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에 대한 몰이해, 정당한 편의 미제공 등 44건 진정
발달장애인들 “글을 알지 못한다고 참정권이 없는가?” 분노
공직선거법 개정안 19건 국회 계류, 원내 정당대표들도 피진정인으로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대응팀은 22일 오전 11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참정권 차별 사례를 집단진정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문윤경 한국피플퍼스트 대표가 “2018년의 약속을 잊으셨나요? 약속을 이행하라!”고 적힌 손피켓을 하늘 높이 번쩍 들어 올리고 있다. 2018년 6‧13 지방선거 사전투표 날, 한국피플퍼스트는 투표소 현장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만나 발달장애인 참정권 요구사안를 전했고, 문 대통령은 미소로 화답했다. 사진 강혜민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대응팀은 22일 오전 11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참정권 차별 사례를 집단진정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문윤경 한국피플퍼스트 대표가 “2018년의 약속을 잊으셨나요? 약속을 이행하라!”고 적힌 손피켓을 하늘 높이 번쩍 들어 올리고 있다. 2018년 6‧13 지방선거 사전투표 날, 한국피플퍼스트는 투표소 현장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만나 발달장애인 참정권 요구사안를 전했고, 문 대통령은 미소로 화답했다. 사진 강혜민

“이번 지방선거는 투표용지가 일곱 장이나 되어 발달장애인에겐 너무 어려웠습니다. 중앙선관위는 그림으로 투표 방법을 알리는 자료를 만들었다고 자랑했지만, 안내문이 부착된 투표소는 없었습니다. 혼자 투표하러 간 발달장애인 당사자는 정보를 확인할 수 없어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우리 발달장애인들은 여러 차례 중앙선관위까지 찾아가 정당한 편의제공을 요구했지만 지금까지 반영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윤경 한국피플퍼스트 대표)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도 어김없이 장애인은 참정권을 침해받았다.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대응팀(아래 대응팀)은 22일 오전 11시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 앞에서 제8회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참정권 차별 사례를 집단진정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번 진정에는 총 44명이 참여했다. 발달장애인을 비롯해 시각장애인, 휠체어 이용 장애인 등 다양한 장애유형을 가진 이들이 진정인으로 함께했다. 대응팀에 따르면 △선거관계자의 장애에 대한 몰이해와 투표보조용구 등 정당한 편의 미제공(14건) △장애를 이유로 한 정보 제공 차별(9건) △발달장애인 등 장애유형에 따른 정당한 투표보조 미제공(15건) △투표소 접근 불가 등 편의시설 미제공(6건) 등의 사건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근본적으로는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어야 한다. 현재 21대 국회에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안 19건이 발의되어 있으나 논의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대응팀은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회(아래 중앙선관위) 위원장뿐만 아니라 김진표 국회의장을 비롯한 각 원내 정당대표들도 피진정인에 이름을 올렸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투쟁을 외치고 있다. 이들은 “알기 쉬운 선거 공보물!”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에게 공적인 투표보조를 배치하라” “공적 조력인”이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강혜민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투쟁을 외치고 있다. 이들은 “알기 쉬운 선거 공보물!”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에게 공적인 투표보조를 배치하라” “공적 조력인”이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강혜민

- 발달장애인, 투표보조 또 못 받아 “글을 알지 못한다고 참정권이 없는가?”

지난해 3월 26일, 인권위는 중앙선관위에 발달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해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중앙선관위가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자 장애계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 결과 법원의 강제조정으로 올해 3월 대선부터 중앙선관위는 발달장애인 투표보조 지원과 관련한 임시조치를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고, 중앙선관위는 지선이 되어서야 각급 위원회에 안내문을 보냈다. 그런데 안내문엔 “투표 관리 매뉴얼의 투표 편의 물품 지원·활용 방법을 숙지하여 적절히 조치하도록 교육”하라면서도 “‘후보자가 누군지 몰라서’, ‘인지기능이 부족하여 보호자가 대신해 주어야 해서’ 등 대리투표에 이를 수 있는” 발달장애인은 투표보조를 받을 수 없다고 명시했다.

남태준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가 발달장애인이 지방선거 때 겪은 참정권 침해 사례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남태준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가 발달장애인이 지방선거 때 겪은 참정권 침해 사례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안내문 자체도 차별적이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발달장애인에게 투표보조가 필요하다’는 인식 자체가 현장에 전혀 공유되지 않은 점이다. 이는 투표소 직원들의 장애에 대한 몰이해와 만나 투표 후 개인정보를 요구 받거나 투표보조를 제지당해 참정권을 침해당하는 문제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문윤경 대표는 “발달장애인도 신체·시각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지원이 필요하다면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면서 “‘다른 사람이 대신 찍을 수 있다’는 우려를 신체·시각장애인에겐 하지 않으면서 왜 우리 발달장애인에겐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문 대표는 “글을 잘 알지 못한다고 투표권이 없는가?”라면서 “투표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려는 발달장애인을 지원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인데, 선관위는 도와주기는커녕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을 침해하고 있다. 참정권은 인지능력이나 장애와 상관없이 이 나라 국민으로서 18세가 지나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투표소에 왔다는 것은 투표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이는 행동인데, 투표하러 온 사람들을 ‘투표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차별이다”면서 “인권위는 발달장애인 참정권이 몇 년간 보장받지 못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촉구했다.

- 뇌병변장애인, 활동지원사와 기표소 들어가려고 하니 가로막혀

신체장애인에 대한 투표보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진정인들은 현장에서 선관위 측이 투표보조인에 대한 개인정보를 요구하며 신분증 제출을 강요하거나, 본인이 대동한 투표보조인의 지원을 가로막았다고 밝혔다. 투표용지를 접을 수 없어 용지 접는 것이라도 지원해달라고 했지만 거부당하기도 했다. 사지마비 뇌병변장애가 있는 서기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 또한 이번 지선에서 투표보조가 가로막혔다.

서기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서기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서 대표는 “이렇게 제지받은 적은 처음이다. 활동지원사가 투표보조인으로 동행했는데 투표소 직원이 자기가 꼭 기표소에 함께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현장에서 끝까지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난다”면서 “원래 활동지원사 보조를 받아 기표하려 했으나 투표소 직원의 행동이 비밀투표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입에 무는 투표보조기구를 이용해 스스로 투표했다”고 전했다.

또한, 이번 지선에서도 투표소에 엘리베이터 혹은 장애인화장실이 없어서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의 참정권과 접근권이 동시에 침해받는 일이 발생했다.

- 시각장애인, 정보 제공 못 받고 투표 현장도 엉망진창

시각장애인들은 정보 제공 단계에서부터 참정권을 침해받고 있다. 현재 점자공보물과 유에스비(USB)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선거공보물을 받아볼 수 있으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점자는 묵자보다 종이 면수를 많이 필요로 하지만 공직선거법은 이러한 부분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점자형 선거공보는 책자형 선거공보 면수의 두 배 이내에서 작성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로 인해 점자공보 면수가 비장애인들이 받아보는 묵자공보 면수의 두 배가 되면, 선거공보 내용을 충분히 담지 못해도 그대로 발송한다. 시각장애인 입장에선 정보 제공에서 장애로 인한 차별이 발생하는 것이다.

곽남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익옹호활동가가 시각장애인 참정권 침해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곽남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익옹호활동가가 시각장애인 참정권 침해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유에스비로 제공되는 후보자 정보 또한 마찬가지다. 시각장애인인 곽남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익옹호활동가는 “같은 종로구에 사는 데도 누구는 유에스비를 13개 받고, 누구는 12개 받는다”면서 “유에스비에는 보통 명함을 넣어서 보내는데 명함 점자에 오타가 있기도 하다”고 전했다.

투표소 접근권도 미흡하다. 점자유도블록 위에 안내 테이블을 설치하거나 깔판을 두어서 시각장애인들은 투표소에 제대로 접근하기 어렵다. 직원에게 안내를 요청하면 “장애 인식 부족으로 시각장애인 손을 잡고 질질 끌어당기는” 곳도 있다. 시각장애인을 안내할 땐 팔을 잡아야 한다.

시각장애인에게 제공되는 투표보조용구에 대한 지적도 이어졌다. 시각장애인 투표보조용구는 일반 투표 용지에 덧씌워져 있는데 정당명과 이름은 점자로 표기되어 있고 기표란은 도장을 찍을 수 있게끔 파여 있다. 시각장애인은 점자로 후보자를 확인 후 기표란에 도장을 찍는데 이 과정에서 투표보조용구에 잉크가 묻기도 한다. 문제는 이 용구를 폐기하지 않고 재활용한다는 점이다. 비밀투표 원칙에 어긋나는 행위다.

곽남희 활동가는 “시각장애인의 경우, 손 감각이 예민하여 잉크가 어디에 찍혀 있는지 잘 만져보면 알 수 있다. 10년 전부터 투표보조용구를 사용 후 폐기하라고 요구해왔는데, 선관위는 ‘여유롭게 만들지 않아서 다음에 또 사용해야 한다’며 폐기하지 않고 있다”고 규탄했다.

- 참정권 침해는 헌법·장애인차별금지법·유엔협약 모두 위배

이러한 사태에 대해 정다혜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정당한 나의 권리 행사 여부가 왜 기표소에 배치된 사람의 태도, 매뉴얼 숙지 여부, 기표소 환경, 투표보조용구 구비 등에 따라 좌지우지되어야 하나”라면서 “이는 헌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명백히 반하는 장애인 차별”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가입하고 비준하여 우리나라에서 법률로서 효력이 인정되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위배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29조는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정치적 권리와 기회를 향유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정다혜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정다혜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정 변호사는 “올해 8월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이행에 대한 국제사회 심의가 예정되어 있다”면서 “과연 정부가 장애인의 참정권을 협약에 따라 잘 보장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보고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이날 대응팀은 인권위에 △시각장애인에게 비장애인과 동등한 정보 제공 △선거 관련 방송에서 토론 참여자의 수와 동일한 수어통역사 배치 △이동약자 접근 가능한 투표소 설치 의무화 △발달장애인 등 기표 시 보조인력 지원 △소속 정당의 로고, 후보자의 사진이 포함된 그림투표용지 제공 △이해하기 쉬운 형태의 선거공보물과 선거 공약서 제작·배포 등의 정책권고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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