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투표용지, 쉬운 선거자료 수년째 요구 중
선관위 “공직선거법 개정해야 한다” 입장만 반복
다른 장애유형은 편의제공하는데 발달장애인은 아무 지원 없어
4월 총선을 앞두고서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아래 선관위)에 참정권 보장을 촉구했다. 한국피플퍼스트는 7일 오전 11시, 과천 선관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선관위에 면담을 요청했다. 피플퍼스트는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이 권리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이다.
- “투표 독려해야 할 선관위가 발달장애인 투표 막고 있다”
선관위 지침에 근거해 발달장애인은 2018년까지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20년 관련 지침이 일방적으로 삭제되면서 발달장애인 투표보조에 공백이 생겼다. 소송을 통해 2021년 ‘임시로 투표보조를 허용한다’는 내용의 임시조치를 법원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지침이 변경된 것은 아니어서, 신체·시각장애를 동반한 중복장애인이 아닌 발달장애인은 여전히 투표보조를 받지 못한다.
피플퍼스트는 2021년부터 이해하기 쉬운 선거자료, 그림투표용지 제공을 선관위에 요구해왔다. 같은 해, 차별구제청구 소송을 진행했으나 2023년 8월 법원은 각하 결정을 내렸다. ‘각하’는 소송의 요건을 갖추지 못해 재판할 수 없으니 재판을 끝내는 것을 의미한다. 재판부가 소송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한 이유는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플퍼스트는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다시 재판을 열라고 요청)한 상태다.
피플퍼스트는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은 후퇴하고 있다”면서 “정부, 국회, 법원, 선관위 모두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그간 무슨 노력을 했나”라고 질타했다.
기자회견에서 발달장애인 당사자인 김기백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는 “후보자들 공보물이 너무 어렵다. 한자, 영어, 전문용어 등 읽기 어려운 말들이 많다”면서 “발달장애인 동료 중엔 투표용지 받았을 때 정당 로고, 후보자 얼굴이 없어서 누가 누군지 몰라 투표하기 어렵다는 사람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 활동가는 “발달장애인들이 투표하기 어렵다고 해도 선관위는 법 조항이 없다며 무시만 한다”면서 “우리는 매번 선관위의 이러한 태도에 상처받고 투표장에서 제대로 투표하지 못한 채 나와야 했다”고 말했다.
노호성 경기피플퍼스트 대표 또한 발달장애인에게 필요한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는 선관위를 향해 “투표를 독려해야 할 선관위가 오히려 투표를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피플퍼스트에 따르면, 선관위는 15일 열리는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정책간담회’에 형평성을 이유로 각 장애유형별 단체 한 곳씩만 초청해 진행한다고 한다. 여기에 피플퍼스트는 포함되지 않았다. 신유다 광진피플퍼스트 위원장은 “단체별로 다양한 입장이 있는데 한 군데만 불러서 이야기하면 선관위가 장애인 정책과 지원을 다양하게 반영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우리와도 이야기하자”고 촉구했다.
- 선관위 “쉬운 선거공보물, 가이드 제작했으나 적용 여부는 후보자 역량”
정책간담회와 관련해 선관위는 한정된 시간 내에 의견을 수렴해야 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김휘정 선관위 선거관리과 주무관은 7일 비마이너와 한 통화에서 “2022년(대선‧지방선거)에는 피플퍼스트를 포함해 여러 발달장애인 단체와 정책간담회를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다른 장애유형 단체와 논의하지 못해 형평성에 문제가 제기됐다”면서 “시간이 한정되다 보니 원래대로 장애유형별 단체 한 곳씩만 초대해 진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선관위는 발달장애인 참정권과 관련해서는 한국지적발달장애인복지협회를 초청해 정책간담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림투표용지에 대해선 “소송이 진행 중이며, 공직선거법 개정 없이 선관위 임의로 투표용지 변경은 어렵다”고 밝혔다.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물에 대해서도 “공직선거법 65조에 따라 선거공보물 작성 권한은 후보자에게 있다. 선거공보는 선거운동의 하나이기에, 이를 잘못 건드리면 선관위는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고 선관위의 입장을 전했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해 선관위는 지난해 10월, 서울시장애인의사소통권리증진센터와 함께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각 정당에 전달했다. 가이드라인 감수위원으로는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이 참여했다. 김 주무관은 “어느 정도 활용할지는 정당과 후보자의 역량에 달렸다”고 밝혔다. (▷선관위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 가이드라인 바로가기)
- 다른 장애유형은 편의제공하는데 발달장애인은 ‘최소한’도 보장 안 해
하지만 피플퍼스트 측은 다른 장애유형에 비해 최소한의 것도 보장되지 않는 발달장애인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선관위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선거 때 시각장애인에겐 점자와 유에스비(USB)로 공보물을 제공하며, 투표소에선 점자투표용지를 제공한다. 청각장애인에겐 수어통역을, 뇌병변‧신체장애인에겐 각종 투표보조용구를 지원한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의 경우, 접근권 문제가 수년간 지적되면서 대부분의 투표소는 경사로가 있는 1층 건물이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에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발달장애인은 장애유형에 따른 어떠한 지원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김수원 피플퍼스트 사무국장은 “이제까지 발달장애인은 금치산자로 분류되어 투표 참여가 어려웠다. 금치산자 제도 폐지 후 투표가 가능해졌으나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지 않아 투표하러 가도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가 없다”면서 “공직선거법뿐만 아니라 어떤 지침과 매뉴얼에도 발달장애인 지원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 제작 가이드라인’을 정당과 후보자에게 강제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면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도 발달장애인에게 와닿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고 말했다.
피플퍼스트는 14일까지 선관위에 △발달장애인 참정권 침해 및 차별에 대한 재발 방지 대책 △발달장애인 투표보조와 정당한 편의제공 △발달장애인 이해하기 쉬운 자료 연구용역 적용 방안 △발달장애인 그림투표용지 제공 계획 △지침이나 매뉴얼 개정으로 참정권 보장 가능성에 대한 입장을 요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