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7일 270일 차 혜화역 선전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들은 2021년 12월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 5-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면)에서 장애인권리예산·입법 쟁취를 위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은 지난해 47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41일 동안(3월 30일~12월 1일) 177명의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장애인권리예산은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국회에서는 고작 1.1%만 증액됐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증액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은 올해 1월 2일, 4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교통공사·서울시의 ‘무정차’ 대응으로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장애인 권리를 무정차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전장연은 매일 아침 8시, 혜화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예산과 입법을 알리는 선전전을 합니다. 비마이너는 꾸준한 매일의 투쟁을 꾸준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어제와 오늘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8시 4분,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말한다. 그의 무릎에는 두 개의 토끼 인형이 있다. “오세훈 시장을 2월 2일 만나기로 했는데 대화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8시 7분,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저 멀리서 싱긋 미소를 띠며 스르륵 휠체어를 타고 온다. 어깨를 살짝 덮으며 흘러내리는 하얗고 긴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다소곳하다. 이규식 옆에 선 박경석이 인형을 두 개나 갖고 있는 이규식에게 장난치듯 말한다. “혼자서 복 다 드시려고 토끼를 두 마리나. 같이 나눠요.” 박경석이 이규식의 무릎에 있던 토끼 하나를 자신의 품으로 데려온다.
8시 8분, 지하철 문이 열린다. 5-4칸에서 전동휠체어를 탄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두 다리로 선 사람들로 빽빽한 지하철 안에서 튕겨 나온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형숙에게로 모인다. 이형숙이 얕은 숨을 내쉬며 박경석의 맞은편, 어제도, 엊그제도 서 있던 자리로 스륵 굴러간다.
박경석이 묻는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는 박경석과 달리 지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형숙이 답한다. “아니, 사람들이 내리려는데 안 비켜줘서 한성대입구까지 갔다 왔어요.” 박경석이 마이크를 잡고 오늘 온 사람들을 한 명씩 소개한다. 파주와 남양주에서도 시민이 한 분씩 참석했다.
이수미, 박지호를 보며 박경석이 말한다. “노들야학도 오셨고…” 이형숙이 말한다.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활(중증장애인권리중심공공일자리 활동가)이에요.” 이형숙은 노들센터 소장이기도 하다.
8시 10분, 민아영 영상활동가와 조아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가 헐레벌떡 바쁜 걸음으로 온다. 대열은 두 사람의 자리만큼 옆으로 팽창한다. 박경석이 잽싸게 그 모습을 보고 인사한다. “아라, 반가워요. 늦었죠? 저도 늦었어요.”
박경석이 말한다. “국민의힘 이준석 전 당대표가 SNS에 또 글을 올렸어요. 보신 분 계세요?” 여기저기서 “저요, 저요” 답한다. 이준석은 전날(26일) 저녁 페이스북에 지하철 내부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을 올렸다. “평화로운 4호선. 나는 이란보다도 이 평화를 해치는 전장연이 제일 거슬린다. 자신들의 뜻을 관철 시키겠다고 타인의 불편을 수단 삼는 사람들. 얼마나 비문명적인가.” 장소는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을 태그했다. 그가 사는 지역이다.
박경석이 말한다. “이준석이 이란을 이렇게 미워하는지 몰랐어요. 전장연이 이란보다 더 밉데요. 제가 외교엔 좀 무감각해가지고.” 사람들이 박경석의 말에 웃는다.
영상활동가 민아영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현장을 본다. 그는 앞으로 한 발짝씩 이동하며 자신과 피사체와의 적정 거리를 찾는다. 긴 머리카락을 집게로 느슨하게 집어 올린 민아영의 모습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듯 어딘가 조금 부스스한 느낌이다.
8시 14분, 박경석이 오세훈 서울시장과의 단독 면담에 관해 이야기한다. 민아영의 카메라가 박경석을 향한다. 사진 촬영을 온 한 남성이 선전전 참가자들 뒤에 서서 박경석을 카메라로 담는다.
“서울시가 우리랑 만난다고 하니깐 다른 장애인단체에서 왜 전장연만 만나냐고 민원이 빗발치고 있대요. 시장님, 왜 우리만 만나요. 다른 데랑도 좀 만나주세요. 권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면, 다른 시민사회단체들도 오세훈 시장과 쉽게 만날 수 있어야지 이렇게 만나는 게 어려우면 어떡합니까.”
민아영이 무릎을 꿇고 카메라를 최대한 바닥에 대고 찍는다. 덩달아 그의 상체와 고개도 꺾인다. 박경석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정다운 활동가는 『유언을 만난 세계』 책을 훑어보고 있다. 그는 오늘의 낭독자다.
박경석이 계속 말한다. “면담에 몇 명이 들어갈지는 내부 논의 중인데요, 한 명 또는 두 명이 될 거라고 예상해요. 전장연은 공개방식이면 된다는 최소한의 조건은 있습니다. 공개적인 방송국에서, 시민 토론자들도 모시고, 시민분들의 댓글도 보면서 공개 토론하는 방식으로 하면 참 좋겠습니다. 이건 면담 참석에 대한 조건은 아니고 제안이고요, ‘(전장연이 지하철행동을 하며 내세운 요구들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8시 24분, 박경석이 “정다운 동지”를 부른다. 정다운이 『유언을 만난 세계』를 들고 걸어 나온다. 정다운이 사흘 연속 낭독자가 된 연유를 말한다. “제가 3일 전에 낭독 담당자였는데 읽을 거를 세 개 찾았다고 하니 ‘3일 동안 읽으세요’ 해서 이렇게 됐어요. 오늘 읽을 부분은 얼마 전 희은이 낭독한 부분인데요, 사람이 다르고 게다가 오늘 문애린 동지도 왔으니 한 번 더 읽겠습니다. 우동민 열사 이야기거든요.”
“유언으로 남은 한마디 말”이라는 단어와 함께 낭독은 시작된다. 맞은편에 있던 문애린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이 “아아-”하며 작게 탄식한다. 12년 전 그날, 그 시공간을 함께했던 박경석도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멍해진다.
““비장애인에게 더 이상 이용당하지 말라.” 인권위 직원들의 인권 의식은 절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인권위 직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반인권적인지 알지 못했다. (중략) 12월 6일 두 명의 장애인 활동가가 공무집행방해와 폭행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고 난 뒤 11층 배움터에는 우동민과 문애린을 포함한 다섯 명의 중증장애인 활동가들만이 남아 투쟁을 이어갔다.” (글 홍세미)
“문애린을 포함해”라는 대목이 나오는 순간, 문애린이 민망한 듯 깔깔깔 소리 내 웃는다.
8시 32분, 낭독이 끝난 후 문애린이 말한다. “갑자기(웃음) 예전의 기억을. 아픈 기억이기도 하고, 현재 이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이렇게 들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취재 온 문화일보 기자는 승강장 벽면에 붙어 있는 의자에 앉아 노트북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그의 시선은 노트북에 고정되어 있다.
8시 39분,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지하철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차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렸다가 다시 탄다. 젊은 여성이 선 채로 눈을 감고 있다. 그는 지하철 문이 다시 열었다가 닫히는 분주함에도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서 있다.
8시 41분, 아침 뉴스를 전달하는 아나운서처럼 낭랑하고 또렷한 목소리를 가진 이수미 활동가가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투쟁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다음으로 박지호 활동가가 발언하는 사이, 문화일보 기자는 박경석에게 명함을 건네고는 자리를 떠난다.
박경석이 사람들에게 제안한다. “아침 8시 혜화역 선전전을 더 잘하고 싶어요. 시민들은 단순히 엘리베이터를 설치해달라고 하는 걸로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왜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주제별로 매일 선전전을 꾸렸으면 하는데 어떠세요?” 5분간의 논의 끝에 다음 주 월요일에는 장애인평생교육법, 화요일에는 장애인건강권(혈우병 치료제 헴리브라 건강보험 적용), 수요일에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목요일에는 장애인인권영화제, 금요일에는 탈시설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빠르게 정해진다.
8시 50분, 박경석이 “자유발언 할 사람”을 찾자 “연극하는 김은지”라고 자신을 소개한 시민이 손을 든다. 그는 과거에도 몇 차례 혜화역 선전전에 함께했다.
“저는 어렸을 때 크게 다쳐서 일시적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녔어요. 당시엔 젊고 건강하고 운전을 할 줄 아는 아버지가 휠체어와 저를 차에 태워 다니셨어요. 제 병원비를 대기 위해 긴 시간 일하시는 와중에도 아버지는 저를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처럼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나가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휠체어를 타지 않지만 다친 이후로 저는 한쪽 신발엔 꼭 깔창을 껴야 하고, 오래 걷거나 서 있기 어려운 장애가 있습니다. 어쩌면, 또는 언젠가 이 상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겠죠? 젊고 건강하셨던 아버지도 이젠 나이가 드셔서 저에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유언을 남기십니다. 시설엔 보내지 말아달라고요. 그 말에 저는 옛날의 아버지처럼 어디든지 제가 데려다주겠다고, 함께 있겠다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투쟁은 남의 투쟁이 아닌 저의 투쟁입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함께하겠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저에게, 미래의 저에게 그리고 저의 아버지에게 그 모습 그대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8시 55분, 김필순 활동가가 25일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이 보도한 기사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는다. 설문조사 결과, 남성보다는 여성이, 그리고 진보적 성향일수록 전장연 시위를 지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마이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박경석 활동지원사 정창조가 호다닥 달려와 앰프 위치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긴다. 그래도 소리가 잘 나오지 않자 아주 미세하게 각도를 조절해본다. 김혜인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활동가가 마이크 배터리를 교체한다. 정창조가 마이크에 대고 “아아” 소리가 잘 나오는지 확인하고 김필순에게 마이크를 건넨다. 그 사이 김필순은 마이크 없이 생목으로 말하고 있었다. (참고 : “지하철 이용자는 전장연 시위 지지하기 어렵다” 사실일까?)
8시 58분, 박경석이 말한다. “과거엔 무슨 사건 터지면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동정만 줬는데 이제 우리 의제로 언론이 여론조사도 하고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 문제를 이 사회가 같이 잘 풀어가면 좋겠습니다.”
9시, 사람들이 힘차게 구호를 외친다. “장애인에게 권리를! 동정은 집어치워! 혐오는 쓰레기통에! 차별은 이제 그만!”
“수고하셨습니다. 월요일에 만나요.” 한 시간 내내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던 사람들의 발바닥이 그제야 땅에서 떨어진다. 목에 걸고 있던 피켓을 빼내어 수레에 싣고, 전장연 페이스북 생중계를 하던 핸드폰을 정리하고 삼각대도 접어 넣는다.
박경석이 다음 주부터 아침 아르바이트로 인해 선전전 참여가 어려워진 ‘연극하는 김은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파주 시민’ 정윤상과 정창조가 두 사람의 사진을 찍어준다. 정창조가 정윤상에게도 박경석과 함께 사진을 찍으라고 손짓한다. 박경석을 사이에 두고 김은지, 정윤상이 선다. 정창조가 사진을 찍는다. 그 사이 승강장은 한산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