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책임제의 핵심 ‘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
가장 오래된 곳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동료지원인 양성 주력 “출근길 즐겁다”
예산 턱없이 부족, ‘센터 지키기’에 사활

한정자 사무실 문 앞. 사진 하민지
한정자 사무실 문 앞. 사진 하민지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한정자)는 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아래 동료지원센터)의 시초인 곳이다. 지난달 16일, 이곳에서 한정자를 이용하는 많은 정신장애인과 정신질환자(아래 당사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도 내담자에게 한정자를 연결해 줄 정도다.

당사자들은 인권침해가 일어나는 강제입원과 강압적 치료를 없애고 지역사회에서 자기주도로 회복하는 체계를 만들라고 오랜 시간 요구해 왔다. 이 같은 요구를 모아 정부에 ‘정신장애인 국가책임제(아래 국가책임제)’를 실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동안 당사자는 병원치료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국가책임제에서는 당사자가 회복과 자립의 주체가 된다. 병원에서 필요한 만큼 안전하게 치료받고, 지역사회에 돌아가서는 동료지원센터에서 회복을 도모하는 체계가 국가책임제다. 이른바 ‘의료 전문가’ 중심의 일방적 치료체계에서 당사자 주도의 서비스 전달체계, 즉 동료지원센터를 구축하는 게 국가책임제의 핵심이다.

그러나 국가책임제는 결국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에서 제외됐다. 예산도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한정자 이용자와 활동가들은 “그럼에도 센터운영을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한정자에서 제공하는 당사자 주도 서비스들. 자립지원, 자조모임, 동료지원, 권익옹호 등이 있다. 사진 하민지
한정자에서 제공하는 당사자 주도 서비스들. 자립지원, 자조모임, 동료지원, 권익옹호 등이 있다. 사진 하민지
야학 미술수업 시간에 당사자들이 그린 그림들. 그림 옆에 “한정자와 함께하는 나, 내가 기대하는 한정자, 함께회복, 내집과 가까이 있는 한정자, 장기 둘 사람 모두 모두 모여라, 구내식당 있었으면 좋겠다, 화장실 문제 없는 한정자” 등이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야학 미술수업 시간에 당사자들이 그린 그림들. 그림 옆에 “한정자와 함께하는 나, 내가 기대하는 한정자, 함께회복, 내집과 가까이 있는 한정자, 장기 둘 사람 모두 모두 모여라, 구내식당 있었으면 좋겠다, 화장실 문제 없는 한정자” 등이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 동료지원센터,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간

박인석 씨(45세)는 “한정자에 푹 빠졌다. 앞으로 한정자를 전폭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한정자를 알기 전, 지방에서 약 30년간 여러 시설과 병원을 전전하며 살았다. 한정자를 이용하고 나서는 자신에 대한 편견을 거뒀다고 한다. 그는 “예전엔 남이 ‘안 돼’라고 하면 수긍했다. 지금은 ‘왜?’라 한다”고 말했다.

백연재 씨(30세)는 한정자를 알기 전엔 집에만 있는 재가장애인이었다. 올해 봄, 한정자를 알게 된 후 백 씨는 매일 한정자에 들른다. 그는 “한정자에서 개인별 자립계획을 세우고 태어나 처음으로 취업했다. 미술 자조모임에 참여하면서는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도 알게 됐다. 요즘이 내 인생 최고조”라고 말했다.

한정자는 공휴일을 제외하고 365일 쉬는 날이 없다. 주중에는 자조모임, 야학, 투쟁, 동료지원, 개인별 자립계획 수립 등이 쉴 틈 없이 돌아간다. 일요일에는 ‘동료지원카페’를 연다. 차를 마시면서 동료지원인과 대화를 나누는 날이다. 위은솔 한정자 센터장은 “평일에 센터에 오기 어려운 당사자들이 있어서 주말에도 문을 연다. 한정자는 사랑방 같은 곳이다. 사무공간보다 이용자 공간이 훨씬 넓다. 누구나 언제든지 와서 편하게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정자 이용자의 휴게공간. 침대, 의자, 소파 등이 있다. 이용자들은 이곳에서 쉬기도 하고 동료지원인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침대 위 베개는 한 이용자가 기부한 것이다. 사진 하민지
한정자 이용자의 휴게공간. 침대, 의자, 소파 등이 있다. 이용자들은 이곳에서 쉬기도 하고 동료지원인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침대 위 베개는 한 이용자가 기부한 것이다. 사진 하민지

- 동료지원센터의 핵심은 ‘동료지원인’

한정자가 주력하는 것 중 하나는 ‘동료지원인 양성’이다. 동료지원인은 당사자가 경험하는 개인적 어려움과 정신적 상태를 기반으로 동료 당사자를 지원하는 ‘경험 전문가’를 일컫는 말이다. 정서적 지지뿐만 아니라 자기결정권 인식, 권리의식 고양 등을 중심으로 지원이 이뤄진다. 이한결 한정자 사무국장은 “동료지원은 단순한 일자리 창출용이 아니다. 정신건강 생태계를 사람중심 권리기반으로 바꾸는 체제 개선이자 사회운동”이라고 설명했다.

한정자는 100시간 교육을 통해 동료지원인을 양성한다. 교육을 이수한 동료지원인은 한정자 사무실에 출근해서 일한다. 한정자는 동료지원인 근무 시간표를 촘촘하게 배치했다. 당사자는 현재 출근 중인 동료지원인을 확인한 후 원하는 사람을 선택해 동료지원을 받을 수 있다.

동료지원인의 업무 만족도도 매우 높다. 노시철 씨(49세)는 자살충동으로 여러 차례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다 동료지원인이 되면서 “내 인생 꽃 폈다”고 말했다. 노 씨는 “다른 직업을 가졌을 땐 금방 그만뒀다. 동료지원인은 동료 당사자와 함께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김민정 씨(45세)도 “내 상담을 받고 나아지는 동료들을 보면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긴다. 우리는 가족도, 애인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다.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함께 회복하니 출근길이 즐겁다. 동료지원인은 내 인생을 바꿔놓은 직업”이라고 예찬했다.

야학 수업 때 제공되는 이용자들의 저녁식사. 인터뷰 내내 전자렌지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센터 예산이 삭감돼 식사는 대부분 편의점 음식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진 하민지
야학 수업 때 제공되는 이용자들의 저녁식사. 인터뷰 내내 전자렌지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센터 예산이 삭감돼 식사는 대부분 편의점 음식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진 하민지

- 월급 10만 원 받고 가꿔온 첫 동료지원센터, 한정자

동료지원센터는 2012년, 자조모임을 하던 당사자들이 한정자를 만들면서 한국사회에 태동했다. 당시 당사자 지원기관의 모체가 없어서 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IL센터)를 따다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이름을 지었다.

2016년부터는 서울시에서 ‘정신질환자 자립생활 프로그램’ 비용을 지원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울시 지원비엔 인건비가 없었다. 활동가 월급은 10만 원 정도로 책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무국장은 “그래도 우리가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감사했다”며 웃었다.

이 경험을 토대로 2019년, 정신장애인 자립생활센터 예산지원이 명시된 서울시 조례가 만들어졌다. 한정자는 ‘동료지원센터’ 명칭을 쓰고 싶었다. 이 사무국장은 “우리 운동은 동료운동(Peer Movement)”이라고 했다. 당사자가 당사자 주도로 당사자를 지원하는 운동이란 뜻이다.

하지만 법적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장애인복지법상 IL센터로 하되 간판은 동료지원센터로 내걸기로 했다. 이렇게 탄생한 첫 번째 동료지원센터가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다. 이후 서울시는 권역별로 동료지원센터를 설립하는 마스터플랜을 세웠지만 오세훈 시장이 취임하면서 플랜은 엎어졌다.

한정자 활동가들과 이용자들. 한정자는 상근 활동가도 대부분 정신장애 및 정신질환 당사자다. 사진 하민지 

- 서울시도, 정부도 예산삭감… 꼭 지켜야만 하는 소중한 동료지원센터

오 시장은 동료지원센터 예산마저 삭감했다. 2023년, 예산이 50%나 삭감될 위기에 놓이자 당사자들은 서울시의회 의원들을 쫒아 다니며 예산을 지키려 애썼다. 한정자에는 한 해에만 3천 명의 이용자가 다녀간다. 예산이 깎이면 센터운영에 어려움이 생기고, 그 피해는 오롯이 당사자들이 떠안아야 한다.

결국 20% 삭감으로 합의했다. 한정자는 이용자들의 다과비와 식사비부터 줄였다. 자조모임 횟수까지 줄이면서 센터운영에 사활을 걸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용자들은 정부에서 받은 나랏미를 센터에 갖다 놓기도 한다. 민생회복 소비쿠폰을 받았다며 빵, 라면, 음료수 등을 사 오는 이용자도 있다. 박현동 씨(48세)는 “한정자 같은 곳이 별로 없다. 내년에도 예산이 삭감되면 어떡하나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당사자 권리보장 예산은 동료지원인 1명당 54만 원씩, 총 45명의 인건비를 편성한 게 전부다. 반면 정신 및 행동장애에 쓰이는 의료예산은 7조 원 넘게 편성됐다. 이 사무국장은 “정신장애계는 당사자보다 의료인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는다”고 지적했다.

한정자 이용자들은 “한정자가 우리 집 앞에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한정자의 소망은 동료지원센터를 서울시와 전국 곳곳에 세우는 것이다.

현재 서울시에는 한정자, 마포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 등 총 3개소가 있다. 이외에 경기도, 평택시, 청주시, 경상남도, 광주시에 각 1개소가 있고 부산시에 2개소가 있다. 이 중 정부보조금을 받는 센터는 서울시 3개소가 유일하다. 나머지는 자부담이나 후원금으로 센터를 운영하는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

당사자들은 국가책임제를 도입해 동료지원센터 설치와 운영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전정식 유한대학교 건강웰니스학과 겸임교수는 지난 7월 30일 열린 ‘국가책임제와 당사자 주도 서비스’ 토론회에서 “동료지원센터가 제도화하면 병원으로 향하는 당사자 수는 서서히 줄어들 것이다. IL센터 덕분에 장애인거주시설 입소가 줄어든 것처럼 말이다”라고 말했다.

위 센터장은 “예전처럼 강제입원 당하는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려면 우리 힘으로 만든, IL센터와 달리 우리의 고유성과 특별함을 드러낼 수 있는 동료지원센터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