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진압 문제제기부터 광화문 농성장 방문까지
"연대는 사회복지사의 소명...이것은 '나'의 문제입니다"

지난 27일, 세계사회복지대회 개회식에서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를 외치며 기습시위를 하던 참가자가 휠체어에서 분리된 채 끌려나가는 모습.
지난 27일, 세계사회복지대회 개회식에서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를 외치며 기습시위를 하던 참가자가 휠체어에서 분리된 채 끌려나가는 모습.

'세계 사회복지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2016년 세계사회복지대회 개회식이 열린, 27일 서울 코엑스 오디토리움홀. 이곳에서 정진엽 보건복지부 장관이 축사를 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그 순간, 두 명의 비장애 여성이 무대 위로 뛰어올랐고, 휠체어를 탄 한 장애여성이 경사로를 따라 정 장관의 바로 뒤에서 무대에 따라 올라갔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공동행동(아래 공동행동)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지난 4년간 외쳐왔던,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이행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복지부 장관과 행사 진행요원들은 이 장면이 수많은 외국인 앞에서 국제적 망신을 당하는 것으로 여겼는지, 이들의 사지를 들어 행사장 밖으로 황급히 '치워'버렸다. 개막식을 진행하던 아나운서도 해외 참가자들에게 행사가 지연되어 죄송하다고 거듭 조아리며, 이들의 행동을 단순한 '컴플레인'이라고 규정지었다. 
 
그 장애여성은 휠체어에서 분리된 채 '개처럼' 끌려나갔고, 복도에 누워 오열했다. 장애인의 목소리를 단순한 '컴플레인', 아니 '소음'으로 처리하는 '세계사회복지대회'에 절망했다. 행사장 문 바깥, 맨 등이 닿은 복도바닥은 서럽게 차가웠다.
 
그런데 그날 밤, 공동행동 측으로 한 영국인이 연락을 해왔다. 자신을 '레아 마글라질릭(Rea Maglajlic)'라고 소개한 그녀는 사회복지행동네트워크(Social Work Action Network) 활동가이자 사회복지 강사다. 개회식에서의 일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동료가 찍어 인터넷에 올린 동영상을 봤다고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개하며, 당신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려질 수 있도록, 동료들을 조직해서 자리를 만들겠다고 했다. '문 안'에서 들려온 연대의 신호였다.
 
그리고 하룻밤 만에, 그는 다른 동료들에게 행동을 독려했다. 극적인 시위 이후 장애인이 무자비하게 끌려나가는 것을 보긴 했지만, 대체 무슨 이유로 그들이 기습시위를 했던 건지 아무런 정보를 받지 못해(정진엽 장관은 시위자들이 끌려나간 이후 그들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이 축사를 마쳤다.) 어리둥절해 있던 사람들에게, 레아는 시위자들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폭력적 시위 진압에 대한 주최 측의 사과와 복지부 장관과 시위자들의 면담, 그리고 향후 세계사회복지대회에 반드시 서비스 이용자 단체도 참여하도록 하라는 요구를 담은 공개 서신을 돌렸다. 무엇보다, 그는 시위자들과 함께 분노했다.
 
그의 연대와 행동은 놀라운 결실을 맺었다. 장애인들을 쫓아낸 후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린 것이다. 만신창이로 쫓겨난 지 불과 24시간 후, 그들은 다시 그 자리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대회 참가자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들은 이제 문밖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 있었다. 레아는 이 기자회견에서 연대발언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회복지서비스 이용자인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 끌려나갔던 곳이 바로 ‘세계사회복지대회’였다는 점이 가장 충격적입니다”
 
연대발언을 마친 그는 기습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뜨겁게 안았다.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세계 사회복지 관계자들은 박수를 치며 ‘연대(Solidarity)'를 외쳤다.
 
레아의 연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동행동이 4년째 농성하고 있는 광화문 지하 농성장에 직접 방문했다. 영국사회복지사협회(The British Association of Social Workers, BASW) 의장인 가이 셰넌(Guy Shennan)과 최고대표자 루스 알렌(Ruth Allen)이 동행했다.
광화문 농성장을 방문한 레아 마글라질릭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광화문 농성장을 방문한 레아 마글라질릭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그들은 장애인들이 일궈온 변화와 여전히 바뀌지 않은 현실을 때로는 감탄하며, 때로는 얼굴 찌푸리며 들었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왜 그때부터였는지, 정부는 대체 왜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지,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힘든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 처음 광화문 농성장이 생겼을 때 대선후보들이 다녀가고,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도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루스는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가 한국정부에 권고한 사항을 아직도 지키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끈질기게, 그리고 강력하게 요구를 하고 있는데도 장관 한 번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 놀랍다”고 말했다. 가이는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예산 싸움이라는 한국 활동가들의 말에 동의하며, 복지 예산 축소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현재 영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복지예산이 대대적으로 삭감되고, 훌륭하다고 믿었던 법안들이 실제로는 서비스 이용자 범위를 축소하고, 예산을 줄이는 방식으로만 이행되고 있지요.”
 
세계적 경기 침체 상황에서, 국가가 가장 손쉽게 잘라낼 수 있는 선택지가 장애인과 빈자, 한 부모 가정, 이민자라는 점은 모든 국가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영국에서도 장애인 단체들은 격렬하게 시위한다. 그들은 동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 영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장애인 당사자 단체 중 하나인 DPAC(Disabled People Against Cuts,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장애인 단체)이 영국 의회에 들어가 격렬하게 시위하는 장면이다.  DPAC은 도로를 점거하기도 한다. 영국의 유명한 빨간 이층버스들이 주르륵, 줄지어 서 있다. 한국에서도 자주 보던 장면이다. 투쟁의 방식이 굉장히 닮아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 주변에 간간이 보이는 경찰들이 ‘전투복’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과 그 숫자도 매우 적다는 것 정도다.
 
“당신들의 싸움은 영국에서 싸우고 있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큰 울림(inspiration)이 될 거예요. 복지 축소로 위기를 넘겨보려는 전 세계적 흐름에서, 국경을 넘어서는 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4월, 영국 사회복지 종사자와 이용자들 단체가 연합하여 정부의 복지 축소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모습. ⓒBASW
지난 4월, 영국 사회복지 종사자와 이용자들 단체가 연합하여 정부의 복지 축소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모습. ⓒBASW
 
왜 이렇게까지 ‘행동’했는지 물었을 때, 레아는 웃으며 “그것이 내 일(my issue)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국에서는 사회복지 종사자와 이용자 간 연대의 역사가 있다. 레아가 활동하고 있는 사회복지행동네트워크(Social Work Action Network, SWAN)에는 사회복지사는 물론,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학생과 교수,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복지 서비스 이용자들이 함께 복지 현안에 대해 투쟁을 하고 있다.
 
“장애인 등 사회복지 서비스 이용자들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이 일은 내 일’이라는 태도야말로 사회복지 종사자들의 기본적 소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들이 도로를 막고, 육교에 매달리고, 단식을 하고, 폭력적 진압을 감수하고서도 행사장에 뛰어드는 이유는 자기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 사회복지 종사자들이 당연히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레아는 바로 이 점에서 세계사회복지대회의 맹점을 꼬집었다. 종사자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런 대회가 있다면, 공동행동이나 장애인단체들이 당연히 초대되었어야 해요.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를 사전에 들었어야죠. 사회복지 종사자들이 이용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해결책을 함께 논의해야 하지 않나요? 이용자는 쏙 빠진 대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대회가 아닌 거예요.”
 
광화문공동행동 활동가인 명학 씨와 재우 씨가 입고 있던 공동행동 조끼를 벗었다. 빈곤과 절망의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자는 의미의 분홍종이배가 수놓아진 조끼와, 지난여름 95일간 출·퇴근길 도로를 점거하며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를 절규했을 때 입었던 그린라이트 조끼. 레아와 가이는 그 자리에서 조끼를 하나씩 나눠 입었다. “영국에 돌아가서 투쟁할 때 꼭 입을게요.”
 
물론,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연대했다고 해서 한국 상황에 극적인 변화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4년간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듣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공동행동 활동가들에게, 레아 씨와 그의 동료들이 보여준 연대는 큰 힘이 되었다. 활동가들은 대회 개회식에서 쫓겨났을 때도, 레아가 굳은 연대를 약속했을 때도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말을 하면서도 얼굴 너머에 넘실대는 힘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지금까지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났어야만 했던 이 사람들에게, ‘당신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라며 내민 이 연대의 손길을 맞잡은 것은 분명 ‘싸울 맛 나는’ 경험이 되었다. 그들은 다음에 또 어떤 절망의 모퉁이에서 이 손길을 만나게 될까.
 
광화문공동행동 조끼와 그린라이트 조끼를 입은 레아와 가이, 그리고 루스가 한국 활동가들과 함께 광화문 농성장에서 연대를 외쳤다.
광화문공동행동 조끼와 그린라이트 조끼를 입은 레아와 가이, 그리고 루스가 한국 활동가들과 함께 광화문 농성장에서 연대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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