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당시의 상황, 폭력적인 강제철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죽음
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배제와 탄압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의 30주기, 3기 진화위를 앞두고

이덕인 열사의 영정. 사진 하민지
이덕인 열사의 영정. 사진 하민지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30주기가 다가온다. 1995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진입할 수 있는 일자리는 현재보다 더 제한적이었다. 노점은 가난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자구적인 일자리이자 사회안전망이다.

하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노점상은 도시개발로 인해 가장 먼저 쫓겨나는 존재 중 하나다. 경쟁을 부추기고 사람을 착취하며 더 많은 이윤과 성장만을 쫓는 사회, 값비싸고 화려한 도시로 개발하기 위해 가난한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사회에서 장애인과 도시빈민 노점상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져야 하는 존재로 여겨져 왔고, 때때로 그 과정에서 생명을 빼앗기는 잔혹함으로 세상에 존재를 알려왔다.

30년 당시의 상황, 폭력적인 강제철거

1995년 인천 아암도 노점을 철거하기 위해 군, 경, 소방, 용역 총 1,253명이 투입됐다. 이들은 주변 교통을 통제하고 진입을 원천 봉쇄하며 포크레인을 동원해 노점을 단속하고 철거했다. 공권력과 용역깡패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30여 명의 노점상인들은 망루에 올랐다.

하지만 망루에는 식품과 의약품 반입이 통제됐다. “물만이라도 마시게 해달라” 애원하는 노점상들에게 돌아온 답변은 “그 위에서 굶어 죽든지 내려오든지”라는 경멸뿐이었다. 혹한의 추위였음에도 살수차를 동원해 물대포를 쏘며 진압 시도가 계속됐다.

그리고 나흘 후, 아암도 앞바다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이었다. 발견 당시 이덕인은 상의와 신발이 벗겨진 채 두 손목이 끈으로 묶여 있었고 얼굴과 어깨 등에 상처와 피멍이 들어있었다. 장례를 치르던 새벽, 경찰은 병원 영안실 벽을 뚫고 이덕인의 시신을 탈취해갔다. 그리고 그의 형을 납치해 강제 입회하에 부검을 진행했다. 이후 경찰이 발표한 사인은 익사.

2021년 3월 이덕인 열사, 장준하 선생,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등 의문사 피해자 18명의 유가족이 2기 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상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2021년 3월 이덕인 열사, 장준하 선생,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등 의문사 피해자 18명의 유가족이 2기 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상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죽음, 이후의 싸움

폭행의 흔적이 있는 시신, 시신을 탈취해 강제 부검한 경찰의 행태에 당시 이덕인의 동료들과 유가족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유가족은 진실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배·보상 심의 신청이 모두 기각됐다. ‘노점상 단속 행위는 지방자치단체의 고유사무이며,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통치행위라고 할 수 없으므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이유였다.

이후 2009년 발족한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는 이덕인 의문사 사건에 대해 “위법한 공권력으로 인한 사망인지에 대한 조사가 일부 미진하므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사유로 조사개시 결정을 내렸으나, 기간 내 조사되지 않고 종료됐다. 그리고 지난 2021년 3월, 2기 진화위에 ‘이덕인열사 의문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공동대책위원회(아래 이덕인 공대위)’와 유가족이 다시 조사신청서를 제출하고 조사개시가 결정됐다. 하지만, 1기 때와 마찬가지로 기간 내 조사되지 않고 끝내 조사가 중지됐다.

한 활동가가 '누가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나'라고 적혀있는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에 참여했다. 피켓에는 이덕인 열사의 영정사진이 있다. 사진 하민지
한 활동가가 '누가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나'라고 적혀있는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에 참여했다. 피켓에는 이덕인 열사의 영정사진이 있다. 사진 하민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배제와 탄압

이덕인 열사의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은 지금 일상을 지키고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도시빈민 노점상, 장애인들의 투쟁과 연결되어 있다.

진보적 장애운동의 노동권 투쟁을 통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등을 쟁취하며, 1995년 당시와 비교해 장애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자리가 늘어났다. 하지만 중증장애인의 비경제 활동인구 비율은 77%이며, 장애인의 빈곤율은 35.7%로 전체 빈곤율인 14.9%보다 2배 이상 높다. 또 지난 2021년 12월 시작한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함께 살자’는 지하철에서의 외침은 4년째 계속되고 있고, 이에 대한 국가와 지자체의 강제퇴거와 고소 고발 등 탄압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한편 동대문구에서는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한 도시개발을 위해 ‘노점단속 특별사법경찰(아래 노점단속 특사경)’을 도입하여, 행정권력에게 사법권력을 부여한 무자비한 단속이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 서울시는 노점단속 특사경을 도입한 자치구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또 지난 9월 광진구에서는 건대입구역 앞 노점 40여 곳을 기습 철거해 노점상인들이 천막 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이덕인과 동료들이 30년 전 겪었던 배제와 탄압은 비슷한 모습으로 현재에도 존재하며, 장애인과 노점상인들의 일상을 파괴하고 있다.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의 30주기, 3기 진화위를 앞두고

2기 진화위의 종합 보고서에는 이덕인 열사 의문사 사건에 대해 “과거 조사기록 검토, 분석, 국가정보원(2회), 경찰청(1회), 나라기록관(1회), 국군방첩사령부(3회) 등 방문 조사 등 조사를 진행하였으나 추가 자료는 확보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4년의 기록치곤 너무 짧고 허망하다.

2기 진화위에 사건을 신청한 이는 이덕인 공대위와 유가족이었다. 하지만 2기 진화위는 신청인에 대한 조사조차 진행하지 않았다. 도시 빈민과 장애인의 마지막 생계 수단인 노점을 없애기 위해 용역과 군인, 경찰, 소방까지 동원해 강행한 대책없는 단속과 철거로 인해 발생한 죽음이 어떻게 과도한 공권력에 의한 사망이 아닐 수 있나.

한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로 대표되는 진보적 장애운동의 지하철 타기 투쟁에서 외치는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 구호는 우리 사회가 형식적 민주화를 쟁취한 이후에도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워나가기 위해 분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로부터 방치되고 배제된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들의 생존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그 가장 끝에서 계속되고 있다.

 

필자 소개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관련기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