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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가까이 장애인 자립생활에 대해 배우고 자립생활 운동을 해 오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이라는 나라에 나름의 환상을 품고 있었다. 활동을 하며 접한 대부분의 지식과 철학은 미국에서 시작된 자립생활 운동의 이념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본의 자립생활 개념과 철학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

선배 장애인 당사자들이 일본 여행과 선진국 탐방을 다녀와 전해주는 이야기를 강의로 듣기도 하고 책으로도 읽으면서, 일본은 장애인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고 살아가기에 한국보다 선진화된 나라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직접 일본에 가서 내 눈으로 보고 그들의 장애와 인권에 대한 철학과 생각을 알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쉽게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박경석 전장연 대표와 전장연 동지들이 ‘파리 패럴림픽 특사단’으로 유럽을 순회하며 장애인권리를 알리고 돌아왔다. 이후 박경석 대표가 세계 최대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 일본지부의 초청을 받게 되면서 ‘일본 AA 특사단’이 꾸려졌고, 나도 그 특사단에 자랑스럽게도 함께해 일본에 다녀올 수 있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2시간 30분 뒤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7시간을 공항에 앉고 눕고 바닥을 기며 “박경석 대표를 내놓으라”며 다이인 행동을 하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박경석 대표의 입국을 불허하며 21세기에 장애인권운동가에 대한 탄압을 자행했다. 구차하게도 12년 전 박 대표가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투쟁으로 받은 집행유예를 그 이유로 삼았다. 결국 박 대표는 폭력적인 강제 출국을 당해야 했다. 남은 특사단은 대오를 가다듬고 다음 날부터 도쿄에서의 일정을 이어 나갔다.

- 내가 매일 아침 일본 지하철 바닥을 기어간 이유

평일 매일 오전 8시, 우리는 히가시신주쿠역에서 시부야역까지 출근길 지하철 포체투지를 했다. 한국에서처럼 동지들의 지원을 받아 휠체어에서 내려와 바닥을 기어갔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포체투지를 해왔지만, 일본에서의 포체투지도 한국에서의 포체투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 시민들도 우리나라 시민들처럼 ‘장애인의 목소리에 관심이 많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현하는 시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포체투지를 하러 지하철로 향했다. 나 혼자였다면 결코 할 수 없었을 일이다. 동지들과 함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체투지에 나설 때마다 내가 일본에 오게 된 목적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전장연이, 우리가 어떤 투쟁을 하는지’, ‘장애인권리 약탈자 오세훈이 장애인에게 어떤 일까지 벌였는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자.”

포체투지 외에도 다양한 투쟁을 이어갔다. 투쟁마다 일본 경찰들의 탄압은 계속됐다. 25일, 주일본대한민국대사관 앞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의 장애인권리 약탈과 박경석 대표 강제 출국 탄압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후, 다이인 행동을 진행한 뒤 특사단의 투쟁에 연대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대사관에 전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한국대사관 측은 서한 수령을 거부했다. 그 대신에 돌아온 것은 일본 경찰들의 폭력적인 진압이었다. 휠체어를 우리의 동의 없이 마구 만지고 들어 올려 끌어내기까지 했다. 한국의 경찰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26일 진행한 시부야 스크램블 사거리에서의 다이인 행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도로 한복판에서 경찰들에게 짐짝처럼 끌려가야 했다.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누워있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도로 위에서 버텼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우리의 투쟁을 더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일본에 오지 못한 박경석 대표의 몫까지 열심히 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들었다. 나의 최선의 최선을 다해 투쟁함으로써 동지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그렇게 후회 없이 일본에서의 투쟁을 마치고자 했다.

- 일본의 중증장애인 국회의원을 만나다

26일 오후에는 일본 중의원회관 제1관에서 박경석 대표 강제 출국 규탄 기자회견과 진보정당 레이와 신센구미의 장애인 당사자 의원들과의 간담회를 진행했다. 일본의 중의원은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 국회에서 하원에 해당한다.

우리는 기무라 에이코, 텐바타 다이스케, 후나고 야스히코 의원을 만났다. 기무라 에이코 의원은 생후 8개월 때 보행기 사고로 뇌성마비 판정을 받아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었다.

텐바타 다이스케 의원은 사지마비, 섭식장애, 시각장애, 언어장애 등 중복장애를 가진 중증장애인이다. 그는 발화할 수 없기 때문에 지원인의 손을 잡고 문장을 만들어 내 소통한다. 지원인이 한 글자 한 글자를 소리 내 읽어 나가면 텐바타 의원이 지원인과 맞잡은 손의 위치를 바꿔가며 원하는 글자를 고른다. 이렇게 고른 단어들을 지원인이 조합해 문장을 만들어 텐바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후나고 야스히코 의원은 루게릭병으로 인해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다. 후나고 의원도 음성언어로 소통하기가 어려워 다른 의사소통 방식을 통해 발언했다. 당시 함께 온 지원인이 일본어 철자가 적힌 판을 들고 있으면 그는 눈동자를 움직여 글자를 하나하나 선택했다. 그렇게 문장이 완성되면 지원자가 후나고 의원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장애인 당사자 국회의원들을 만나보니 모두가 중증장애인이란 사실이 놀라웠다. 우리나라는 투표로 국회의원을 선출한 이래 단 한 번도 뇌병변중증장애인이 국회에 진출한 적이 없다. 일본 진보정당인 레이와 신센구미 소속의 중증장애인 당사자가 참의원(일본 국회에서의 상원)에 세 명이나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면서도 부러웠다.

- 가장 마음에 깊이 남은 이야기, ‘츠쿠이 야마유리원 참사’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단체들과 간담회를 진행하면서 모든 이와 모든 이야기들을 기억에 담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프게 기억에 남는 이들은 ‘츠쿠이 야마유리원 참사’의 피해자 부모님들, 내부고발자, 그리고 지원단체 활동가들이었다. 특히, 야마유리원의 종사자들이 중증장애인 거주인들에게 가한 무자비한 학대 사건들을 내부 고발한 직원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

2016년 발생한 츠쿠이 야마유리원 참사는 중증장애인거주시설에서 일하다 해고됐던 종사자가 새벽에 시설에 난입하여 19명의 중증장애인을 칼로 무참히 살해하고 26명을 부상을 입힌 참극이다. 이 사건은 일본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난 집단 참사이다.

가해자인 우에마쓰 사토시는 참사 이전에 “쓸모없는 장애인들은 안락사가 가능하게 해달라”는 편지를 갖고 도쿄 중의원 의장 관저를 찾아가기도 하고, “중증장애인 470명을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 편지를 야마유리원 시설 측에도 여러 번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시설도, 경찰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학살 이후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를 가장 존경한다는 영상까지 올린 그의 비뚤어진 주장은 현재까지도 진행형인 나치의 ‘T4 작전’과도 닮아있기에 더욱 몸서리가 쳐진다. 한 가지 더 처참한 현실은 일본 경찰이 피해자의 부모가 익명 처리를 희망한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이름조차 언론에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이다. 살아서도 시설에서 존엄하게 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온전히 애도 받지 못했다. 19명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애도 받아야 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19명’이 숨진 ‘하나의 사건’이라는 숫자로만 기억되었다.

한국도 일본도, 어느 나라든 비장애인이 집단 살해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희생자의 이름들을 기억하고 가해자 처벌을 위해 싸운다. 그러나 중증장애인이 살해되거나, 코로나 팬데믹 당시 집단거주시설에서 수백 명이 감염돼 숨진 일에 대해서는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버린다. 이후 어떤 국가적, 사회적 대책도 마련되지 않는 현실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이다. 기억될 가치, 애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따로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본에서 특히 인상 깊게 남은 또 하나의 모습이 있다. 여·남 구분된 장애인 화장실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시 내가 못 찾나 싶어 건물을 방문할 때마다 찾아보았지만 중의원회관 이외에는 장애인 화장실은 모두 하나로 되어 있었다. 반면, 비장애인 화장실은 모두 여성용과 남성용으로 분리가 되어 있었다.

‘모두의 화장실’(성별·나이·성 정체성·장애 유무 등과 관계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직 장애인 화장실만을 하나의 화장실로 만든 것은 ‘장애인은 무성적 존재’라는 사회적 인식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증장애인 당사자 국회의원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버스가 저상버스이고 휠체어를 탄 시민이 정류장 앞에 있을 때 버스 운전 노동자들이 일단 먼저 멈추고 탑승 여부를 물어본다는 것 등은 일본 사회에서 배울만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 환상을 갖고 있던 20년 전의 내가 지금 일본의 현실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조금은 실망을 했을 지도 모른다. 이전만큼의 운동성과 저항성을 찾기 어려운 일본의 장애인운동 현실을 마주하면서 말이다.

만약 일본에도 전장연처럼 전국적으로 투쟁하는 조직이 있다면 여전히 저항하고 있는 일본 사회를 마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역시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이 있지만, 전장연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의 차이를 절실히 느끼게 한 원정 투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