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700편 추려 첫 시집 「통증일기」 출간
노랫말 받아 쓰던 어린 시인
살기 위해 도망쳐서 서울로
소녀, 안경잽이, 장애인, 봉제노동자
야학서 노동법 배우고 일으킨 반란
대학 나와 줄 잘 서야 시인 된다면 “난 안 해”
시를 쓴 지 50년 만에 첫 시집 「통증일기」를 냈다. 60대 장애여성, 시인 박정숙. 혼자 쓰던 습작 700편을 추려 76편을 실었다.
정숙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저 몸으로 학교 다녀 뭐 하겠냐고, 기술이나 배워서 먹고살라는 가족의 결정 때문이었다. 집에 있던 어린 정숙은 손에 닿는 책은 뭐든 읽었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랫말을 받아 적었다. 국어사전을 달달 외울 정도로 옆에 끼고 살았다.
가난이 집안을 휩쓸었다. 농약을 꺼내 와 같이 죽자는 아버지에게 “생각 좀 해보고요. 오늘은 아니에요”라고 말한 뒤 목발 짚고 산을 넘어 서울로 도망쳤다. 20년 넘게 봉제노동자로 살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했다. 노들야학을 만난 후 초중고를 검정고시로 졸업했다. 지금은 10년 넘게 투쟁하고 시 쓰는 삶을 살고 있다.
정숙은 살면서 느낀 갖가지 통증을 「통증일기」에 담았다. 온몸이 쑤시는 섬유근육통도 아프고, 턱 앞에서 휠체어를 돌려 나와야 하는 차별도 아프다. 홈리스, 노점상, 철거민, 세월호 참사 피해자도 정숙의 아픔이다. 정숙은 아픔을 시로 게운다. “빌어먹을, 혐오로 가득 찬 개 같은 세상”, “이런 젠장”, “퉷”이라며 “희망을 뭉쳐 하늘 낯짝에 던진다”. (〈개 같은 세상〉, 〈불치〉, 〈우리 동네〉)
그런데 정숙은 “환장할 세상”을 사랑하고 싶어 한다. 세상엔 차별의 폭풍이 몰아치는데 정숙은 슬픔의 미풍 같은 시를 쓴다. “상처가 터져 고름을 쏟아”내지만, “애가 탄 가슴속으로 불친절한 바람이 들어”오지만, “다시 사랑 속으로 한 발 들이민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더 많”다며 “살아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개 같은 세상〉, 〈주머니 사정〉, 〈잊지 마〉, 〈살아 있다는 것은〉)
박정숙 시인은 자신을 아프게 하는 세상을 왜 이렇게 자꾸 껴안고 사랑하려 할까. 지난 10일 오후 5시, 서울시 종로구 유리빌딩에서 정숙을 만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 노랫말 받아 쓰던 어린 시인, 살기 위해 도망쳐서 서울로
정숙이 시를 처음 쓴 건 1960년대, 국민학생 때다. 당시 강원도에 살았던 정숙은 〈장독대〉라는 제목의 시를 쓰고 한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1970년대, 국민학교를 마치고 나선 공부할 기회가 끊겨 버렸다. 중학교에 입학하긴 했지만 학교가 너무 멀고 산꼭대기에 있었다. 소아마비로 목발을 짚던 정숙은 등하교가 힘들어 1학년까지 공부한 후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재가장애인으로 살던 어린 정숙은 공부와 글짓기가 하고 싶었다. 책을 사서 볼 만큼 형편이 여유롭진 않았다. 집에 있는 책이면 소설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친구에게 교과서를 빌려서 보기도 했다. 책 읽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글짓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정숙은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랫말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내놓고 싶은 건 마음에 쌓여 가는데 글을 쓰려니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 거야. ‘내가 가진 생각을 어떤 단어로 말해야 사람들이 알아들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사 베껴 쓰기’를 했어요. 옛날에는 있잖아요, 가요 노랫말이 시였어요. 너무 아름다웠어요. 이종환(MBC ‘별이 빛나는 밤에’ 디제이) 같은 사람들이 가사를 불러주잖아요. 그걸 수첩에 쓰고 색연필로 그려서 가사집을 만들고 그랬어요.”
아버지 직장을 따라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으로 이사 갔다. 중학교 2학년 진학을 앞두고 가족은 정숙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 논의했다. 아버지는 정숙에게 늘 ‘공부 열심히 해라. 약학대학에 가서 약사를 해라’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재혼하고 동생이 생겨났다. 가난은 그대론데 식솔은 늘어갔다. 가족은 결국 ‘정숙이는 기술을 배우게 하자’ 결정하고 정숙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가난은 삶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버지는 농약을 꺼내 와 정숙에게 같이 죽자고 말했다.
“싫다고 그랬어. ‘아버지, 생각 좀 해보고요. 오늘은 아니에요. 나 죽고 싶지 않아요.’ 그랬어. 지금은 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그땐 되게 무서웠지. 진짜 아버지가 날 죽일 것 같은 느낌이 있었던 거야. 그때 목발 짚고 산 넘어서 서울로 와버렸어요. 큰집에 가서 500원 훔쳐 가지고 아버지 나무하러 간 사이에 나와 버렸어. 나는 당돌한 아이였어요.”
정숙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 소녀, 안경잽이, 장애인, 봉제노동자
당돌한 정숙은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엔 정숙처럼 ‘무작정 상경’을 한 소녀가 많았다. 무작정 상경은 한국전쟁 이후 가난한 사람들이 농촌을 벗어나 아무런 계획 없이 일거리를 찾아 일단 서울로 가고 보는 사회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무작정 상경자는 대부분 정숙과 같은 여성 청소년이었다. 이들은 주로 인신매매의 표적이 됐고 이는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경찰은 상경소녀를 선도한다며 데려다 부녀보호소 등에서 일시보호한 후 고향으로 되돌려 보냈다. 소녀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서울 아가씨’처럼 위장하기도 했다. 많은 소녀가 경찰의 눈을 피해 숨어다니는데 정숙은 서울역 인근 남대문경찰서에 자기 발로 들어갔다.
“난 진짜 똑똑했어요. 남대문경찰서 들어가서 그냥 얘기했어요. 나 집 없고 돈도 500원밖에 없으니까 기술 배우는 데 보내 달라고. 그랬더니 경찰이 나를 막 꼬시는 거야. 천 원을 이렇~게 흔들면서 이거 줄 테니까 집에 가래. 그래서 내가 ‘나는 17살이라 나이가 많아서 고아원에 가려고 해도 받아주는 데 없어요’ 그랬지.”
정숙은 가출청소년 관련 시설에 1년 정도 살았다. 시설에서 연결해 준 양재학원에 다닌 후 봉제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취직은 쉽지 않았다. 세상은 안경 쓴 장애여성 정숙에게 재수 없다며 소금을 뿌렸다.
“나는 사람들이 재수 없어 하는 세 가지 요소를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여자지, 안경 썼지, 장애인이지. 그러니까 너무 재수 없는 사람인 거야. 소금도 맞았다니까요? 양재협회에 취업하려고 갔는데 병신이 무슨 일을 하냐고 그러더니 바로 소금을 팍 뿌리더라고. 그게 사회생활 첫 번째 경험이야.
한 의상실에서 10년 가까이 일했어요. 당시에 시다(‘보조작업자’를 이르는 일본말)는 다 여자고 미싱사는 남자예요. 남자 미싱사가 일을 잘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어갖고. 여자도 미싱사를 할 순 있는데 나한텐 미싱을 안 가르쳐줬어요. 다리 한쪽이 불편해서 빠르게 할 수 없다면서. 밤에 몰래몰래 미싱해 보다가 혼나고. ‘미싱 건들지 마’ 한소리 듣고 또 몰래 해보고. 이런 식으로 미싱 배웠거든요.”
- 야학서 노동법 배우고 일으킨 반란
1980년대. 차별은 여자, 안경잽이, 장애인에서 끝나지 않았다. 대학을 나왔다는 사람들이 정숙의 학력을 걸고넘어지며 무시했다. ‘네가 뭘 알아’라는 말을 들을수록 배움의 열망이 솟구쳤다. 야학에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있던 의상실에서 재단하던 사람이 대학 나온 사람이야. 그 사람이 나를 자꾸 무시해. 네가 뭘 아냐고. 아니까 말하라고 하면 ‘얘기하면, 알아듣기나 해?’ 이래요. 나는 지금도 말을 잘하지만 그때도 잘했거든요? 그리고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요. 나도 책 많이 읽으면서 배운 게 있는데.
그 인간이랑 싸웠어요.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 너 책 몇 권 읽었냐? 너 교과서밖에 안 읽었잖아!’ 이러면서. 싸우고 잘렸죠. 야학에서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딱 들었어요. 연동야학에 입학하려고 연동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자정이 훌쩍 넘었다
(…)
블랙커피 한 잔과 박카스 한 병
배고픔도 잊고 잠도 잊었다
부어오른 다리로 밤새 미싱을 밟고
(…)
여자는 미싱에 손가락을 박았다
사방에 흩어지는 핏방울
- 〈반란의 이유〉
작은 의상실은 야간작업이 많았다. 정숙은 야학에 다니기 위해 이르게 퇴근할 수 있는 큰 회사에 들어갔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했다. 야학에 다니며 노동법을 배웠다. 당돌하고 똑똑한 정숙에게 반란의 무기가 쥐어졌다.
“장애인은 임금을 다 안 줘도 된다는 법이 있다는 걸 몰랐어. 나는 손이 빨라서 남들보다 일을 더 많이 해요. 동료들이랑 월급을 서로 깠는데 내가 제일 적네? 노동법 가르쳤던 야학 선생님한테 얘기했더니 가만히 있으면 안 된대.
그래갖고 사장실에 갔어요. 그분은 고대 경영학과를 나오신 분이었어. 내가 그랬어요. 고.대. 나오신 사장님, 할 얘기가 있는데요. 고대씩이나 나오신 분이 왜 사람 차별해요? 나는 남들보다 일을 더 많이 하고 지각도 결석도 안 했는데 왜 내 월급은 저 사람들의 반밖에 안 돼요? 내가 장애인이라고 나 무시하는 거예요? 월급을 똑같이 주세요.”
반란은 성공했다. 월급을 제 금액대로 받았다. 정숙의 손재주를 눈여겨 본 다른 팀이 정숙을 스카우트해 갔다. 옮긴 팀에서 1년 정도 근무했지만 야근이 많았다. 야학에 다니기 위해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 대학 나와 줄 잘 서고 술 마셔야 시인 된다면 난 안 해
1980년대 후반, 정숙은 결혼 후 대학로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 아이 둘을 돌보면서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 집에 미싱을 놨다. 여자와 장애인은 미싱할 수 없다는 원칙 속에서 몰래 배운 기술로 손품 팔아 가족을 부양했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2년 신용카드 대란이 지나 있었다. 아이들은 초등학생이 됐다. 이때, 정숙이 다시 시를 쓰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집에 컴퓨터가 생겼다.
“우리 딸 4학년 때 학교 과목 중에 컴퓨터가 있었어요. 컴퓨터를 사야겠다 싶었는데 살 형편이 안 되잖아. 우리 남편이 어디서 얻어왔어. 막 짊어지고 와서 설치해 준 거예요.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눌러 보는데 ‘다시 내가 글을 써야 되겠다’ 생각이 딱 든 거야.
손으로 쓰면 오래 걸리고 생각이 날아가기도 하는데 컴퓨터 자판으로 생각하는 걸 그대로 옮기니까 더 빠른 거예요. 그때 생각했지. 나 시 쓰는 데 아주 천재적인 능력이 있구나.”
인터넷에서 시 쓰는 사람들을 알게 됐다. 시인이 모여 있는 다음 카페에 시를 올리면 계간지나 문학 종합지 같은 데 실리기도 했다. ‘우리 동인회에 들어와라’ 같은 제안도 받았다. 문인 모임에 나가서 들은 말은 정숙을 열받게 했다. 정숙은 선언했다. 시인 안 하겠다고.
“시인이 너무 많은 거야. 너도나도 막 쓰기만 하면 시인이야. 카페에 내가 써놨던 걸 올리면 연락이 와. 이 잡지에서 실어 주겠다, 저 잡지에서 실어 주겠다. 그러다가 등단이라는 걸 했어. 그랬더니 우리 동인회에 들어와라, 저기 말고 우리 쪽으로 들어와라 그래. 그렇게 문인 모임을 10년 정도 했어요.
모임에 나가면 나만 학력이 없는 거예요. 근데 이 사람들 하는 얘기가, 시인으로 성공하려면 줄을 잘 서야 된대. 자기들끼리 줄세우기를 하는 거지. 모임 끝나면 술집, 노래방을 가. 나는 안 갔거든요. 유명한 아나운서가 나보고 뭐랬냐면 ‘박 시인은 그렇게 하면 안 돼. 성공 못 해.’ 그럼 난 안 하겠다고 그랬어요. 그다음부터 모임에 일절 안 나갔어요. 난 곤조(‘근성’을 뜻하는 일본말)가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