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대학원에서 휴학을 한 나는 작년에 여러 영화제를 돌며 여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어떤 영화를 보든 장애인 접근성이 마음에 걸렸다. 극장 자체가 사방이 모두 계단뿐인 곳도 많았고, 배리어프리 영화 섹션은 따로 있거나, 아예 찾아보기 힘들기도 했다. 접근성이 추가적인 예산을 요청하며, 이에 대한 지원이 매우 적은 지금으로서는 한편 이해되는 측면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
그러던 중 한 영화제에서 제작 과정 처음부터 장애인 접근성을 고려한 영화를 여러 편 발견했다. 아무래도 내가 접근성 담당으로 실험 다큐멘터리 ‘귀귀퀴퀴’(2022)의 제작 과정에 처음부터 참여를 했고, 이 작품이 상영되던 영화제였기에 다른 작품들도 더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장애인 접근성이 그 자체로 미적 체험이나 미적 실천의 일부가 아니라, 구색 맞추기에 가깝게 소비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는 내가 작업에 참여하면서 가장 피하려고 했던 것이었다(그럼에도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는 글로 남겨 두었다). (참고 : 다큐멘터리 ‘귀귀퀴퀴’ 배리어프리 작업기- 주제와 미적 체험을 살리는 감각 번역, 안희제)
나는 이전부터 ‘배리어프리’라는 단어보다는 ‘접근성’을, 특히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는 ‘감각 번역’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해왔다. 그 이유는 우선 대학 안에서 장애인권 활동을 하면서 만난 ‘배리어프리’라는 단어가 종종 접근성을 ‘순화’한 표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배리어프리’라는 말과 함께 활동하고, 현실에 개입하고자 노력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 또한 그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접근성’보다 ‘배리어프리’가 더 많은 지지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배경에 영어로 포장한 말이 가져오는 기묘한 탈정치화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나는 공연예술에서든 영상매체에서든 문화예술 접근성을 확보하는 운동이 이동권과 탈시설 운동만큼이나 급진적으로 지금 사회의 근간에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작품에 대한 접근성을 넘어, 문화예술계라는 특정한 네트워크 혹은 공간에 장애인이 진입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접근성’은 이들을 자연스럽게 한 층위로 묶어낸다. 착하고 온건한 대외활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배리어프리’와 그렇지 않은 ‘접근성’이라는 구분에 태클을 걸고 싶었다.
문영민과 김원영은 〈시·청각장애인의 문화예술 접근성 연구 – 공연예술 접근성을 중심으로〉(2015)에서 “동등한 예술적 체험이 문화예술적 접근성의 가장 완성된 형태”라고 말하며, 이를 “미적 체험에의 접근성”이라고 개념화한다. 단지 어떤 접근성 옵션이 사용되었느냐 아니냐를 넘어, 시각과 청각을 통해 한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과 시각 혹은 청각만을 통해 같운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이 ‘동등한 미적 체험’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내가 ‘감각 번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장애인 접근성이 화면해설이나 폐쇄자막을 이미 만들어진 작품에 단지 보조수단 정도로 사후 삽입하는 것으로는 ‘동등한 체험’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작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필요하다면 일부분 연출에 개입하면서까지 시도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처럼 시각을 청각으로, 혹은 청각을 시각으로 옮기는 과정에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번역과 마찬가지로 왜곡이나 손실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더 나은 번역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감각 번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즉, 감각 번역은 미적 체험에의 접근성으로 나아가는 과정 혹은 실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는 미적인 실천이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성의 측면에서 내가 본 두 작품을 비교할 때, 차이는 꽤나 분명하다. 내가 비교할 두 작품은 모두 제작 과정 처음부터 장애인 접근성을 고려했다. 우선 오재형 감독의 ‘양림동 소녀’의 경우 감독이 자신의 어머니가 그린 그림과 그가 나누어 준 이야기로 만든 다큐멘터리다. 기본적으로 사용된 한국어 자막이나, 그림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분위기와 호응하는 피아노 배경음악이나, 그림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어머니의 음성으로 화면해설을 대체하는 것은 접근성을 미적 실천의 일부로 통합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반면 김남석 감독의 ‘코끼리 뒷다리 더듬기’의 경우 여전히 다소 물음표로 남는 지점이 많다. 우선 ‘왓챠피디아’에 올라온 해당 작품의 기본정보는 다음과 같다.
영화 촬영장의 카메라가 부서졌다. 시각장애인 우현은 청각장애인 친구 하얀과 함께 도망친 범인을 찾아 나선다. 장애인 영화 접근권과 배리어 프리 영화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기획 단계에서부터 배리어 프리 영화로 준비 및 촬영, 최종 완성된 영화이다.
어떻게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한 김 감독의 대답에는 ‘사회 공헌을 하고 싶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좀 이상한 이야기다. 배리어프리 영화는 장애인이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든 영화이지, 사회 공헌이나 비장애인의 인식 개선을 위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배리어프리 영화를 만들면서 관객으로 비장애인을 먼저 상정하는 것은 상당히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이 당연한 사실은 너무도 자주 망각된다. 대체 왜 접근성이 장애인 혹은 장애인과 관련된 무엇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 ‘인식 개선’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 대상에 대한 타자화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말이다. (참고 : [세바시 강연] 부자나 성공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참 좋은 사람이 되려면,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작품을 봐도 물음표는 여전히 남는다. 배리어프리가 제작 과정 처음부터 고려되었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배리어프리 관련 안내가 영화 초반에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제대로 읽기 힘들었던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화면해설은 여전히 대사들 사이에 간신히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또한 음악이 나오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화면 한켠에 계속해서 똑같은 음표 하나가 떠 있는데, 으레 사용되는 짧고 설명적인 폐쇄자막이 간혹 등장하는 것 외에는 청각적 서스펜스를 시각적으로 느끼기 어려웠다. 분명 처음부터 배리어프리 영화로 기획되었음에도 이런 일들이 생겼다는 것은 장애인 접근성을 미적 실천과는 별개로 이해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때 김 감독이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접근성과 작품의 조화에 쓴 노력이 아니라 작업 과정에서 접촉한 장애인 단체들의 목록을 열거했다는 점은 이와 일관성이 있다. 여기서 접근성은 미적 체험으로 통합되기보다, 하나의 ‘인증 마크’로, 구색 맞추기로 소비되었다. 최소한의 기준을 넘는 작품에 대해 관련 기관은 인증 마크를 줄 수밖에 없지만, 창작자는 항상 그 이상을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객들은 이 영화에 대해 ‘따뜻함’, ‘사랑스러움’, ‘귀여움’, ‘배려’, ‘온기’와 같은 감상을 남겼다. 이는 장애인이 등장하는 작품이 다루어지는 아주 흔한 방식을 상기한다. 오죽하면 장애인 살인자(‘어쩌다 암살클럽’)나 스토커(‘파라메딕 앙헬’)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당사자들에게 더욱 흥미를 끌까. 장애인의 이야기를 통해 배려의 가치를 상기하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는 당사자, 적어도 이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지긋지긋하다.
처음부터 장애인 접근성을 고려하는 작품이 너무도 적은 현실이기에 그런 시도가 그 자체로도 소중하고, (당사자들에게조차) 박수를 받기 쉽기도 하다. 이런 시도가 늘어나는 건 분명 한편으로 좋은 일이지만, 창작자들은 더 나아가야만 한다. 비장애인을 예상관객으로 설정하고, 접근성을 미적 실천에 통합하려 시도하지 않으며, ‘인식 개선’을 목표로 삼는 따뜻한 배리어프리 영화가 아니라, 재밌고, 아름답고, 우리가 함께 논쟁하고 비평할 수 있는 작품으로서의 배리어프리 영화가 필요하다.
물론 지금 사회는 장애인을 소비자로도 생각하지 않기에, 구색 맞추기 접근성조차 진보로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증 마크에 그치는 배리어프리를 넘어, 소비자로서의 장애인뿐 아니라 생산자로서의 장애인을 상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업이 구색 맞추기 접근성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그러한 접근성은 여전히 예술계에 대한 장애인의 접근성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문영민과 김원영은 앞서 언급한 글에서 수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 아니라 ‘창의적인 요소’로 활용한 작품을 미적 체험에의 접근성을 실현하고자 노력한 사례로 든다. 이는 접근성이 ‘인증 마크’를 넘어 ‘미적 실천’일 때 가능하며, 이때 장애인은 소비자를 넘어 작품 창작 과정의 정당한 협력자, 혹은 비평가, 나아가 예술가가 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사회 공헌이 아닌 사회 변화다. 예술계에 대한 접근성의 확보를 통해 더 많고 다양한 장애예술가와 장애인 비평가가 활약하는 세상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한다. 접근성은 적어도 그만큼 급진적인 이야기여야만 한다.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며, 질병과 장애를 중심으로 사회를 고민하려 노력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과학잡지 에피: 16호-장애와 테크놀로지》(공저), 《아픈 몸, 무대에 서다》(공저), 《몸이 말이 될 때》(공저) 등을 썼다.
* 2019년 2월부터 비마이너 칼럼니스트로 함께한 안희제 님이 개인 사정으로 인해 당분간 칼럼 연재를 중단합니다. 지난 시간 비마이너와 함께해주신 안희제 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