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위 “일률적 탈시설 추진, 오히려 인권 침해” 주장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권익위의 탈시설권리 부정
한국장애학회 등 108개 단체 성명 발표
“탈시설, 모두를 ‘같이’ 살게 하자는 것”
탈시설 당사자들 “시설에서의 삶이 ‘인권 침해’”

지난달 25일, 국민권익위원회가 배포한 보도자료. 국민권익위원회 제공
지난달 25일, 국민권익위원회가 배포한 보도자료. 국민권익위원회 제공

국민권익위원회(아래 권익위)가 지난달 25일, 보도자료(“내 삶은 내가 결정”…발달장애인, 일률적 탈시설 추진보다 ‘맞춤형 돌봄’ 구축)를 통해 “일률적인 탈시설 추진이 자칫 현실을 외면한 채 인권을 오히려 침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원의사결정제도 등 ‘발달장애인 맞춤형 돌봄 지원체계 구축’을 핵심으로 한 제도개선 방안을 마련할 것을 보건복지부에 권고했다”고 밝혔다.

국민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국가기관인 권익위의 탈시설권리 왜곡에 장애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틀 만에 한국장애학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한국여성장애인연합 등 108개 단체가 연대해 “입장을 즉각 철회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권익위는 장애인 탈시설권리의 본질을 왜곡하고, 이재명 정부가 표방하는 ‘국민주권정부’라는 헌법적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이번 발표는 ‘장애인은 시설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권침해적 통념을 국가기관이 나서 확대 재생산하는 일”이라고 규탄했다.

장애계 “탈시설, 모두를 ‘같이’ 살게 하자는 것이지, ‘같게’ 만들자는 것 아냐”

보도자료에서 권익위는 “모두에게 같은 자립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오히려 ‘획일적 인권’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장애계는 “탈시설은 모두를 ‘같이’ 살게 하자는 것이지, ‘같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권익위가 의도적으로 탈시설을 ‘획일적 인권’이라 간주하는 것은 인권 개념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며, 권리의 목록에서 제외하려는 의도”라고 성토했다.

또한, 장애계는 “권익위는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부정하고, 보호자와 전문가 중심의 결정구조를 강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권익위는 “중증발달장애인의 경우 의사소통이 어렵고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며 보건복지부에 ‘지원의사결정제도’의 도입을 권고했다. 그런데 그 방법으로 “해당 발달장애인을 오랫동안 관찰해 온 전문의와 행동발달전문가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게 기준을 마련”하라고 했다.

장애계는 “이는 지원의사결정제도의 본래 취지를 왜곡하여 당사자의 권리에 기초하여 그 의사를 존중하고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대리결정제도’를 요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활동가가 “시설 수용은 ‘선택’이 아니라 ‘차별’이다”라고 적힌 빨간색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한 활동가가 “시설 수용은 ‘선택’이 아니라 ‘차별’이다”라고 적힌 빨간색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주거선택권’이라며 시설수용 정당화하는 권익위

권익위는 “자활꿈터(그룹홈), 협동주거(코하우징) 전문시설, ‘도전적 행동’ 치료 집중시설 등 다양한 형태의 주거유형이 도입되어야 하며, 당사자가 일정 기간 거주 후 주거유형을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는 ‘선택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이는 ‘주거선택권’을 앞세워 시설수용을 정당화하는 행태이다.

한국 정부는 지난 2008년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을 비준한 바 있다. 2022년에는 협약을 보완하기 위해 ‘탈시설 가이드라인’이 발표됐다.

이 가이드라인에는 “소규모 시설을 비롯한 어떤 형태의 시설수용에 대한 투자는 본 협약과 부합하지 않다”고 명확히 규정하며, 소규모 시설 또한 ‘시설’에 해당함을 분명히 하고 시설의 소규모화를 금지하고 있다. 특히 “시설수용이 장애인의 보호 조치 혹은 ‘선택’으로 고려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한다.

장애계는 “권익위가 제시한 시설들은 이름만 각기 다를 뿐 여전히 시설 문화가 작동하는 시설들의 변형에 불과하다”며 “이와 같은 시도는 문재인 정부의 탈시설 로드맵 발표 이후, 윤석열 정부가 ‘탈시설’을 지우고 시설 운영자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취해왔던 ‘의료집중형 거주시설’, ‘독립형 주거서비스 제공기관’과 같은 역행의 연장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 탈시설 당사자들 “시설에서의 삶이 ‘인권 침해’”

‘세계 최초의 탈시설 당사자 연합체’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도 지난달 27일, 탈시설 당사자의 이어말하기 성명을 내고 권익위와 유철환 권익위 위원장을 규탄했다.

“권익위는 거꾸로 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설에 감금당하고 폭행사건 일어나는게 인권침해죠. 왜 여기엔 아무 말도 하지 않나요?” (최영은)

“시설은 자유가 없습니다. (홍정수) 주는 밥만 먹고 자라는 시간에만 한번 자보라고요. (장희영) 시설은 죄 없는 사람들을 가두는 창살 없는 감옥입니다. (이은혜, 김동림, 신경수) 철창에서의 삶은 반인권적입니다. (추경진) 시설에서 20년 살아본 저는 유철환 권익위 위원장이 시설에서 6개월만 살아보면 못 할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한규선)”

“나는 탈시설 이후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반짝이는 삶을 살고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인혜)

지난해 7월 18일 오전 11시, 쏟아지는 폭우 속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이 정부서울청사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권익위원회를 “허위사실 유포로 탈시설권리를 약탈하는 악질기관”이라고 규탄했다. 사진 김소영
지난해 7월 18일 오전 11시, 쏟아지는 폭우 속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이 정부서울청사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권익위원회를 “허위사실 유포로 탈시설권리를 약탈하는 악질기관”이라고 규탄했다. 사진 김소영

유철환 권익위 위원장, 탈시설권리 부정하는 칼럼 기고하기도

권익위의 탈시설권리 부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7월 10일에는 국회 토론회에서 허위 통계 자료를 근거로 “탈시설이 발달장애인을 인권침해 위험에 노출시킨다”고 주장하고, 시설 확대 정책을 옹호했다. (관련 기사: “‘탈시설은 인권침해’ 권익위 통계 자료는 거짓”)

지난 5월 24일에는 유철환 권익위 위원장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이 발행되기도 했다. (해당 기사: [기고] 발달장애인의 '탈시설'보다 중요한 게 있다)

유 위원장은 “정부는 최근 장애인의 ‘탈시설’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는 유엔 등 국제기구가 권고하는 방향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국민권익위원회는 현실에 기반한 제도 개선과 당사자의 선택권 보장을 원칙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며 “중증 발달장애인에게는 ‘시설에 남을 권리’와 ‘자립 주택을 선택할 권리’가 모두 보장되어야 한다”고 탈시설권리를 또다시 왜곡했다.

‘국민주권정부’를 표방한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에도 국가기관의 탈시설권리 부정이 반복되고 있어, 장애계의 권리투쟁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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