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교과서에는 없는 빈곤과 차별의 현대사 ② 최인기 빈민해방실천연대 집행위원장
<서울 구석구석, 숨어있는 빈곤의 역사 찾기>

[편집자 주] 현 정부는 학생들이 단 하나의 교과서만으로 역사를 배워야 한다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근대화·산업화의 과정에서 차별과 배제를 겪어온 소수자의 이야기는 '하나의 교과서'에 온전히 담길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비마이너는 국정교과서에는 담기지 않을, 한국 현대사 속 숨겨진 빈곤과 차별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특별 기획강좌를 준비했다. 앞으로 3회에 걸쳐 강좌 전문을 기사로 전한다. 단, 1강은 강사와의 협의로 요약본만을 싣는다.

1강 - 시혜와 동정의 사회복지 역사의 시작-식민지 사회사업 (주윤정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2강 - 서울 구석구석, 숨어있는 빈곤의 역사 찾기 (최인기 빈민해방실천연대 집행위원장)3강 - 삼청교육대, 청송감호소, 그리고 형제복지원-감금의 역사 (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1960년대, 농촌에서 더는 생활할 수 없는 이들이 도시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들이 묵을 곳은 판자촌과 쪽방뿐. 가난과 가난이 얼기설기 엮인 곳을 도시 한 쪽에 두고 국가는 발전했다. 그러나 나라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도, 가난한 이들은 그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꾸 어딘가로 쫓겨났다. 그렇게 그들의 삶터와 함께 그들 삶도 계속 철거당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 저항해서 싸웠던 투쟁의 역사가 있다. 가려졌던 삶의 공간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았던 가난한 이들의 싸움의 역사.
 

비마이너가 주최한 기획강좌 ‘국정교과서에는 없는 빈곤과 차별의 현대사 이야기’ 두 번째는 도시에서 살 권리를 얻기 위한 ‘빈민들의 투쟁의 역사’다. 최인기 빈민해방실천연대 집행위원장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도시 문제를 구조적 문제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활동한 주체들의 투쟁 과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서울, 가난한 이들이 모여들고 쫓겨난 곳 

한국 전쟁이후 폐허가 된 땅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농촌 중심의 경제가 아닌 제조업 중심의 산업화가 진행된다. 농사로는 생계유지가 힘들어진 농민들은 도시로 올라온다. 그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5년간 489만 3500여 명이 서울로 유입됐다. 주택과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했고, 많은 이가 산동네·철거지역 등에 무허가 판자촌을 만들어 살았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중 한 방법이 시 외곽으로 도시 빈민들을 강제 이주 시키는 거다. '광주대단지 조성사업'도 이러한 차원에서 진행됐다. 1969년 정부 계획에 의해 당시 약 12만 명이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됐다. 그러나 정작 광주엔 상하수도와 전기시설, 집 지을만한 토지조차 제대로 조성되지 않았다.

1970년 서울 각지에서 강제로 이주된 빈민들이 당시 경기도 광주 단대리(현재 성남 수정구 단대동)에 조성한 천막촌 ⓒ성남시
1970년 서울 각지에서 강제로 이주된 빈민들이 당시 경기도 광주 단대리(현재 성남 수정구 단대동)에 조성한 천막촌 ⓒ성남시

사람이 모이기만 해도 잡아가던 엄혹한 시절, 광주 이주민들은 정부가 부과한 재정적 압박에 맞서 서울시를 상대로 집회를 열고 대책위원회를 꾸려 싸웠다. 그 결과 대지 불하가격 인하, 취로사업 보장 등의 요구를 관철시킨다.
 

최 집행위원장은 “광주대단지 사건을 통해 빈곤과 도시빈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촉발됐다”면서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빈민운동의 영역으로 들어왔고 이후 전개되는 민주화 운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전했다.
 

이후 정부는 주거지 조성과 시민아파트 건설을 추진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입 인구를 수용할 수 없자 결국 도시 문제 해결을 포기한다. 1973년 제정된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이를 보여준다. 기존의 무허가 주택의 소유권을 주민이 획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최 집행위원장은 “(무허가 주택을) 일정 부분 합법화하지 않으면 저임금 노동자들이 거주할 공간이 제한된다”라며 “정부는 재개발과 무허가 지역을 묵인하면서 자본 축적의 기반인 노동력을 유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개발 욕망 속에서 삶을 지켜 온 철거민들 

1970년대까지 빈민들은 정부의 강제적인 정책 집행 혹은 방임으로 고통받았다면, 1980년부터는 토지를 재산 축적 수단으로 삼는 이들에 의해 삶터에서 쫓겨났다. 최인기 집행위원장에 따르면 1970년대 국가 주도 ‘공영재개발’ 형식은 1982년 전두환 정권 때 민간 주체들이 합세한 ‘합동재개발’ 방식으로 바뀌었다. 철거구역에 ‘용역 깡패’가 동원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이 시기, 철거에 맞서 서울 양천구 목동, 동작구 사당동, 노원구 상계동 등 서울 각 지역에서 철거민들의 대대적인 투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가난한 사람이 쫓겨나는 근본적 원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노원구 상계동에 걸린 “가난한 사람은 인권도 보장 없나”라는 현수막을 통해 잘 드러난다. 최 집행위원장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도시재개발을 전면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했고, 상계동 철거민 투쟁은 6월 민주화 항쟁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비마이너가 주최한 기획강좌 ‘국정교과서에는 없는 빈곤과 차별의 현대사 이야기’ 두 번째, 최인기 빈민해방실천연대 집행위원장이 도시 빈곤의 역사와 그에 맞서 싸웠던 싸움의 주체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비마이너가 주최한 기획강좌 ‘국정교과서에는 없는 빈곤과 차별의 현대사 이야기’ 두 번째, 최인기 빈민해방실천연대 집행위원장이 도시 빈곤의 역사와 그에 맞서 싸웠던 싸움의 주체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도시환경 정화 명목으로 일터 잃은 노점상, 죽음으로 대항하다 

1980년대 말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기, 고도성장에 대한 성과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 등 국제대회가 열린다. 정부는 도시환경 정화를 명목으로 노점상에 대한 단속을 강행한다. 이에 노점상들은 단체를 결성하고 정부와 맞서 싸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노점상 이재식·최정환 열사의 분신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정부는 대책을 제시했지만 실제 노점상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1995년 겨울, 인천 연수구 아암도에서 노점상 이덕인 열사가 의문사 당한다. 추운 겨울 강제 철거에 맞서 망루를 세워 투쟁하던 그가 온몸에 피멍이 들고 두 손이 밧줄에 포박당한 채 아암도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다. 
 

이덕인 열사의 죽음으로 인천 지역에서는 노점상을 중심으로 한 큰 투쟁이 전개되고 이는 주류언론에도 포착된다. 최 집행위원장은 “살아보고자 싸웠던 이들의 죽음이 사회운동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몰리는 삶, 빈곤 운동 드러내야 

1997년 외환위기로 빈곤문제가 심각해지면서 2000년대 초 ‘국민기초생활보장법’(아래 기초법)이 시행된다. 그러나 ‘국가가 가난한 이의 기초생활을 책임진다’는 법의 취지와 달리 실제로는 엄격한 수급권 자격으로 실효성은 떨어졌다.
 

이러한 정책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 바로 최옥란 열사의 싸움이었다. 당시 수급비는 26만 원. 그녀가 아이와 함께 한달 생계를 꾸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그래서 그녀는 노점상을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노점에서 발생한 수입 때문에 그녀는 수급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에 그녀는 기초법에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며 한겨울에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그러나 수급권은 끝내 박탈당하고 아들 양육권마저 빼앗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그녀는 2002년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 시기는 정리해고와 실업으로 밀려난 이들이 사회보장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노점상으로 대거 유입된 때였다. 그리고 청계천 주변은 이러한 노점상들의 삶터였다. 하지만 이곳마저 ‘청계천을 복원하겠다’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한 마디로 위기에 처한다.

2003년 서울시 청계천 복원 공사에 반대하는 노점상들의 행진 ⓒ최인기
2003년 서울시 청계천 복원 공사에 반대하는 노점상들의 행진 ⓒ최인기

수많은 노점상이 저항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서울시는 노점상의 생존권을 보장하겠다며 동대문운동장에 이주단지를 마련한다. 그러나 이조차도 2006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파크를 세운다는 계획으로 무산됐다. 지금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동대문운동장, 송파 문정동 가든파이브로 뿔뿔이 흩어졌고 그곳에서조차 터를 잡지 못한 이들은 지금도 어딘가로 계속 밀려나고 있다.
 

최 집행위원장은 “이는 도시의 역사성과 공간적 특성을 무시하면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도시 그 자체를 짓밟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천문학적 혈세를 들여 지은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건물의 본질은 동대문운동장에서의 추억과 삶의 터전을 없애는 ‘개발 논리의 허황됨’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최근 가난의 아픔이 서려 있는 달동네는 ‘낭만’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하나의 상품으로 팔린다. 한때 철거 대상이던 종로구 이화동은 벽화마을로 유명해졌다. 최 집행위원장은 “사람들이 힘들게 생활하고 있는 곳에서 누군가는 '낭만'을 느낀다”면서 “그러나 가난이란 드러내서 싸우고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삶터에서 쫓겨나는 빈민들의 역사를 돌아본 최 집행위원장은 “과연 희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그 답으로 삶터를 지키기 위한 빈곤 운동에 주목한다. 이 운동은 장애인과 빈민을 비롯한 살아있는 이들이 '여기'에서 살아갈 공간을 마련하는 과정이었다. 최 집행위원장은 그들의 삶을 '투쟁'으로 드러내는 관점을 관철하는 것이 오늘날의 도시문제를 다루고 바라보는데 가져야 할 태도라고 강조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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