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인권침해 관해 국가·지자체 책임 물은 최초의 소송
법원 “평택시 책임 일부 인정”
대한민국 상대로 한 청구는 전부 기각
장애계 “지자체 책임지게 하는 선례 만들어졌다”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인거주시설 내 인권침해에 책임이 있다는 최초의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6민사부(임기환 부장판사)는 27일 오전 10시, 관할 지자체인 평택시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며, 미신고시설에서 사망한 장애인의 유족 측 손을 들었다. 법원은 평택시와 김 원장을 공동불법행위자라고 판단하면서도 김 원장의 책임이 평택시보다 더 크다고 판결했다. 다만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은 전부 인정하지 않았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등 장애인운동단체와 변호인단은 선고 직후인 오전 10시 30분, 법원 서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자체가 장애인거주시설 관리·감독의 책임을 지게 하는 선례가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
- 미신고시설서 사망한 장애인, 유족은 국가·지자체·원장 상대로 손배소 제기
2020년 3월 8일,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소재 미신고시설 ‘평강타운’에서 거주하던 중증 지적장애인 김경민 씨(가명)가 사망했다. 활동지원사 정 아무개 씨에게 폭행을 당한 후 병원에 입원했지만 끝내 숨졌다.
미신고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은 ‘시설 거주자’로 분류되지 않기에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원장 김 씨는 이런 점을 악용해 활동지원사를 미신고시설 직원처럼 고용해왔다.
가해자 정 씨는 상해치사죄로 기소된 후 지난해 4월, 징역 5년이 확정됐다. 김경민 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는 교도소에 수감됐지만 유족은 김 원장과 평택시, 대한민국에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유족은 지난해 2월, 대한민국과 평택시, 김 원장을 상대로 약 3억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 과정에서 김 원장은 평강타운에서 일어난 사망 사건이 자신과 연관이 없다고 거듭 주장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김 원장은 ‘신고시설(사랑의집)만 운영했다. 평강타운에서는 월세 50만 원씩 받고 임대업을 했을 뿐, 미신고시설을 운영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평강타운은 거주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돕기 위한 체험홈’이라는 궤변을 이어왔다.
그러나 사랑의집과 평강타운은 하나의 단독 건물처럼 연결돼 있어 사실상 하나의 시설로 봐야 한다.
평택시는 관내 장애인거주시설에 대한 지도·점검을 축소 운영하고, 관련 공무원이 관리·감독을 소홀히 해 징계받은 사실이 확인됐다. 게다가 보건복지부 또한 2019년 사랑의집 현장 방문조사 시 ‘사회복지시설 평가’의 모든 항목에 F등급을 내렸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 유족, 일부 승소… 변호인단 “향후 시설 내 인권침해에 관해 다툴 수 있는 선례”
1심에서 법원은 유족의 손을 들었다. 법원은 김 원장과 평택시를 ‘공동불법행위자’라고 판단하며 유족에게 약 1억 2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공동불법행위란 여러 사람이 타인에게 공동으로 불법 행위를 하여 손해를 가한 행위를 칭하는 것으로, 공동불법행위자들은 손해배상액을 연대하여 배상할 책임을 가진다. 즉, 김 원장과 평택시는 1억 2천만 원을 함께 책임지고 배상해야 한다.
이번 사건의 책임에 대해 법원은 김 원장에게는 100%, 평택시에는 70%의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평택시 책임 또한 인정됐지만 김 원장에 비해서는 적게 인정됐다.
법원은 “김 원장에게 “사용자로서의 책임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여기서 ‘사용자’는 ‘고용주’를 의미한다. 즉, 김 원장이 활동지원사를 시설 내 직원처럼 고용했으니, 활동지원사가 거주장애인을 학대하지 않도록 관리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에서 ‘임대업을 한 것’이라는 김 원장의 거짓말과 불법행위가 사실상 입증된 셈이다.
반면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전부 기각됐다. 나동환 장추련 변호사는 “법원은 김 원장의 책임을 엄중하게 인정했다. 대한민국 책임이 인정받지 못한 건 아쉽지만 평택시 책임을 인정받은 건 소기의 성과다. 향후 소송과정을 통해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남희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임상교수는 “지금까지는 시설에서 학대가 발생해도 국가·지자체가 책임진 적 없었다. 거주시설 내 장애인 사망 사건에서는 국가·지자체 상대로 제기된 첫 손해배상청구 소송이다. 지자체가 장애인거주시설을 방치하는 게 아니라 관리·감독에 책임을 지고, 학대가 발생하면 피해장애인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걸 법원이 어느 정도 인정해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향후 유사한 사례가 있을 경우 다툴 수 있는 선례가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김경민 씨의 동생인 김경태 씨(가명)는 “형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장애인의 생명은 생명이 아닌가?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며 흐느껴 울었다.
김준우 송파솔루션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대한민국에 책임이 없다고 판결한 법원을 규탄했다. 김 소장은 “대한민국은 살인을 방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국민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책임져야 할 대한민국에 어떻게 책임이 없나. 유족의 눈물이 보이지 않는가. 대한민국 책임을 외면한 오늘의 판결은 잘못됐다”고 성토했다.
현재 사랑의집과 평강타운 두 시설 모두 폐쇄됐지만 이에 불복한 김 원장이 평택시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김 원장은 ‘사용자’로서 활동지원사에 대한 주의·감독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과 직접 장애인 학대 행위에 가담한 혐의로 수원지방검찰청 평택지청에 의해 기소돼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