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복지법 특집 ⑦
중증 정신장애인을 위한 지원주택과 커뮤니티 케어 (2)

- ‘이동할 권리’와 수많은 문턱들

지난 20여 년간 장애운동의 핵심 의제 중 하나는 ‘이동할 권리’였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당사자의 앞에 수많은 문턱들이 켜켜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현관의 문턱이, 시내·시외버스의 계단이, 지하철에서는 위험한 리프트가 집을 나서려는 당사자의 이동을 가로막았다. 불과 10cm에 불과한 문턱은 장애 당사자의 삶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장애운동은 수십 년간 그러한 장벽을 부수는 역할을 해왔다.

장애운동이 이동할 권리를 외치는 과정에서 그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것은 ‘장애의 사회모델(social model of disability)’이다. 장애의 사회모델에서는 장애 당사자가 이동할 수 없는 것의 근본 원인은 몸의 손상 때문이 아닌, 휠체어가 다닐 수 없게 설계된 세상의 ‘문턱들’ 때문이라 말한다. 따라서 사회모델은 당사자를 기존의 세상에 맞추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 맞추어 세상을 바꾸는 것을 지향해 왔다. 지하철에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고 요구했고, 버스는 휠체어가 탈 수 있는 저상버스로 교체할 것을 촉구했다. 모든 활동의 기초가 되는 ‘이동’ 자체가 안 되는 현실 속에서 이동할 권리에 대한 요구는 절실하고 선명했다. 장애운동의 결실로 세상은 사회모델의 이념에 따라 변화해 왔다.

- 서비스의 ‘문턱’

한편 정신장애인 J씨 또한 병원의 ‘문턱’을 오랜 시간 넘어서지 못했다. (▷앞의 기사 : “퇴원할 수 있지만 퇴원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었다. J씨는 보행 기능에 손상이 없었고, 정신병원의 철문을 가로질러 언제든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J씨의 이동을 물리적으로 막는 것은 없었지만, J씨는 여전히 병원에서 지역사회로 ‘이동’할 수 없었다. J씨가 병원을 나와 지역사회로 이동하는 것을 막고 있었던 문턱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는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물리적 공간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 있었으며,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여 공공임대주택이나 자립생활주택을 알아볼 수도 있었다. 즉, 물리적 거주의 문제는 J씨의 퇴원을 막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더욱 근본적인 두 번째 문제는, 대부분의 ‘서비스’들이 병원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돌봄·간호 인력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병원을 벗어나는 순간, 지역사회에는 J씨가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환경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식사를 하고 빨래를 하며, 매달 세금을 내고 아프면 병원에 다니는 J씨의 크고 작은 삶의 과업들을 퇴원 후에는 누가 챙길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한국의 돌봄과 의료 서비스는 대다수가 병원과 시설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러한 서비스의 편중이 정신장애 당사자의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중증 정신장애 당사자의 탈원화를 막는 근본적 원인은 증상이나 기능저하가 아닌, 지역사회 속 주거와 서비스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미지 제작 유기훈
오늘날 한국의 돌봄과 의료 서비스는 대다수가 병원과 시설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러한 서비스의 편중이 정신장애 당사자의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중증 정신장애 당사자의 탈원화를 막는 근본적 원인은 증상이나 기능저하가 아닌, 지역사회 속 주거와 서비스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미지 제작 유기훈

이뿐만이 아니었다. 중증 정신장애를 지닌 J씨의 성공적인 지역사회 정착을 위해서는, 종종 공격적 환청이 찾아와 정서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그를 상시적으로 지원할 정신건강 전문 인력이 J씨의 주거지 인근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돌봄과 의료에 대한 이러한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공간은 지역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력과 서비스가 모여있는 곳은 오직 한 곳, 즉 ‘정신병원’ 뿐이었다. 그렇기에 J씨의 가족과 의료진은 모두 J씨의 장기간의 병원 수용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비록 물리적 문턱은 없었지만,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의 문턱이 여전히 J씨의 퇴원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병원·시설 중심으로 모든 서비스가 편중된 문제는 도외시한 채, ‘증상이 너무 심해서’ 혹은 ‘기능이 저하되어서’ 퇴원하기 어렵다며 지역사회 생활이 불가능한 원인을 당사자에게서 찾아왔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장애의 사회모델’의 관점을 탈원화와 지역사회에서의 삶에 적용하게 되면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된다. 마치 이동할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당사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 계단과 문턱을 없애려 노력해 왔던 것과 같이, ‘정신적 증상이 심해서 지역사회에서 살 수 없다’는 말 대신 ‘정신적 증상을 가지고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지’로 논의의 초점이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돌봄과 의료 서비스의 배치를 병원에서 지역사회로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과제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J씨가 자립할 수 없는 이유가 대부분의 서비스가 병원과 시설에 집중되어 있다는 ‘서비스 배치’의 문제 때문이라면, 이러한 배치를 재구성하여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가능하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익숙한 병원 기반의 정신과적 서비스 제공 모델을 벗어나, 지역사회 속에서 주거와 돌봄, 의료를 당사자 중심으로 어떻게 결합해 낼 것인지에 관해 새로운 모델이 필요해진다.

- 지원주택과 ‘서비스의 탈원화’ : 주거와 서비스를 결합하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증 정신장애 당사자의 지역사회에서의 삶은 단지 ‘주택’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제공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J씨와 같이 병원에 오랜 기간 머무른 중증 정신장애 당사자가 퇴원하여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병원에 결합되어 있던 여러 서비스가 지역사회로 재배치되고 J씨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 위생관리를 하고 식사를 하며, 산책을 가고 복약 등을 챙기는 것까지, 병원에서 이뤄져 왔던 돌봄과 의료 서비스가 주거와 결합되어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거+서비스’의 결합 형태는 서구 국가들에서 ‘지원주택(supportive/supported housing)’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2010년대 말부터는 국내에서도 서서히 정착되고 있다. 단순히 주택이라는 물리적 공간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주택에 거주하는 당사자에게 필요한 서비스까지도 함께 제공하여 지역사회에서의 자립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지원주택에서는 주거와 결합하여 제공되는 돌봄과 간호, 의료 서비스를 통해, 지원이 필요한 당사자들이 병원이나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 속에서 자립생활을 꾸려나간다. 즉 지원주택에서는 (병원이나 시설 같은) 서비스 제공기관을 찾아 ‘당사자의 주거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주거로 ‘서비스가 이동’한다.

지원주택 모형에 따르면, 병원에 집중된 주거와 돌봄·의료 서비스를 지역사회로 옮겨 당사자 중심으로 어떻게 결합해 낼 것인지가 문제로 떠오른다. 즉 장애 당사자의 성공적 탈원화를 위해서는, 병원에 집중되어 있던 서비스 또한 당사자를 따라 지역사회로 이동하는 ‘서비스의 탈원화’가 함께 필요하다. 이미지 제작 유기훈
지원주택 모형에 따르면, 병원에 집중된 주거와 돌봄·의료 서비스를 지역사회로 옮겨 당사자 중심으로 어떻게 결합해 낼 것인지가 문제로 떠오른다. 즉 장애 당사자의 성공적 탈원화를 위해서는, 병원에 집중되어 있던 서비스 또한 당사자를 따라 지역사회로 이동하는 ‘서비스의 탈원화’가 함께 필요하다. 이미지 제작 유기훈

실제로 서울시에서는 2016년부터 “돌봄과 주거의 이중취약 집단”1) 지원을 위해 주택과 서비스가 결합된 지원주택 모형을 설계하고, 2018년에는 정신질환이나 알코올 중독을 지닌 노숙인, 발달장애를 지닌 당사자를 위한 지원주택 시범사업을 시작하였다. 지원주택에는 당사자가 주택을 계약하고 입주하는 과정부터 시작하여 가사나 금전 관리와 같은 일상생활 지원, 의료기관 이용이나 응급의료 지원까지 돌봄·의료 분야의 폭넓은 서비스들이 주택과 결합되어 제공된다. 2018년에는 「서울특별시 지원주택 공급 및 운영에 관한 조례」가 전국 지자체 최초로 제정되었고, 이후 지원주택은 비록 느린 속도지만 지역사회 속으로 서서히 확대되고 있다.

2016~2022년 서울시 지원주택 공급 현황(서종균, 「지원주택」, 김미옥 외, 『자립을 위한 집』, 마음대로 출판사, 2023, 215면에서 재인용)
2016~2022년 서울시 지원주택 공급 현황(서종균, 「지원주택」, 김미옥 외, 『자립을 위한 집』, 마음대로 출판사, 2023, 215면에서 재인용)

지원주택을 통해 지역사회 속 접근할 수 있는 서비스의 문턱이 낮아지며, 시설이나 병원에 장기간 격리되어 있던 정신장애 당사자들의 지역사회에서의 삶에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했다. ‘혼자서 주택 계약과 주택 관리를 할 수 없어서’ 시설에 지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당사자들은, 지원주택의 주거지원서비스가 제공되자 병원의 문턱을 넘어 지역사회로 나올 수 있었다. ‘혼자서 위생관리를 할 수 없다’는 이유도, ‘정기적인 외래 진료를 챙기기 어렵다’는 이유도 지원주택의 여러 서비스 앞에서는 탈원화를 가로막는 근거가 될 수 없었다. 시설이나 병원에서의 장기간 격리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왔던 굳은 믿음이, 주거와 서비스의 재배치라는 사회적 조정(adjustment)이 이루어짐에 따라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처럼 지원주택은 ‘장애의 사회모델’이 주거와 서비스 영역에 적용된 결과로써 이해할 수 있다. (문턱에 맞추어 장애 당사자의 이동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장애 당사자의 몸에 맞추어 ‘문턱’이 없어져야만 하듯이, (서비스에 맞추어 당사자의 삶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가 당사자의 주거에 맞추어 변형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병원에 집중되어 있던 서비스 또한 장애 당사자를 따라 함께 탈원화하여 지역사회로 새롭게 재배치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지원주택 모형이 열악한 한국의 상황에서도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일지 우려가 들기도 한다. 우리의 열악한 상황에서 돌봄과 의료 서비스의 지역사회 재배치는 그저 먼 꿈만 같은 이야기인 것은 아닐까. 이에 다음 글에서는 정신장애인 지원주택 모형을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화성시 커뮤니티 케어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수년간의 화성시 도전을 통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중증 정신장애인의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동등한 권리”2)가 어떻게 보장될 수 있을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글에서 계속)

지원주택에서 제공되는 서비스 유형들(서울특별시, 「서울시 장애인 지원주택 운영 매뉴얼」, 44면에서 갈무리, 2021)
지원주택에서 제공되는 서비스 유형들(서울특별시, 「서울시 장애인 지원주택 운영 매뉴얼」, 44면에서 갈무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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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해정 외, 「탈시설 장애인을 위한 주거지원체계 구축방안 연구」, 한국장애인개발원, 2021, 6면. 

2) 유엔 장애인권리협약(UN CRPD) 제19조.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9조 자립적 생활 및 지역사회에의 동참. 이 협약의 당사국은 모든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한 선택을 통하여 지역 사회에서 살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가짐을 인정하며, 장애인이 이러한 권리를 완전히 향유하고 지역사회로의 완전한 통합과 참여를 촉진하기 위하여 효과적이고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필자 소개

유기훈. 노들장애인야학 휴직 교사.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 공학, 인류학, 의학 등을 떠돌다가 노들야학을 만났다. 야학과 병원의 언저리에 머물며, 억압하는 의학이 아닌 위로하는 의학을 꿈꾸고 있다. 노들야학 바로 앞에 사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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