 농성장을 지켜주고 온갖 집회와 기습시위에 달려와 줬어요. 비장애인들이야 눈곱만 떼고 10분 만에 나올 수 있다지만 장애인은 나오려면 1시간은 기본이고 중증장애인은 2시간도 걸려요. 그런데도 새벽이고 아침이고 나왔죠. 자기가 시설에 들어가 있지도 않은데 내 일처럼 기꺼이 달려와 주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게 뭐랄까, 축복을 받은 것 같았어요.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못하도록 차별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모습을 보니까 부끄럽기도 하고 더 겸손해야겠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그땐 몰랐지만 그 농성에 내 혼을 다 쏟아 부었던 것 같아요.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우리는 탈시설운동이 크게 한 발짝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어냈어요. 서울시가 자립생활주택도 제공했고 탈시설지원센터도 만들기로 했죠. 마무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지고 영혼이 다 날아갈 것 같은 허탈감, 상실감이 들었어요. 그때 동물병원 앞을 지나는데 새끼 고양이들을 분양한다고 적혀 있었어요. 개나 고양이를 특별히 좋아한 적이 없는데 뭔가에 이끌리듯 들어가서 고양이를 쓰다듬기까지 했어요. 사무실에 갔는데 걔가 자꾸 눈에 밟히는 거예요. 운명처럼 걔랑 같이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다시 가서 데려왔어요. 이름은 ‘자바’로 지었어요. 그 시기 투쟁할 때 ‘이명박(대통령)을 잡아라’, ‘오세훈(서울시장)을 잡아라’ 그런 거 많이 했거든요. 2019년 세상을 떠난 자바는 10년 동안 나의 소중한 가족이었고 동물권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어요. 자바와의 동거가 이 농성의 결과였다는 것이 저에겐 굉장히 의미 있어요.

2011년 10월 28일 서울 공덕동 사회복지회관 6층 대회의실에서 ‘사회복지법인·시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범사회복지 전진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공익이사제 도입이 담긴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모으기 위한 자리였다. 장애계 활동가들은 이러한 사회복지계의 행보를 규탄하며 기습 시위를 벌였다. 왼쪽에 붉은 현수막을 든 사람이 임소연 활동가이며 그 옆에 김정하 활동가가 있다. 그 앞에서는 박경석 활동가가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전진호
2011년 10월 28일 서울 공덕동 사회복지회관 6층 대회의실에서 ‘사회복지법인·시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범사회복지 전진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공익이사제 도입이 담긴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모으기 위한 자리였다. 장애계 활동가들은 이러한 사회복지계의 행보를 규탄하며 기습 시위를 벌였다. 왼쪽에 붉은 현수막을 든 사람이 임소연 활동가이며 그 옆에 김정하 활동가가 있다. 그 앞에서는 박경석 활동가가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전진호

그 후 우리는 서울시와 계속 싸우며 탈시설 지원체계를 만들어 나갔어요. 동시에 서울시의 사례와 성과를 전국을 돌며 알리고 공유했죠. 2011년 우리를 찾아온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시설 문제를 다룬 영화 ‘도가니’의 흥행이었어요. 그 배경이 된 게 광주 인화학교인데, 운영자들이 어린 장애학생들을 폭행하고 성폭력을 저질렀죠. 영화를 본 대중들이 마구 분노했어요. 2007년부터 우리는 사회복지사업법을 개정해서 공익이사제를 도입하라고 요구했는데 시설운영자들의 저항이 너무 거세서 계속 실패했어요. 영화가 대박 나자 도가니대책위가 만들어졌고 저와 정하가 이 대책위 집행부를 맡았어요. 이번 기회에 공익이사제를 무조건 통과시킨다는 일념으로 또 한 번 혼을 갈아 넣었죠(웃음).

결국 법이 개정되어 공익이사제가 도입됐어요. 아주 큰 성과예요. 시설법인들은 이사회를 구성할 때 친인척이나 자기들 측근을 세워요. 경찰서장, 보건소장 같은 지역 유지들을 이사로 앉히고 결탁해요. 그러니 시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바깥에선 절대 몰라요. 굉장히 강고한 철옹성이죠. 시설은 공공재예요. 거주인들이 모두 기초생활 수급권자이기 때문에 그 돈으로 운영되는 것인데, 이 공공재가 세습이 돼요. 운영자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구조 속으로 외부에서 공익이사가 들어가면 더 이상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까 운영자들이 끔찍이도 싫어했던 거예요. 그 철옹성에 균열이 간 거죠.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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