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시설 내 학대로 사망한 중증 지적장애인
국가에 책임 물었지만, 2차례 재판 끝에 기각
대한민국, 책임 부인도 모자라 소송비까지 청구
유족·장애계 “공익소송에 대한 추심 즉각 중단하라”

피해자의 동생인 김경태 씨(가명)가 대통령실에 제출할 국가의 소송비용 추심행위 중단 요청 진정 서한을 들고 있다. 사진 김소영

대한민국이 미신고시설에서 거주하다 활동지원사에게 폭행당해 사망한 중증 지적장애인의 유족을 상대로 ‘소송비용 추심(돈을 받아내는 것)’을 진행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다.

유족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장애계는 24일 오전 11시, 서울시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책임을 부인하면서 소송비용까지 청구한 국가를 규탄하고 공익소송에 대한 추심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24일 오전 11시, 시설 내 학대 사망사건 유족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장애계가 서울시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김소영

- 시설 내 인권침해에 대한 국가 책임 인정하지 않은 재판부

중증 지적장애인 김경민 씨(가명)는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소재 미신고시설 ‘평강타운’에서 거주하다 2020년 3월 8일 사망했다. 활동지원사에게 폭행당한 후 병원에 입원했지만 끝내 숨졌다.

유족들은 지난 2021년 2월 활동지원사에 대한 형사사건과 별도로 시설장과 평택시, 대한민국에 책임을 묻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형사사건에서 가해자가 징역 5년형에 그친 가운데, 유족은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또다시 차별적 판결을 맞닥뜨려야 했다.

손해배상청구소송의 1심 재판부인 서울지방법원은 2022년 1월, 시설장과 평택시를 ‘공동불법행위자’라고 판단하며 유족에게 약 1억 2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다만 평택시에 대해서는 책임의 70%만 인정했다. 시설장의 책임이 평택시보다 크다고 본 것이다. 전적인 책임을 묻지는 않았지만,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인거주시설 내 인권침해에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었다.

그러나 법원은 대한민국에 대한 국가배상청구는 전부 기각했다. 유족은 이에 항소했지만 2023년 1월, 2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도 대한민국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 책임 회피에 그치지 않고 소송비까지 청구한 대한민국

2016년, 장애인거주시설 관리·감독 주체인 보건복지부는 평강타운이 있는 시설을 현장평가한 뒤 최하위 등급인 F로 판정했다. 시설 평가는 3년마다 실시되는데, 2019년에도 F등급이 부여됐다. 그리고 마지막 현장평가 1년 후인 2020년, 김경민 씨는 결국 사망했다.

보건복지부는 해당 시설이 폐쇄 처분을 받은 다른 시설과 비슷한 수준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즉각적인 제재를 포함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유족과 소송대리인단은 소송 과정에서 보건복지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했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가의 몰염치한 행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24년 12월부터는 재판에서 승소한 당사자(대한민국, 평택시)가 패소한 상대방(유족)에게 소송비용을 청구하기 위해 법원에 비용 확정을 요청하는 ‘소송비용 확정’을 신청했다. 결국 피해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소송비용까지 유족에게 떠넘기겠다는 것이다.

이번 달 1일, 법원은 소송비용을 확정하며 유족에 이를 12일까지 납부하라는 고지서를 보냈다. 유족 각 개인은 보건복지부에 258만 6129원, 평택시에 160만 4663원을 납부해야 한다. 유족 5명에게 부과된 총액만 2095만 3960원에 달한다.

- 유족 “형님 같은 희생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소송 제기했는데…”

이날 기자회견에서 김경민 씨의 동생 김경태 씨(가명)는 “시설에는 CCTV(폐쇄회로텔레비전)도 없고 인권지킴이단 같은 것도 없었다. 평택시나 보건복지부는 시설이 엉망인 걸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안 했다. 그로 인해 시설에서 형님이 폭행을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처음엔) 억울한 마음만 있었다. 그런데 제2의 형님처럼 이런 시설에서 멸시받고 소외되는 사람들이 더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 문제를 알리기로 결심했다”며 “재판 과정에서 국가와 평택시는 책임을 피하기에만 급급했고 유족에 대한 위로나 사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긴 재판이 끝난 뒤에도 승소했다며 오히려 돈을 내라고 한다. 우리처럼 돈 없고 잘 모르는 사람들은 소송비용이 두려워 억울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수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서울지부 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이수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서울지부 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탈시설 당사자인 이수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서울지부 공동대표는 자신을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소개하며 발언을 시작했다.

이 대표는 “국가는 시설에서 인권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미온적으로 대응해 왔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할 국가가 되레 유족에게 2차 가해를 가하고 있다”며 “강제 추심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즉각 중단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 소송대리인 “공익소송 패소한 개인에게 책임 전가하면 안 돼”

소송대리인단 최정규 공익법률센터 파이팅챈스 변호사는 “유족들이 시설만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면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사실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면서 밝혀질 수 있었다. 이렇게 확인된 사실을 근거로 보건복지부에 미신고시설 실태조사를 촉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많은 장애인들이 인권침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최 변호사는 “공익소송은 단순히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송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을 바탕으로 국가와 지자체에 더 강력한 요구를 할 수 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며 “공익소송에서 패소할 경우 그 비용을 패소한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공익소송 자체를 위축시킨다. 소송비용 부담 때문에 공익소송이 줄어든다면 이는 시민들의 안전과 기본권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반드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주먹 쥔 손을 높이 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김소영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주먹 쥔 손을 높이 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김소영

유족들을 비롯한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기자회견을 마친 뒤 대통령실 공공갈등조정비서관실에 ‘시설 내 학대 사망사건, 국가의 소송비용 추심행위 중단 요청 진정 서한’을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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