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유기훈의 의학이 장애학에 건네는 화해
장애화하는 시선과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2020년 6월 26일 서울시 권리중심형 공공일자리에서 노동하기를 원하는 중증장애인들이 면접을 보고 있다. 사진 김필순
2020년 6월 26일 서울시 권리중심형 공공일자리에서 노동하기를 원하는 중증장애인들이 면접을 보고 있다. 사진 김필순

- 내 안의 ‘등급화된’ 시선

대학병원 정신과 병동에서 일하며, 퇴원하는 장애 당사자분들에게 직업재활 프로그램을 연계해드리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긴 입원 끝의 퇴원, 그 이후에 돌아갈 ‘집’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사회관계의 단절과 경제적 빈곤을 마주한 당사자에게는 ‘일터’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원을 앞둔 당사자들의 취업을 상상하는 순간, 내 안의 은밀한 차별적 잣대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분은 환청 때문에 30분에 한 번씩은 바깥 공기를 쐬셔야 하는 분인데…”, “저분은 며칠에 한 번은 증상이 안 좋아져서 쉬어야 할 텐데…”, “언어장애로 다른 사람과 길게 이야기가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분은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데….”

이처럼 수많은 ‘증상’들 앞에서 장애 당사자의 취업연계를 머뭇거리는 이면에는, 결국 “이 사람이 정말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무수한 의구심이 자리하고 있다.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을 가로지르는 사회의 견고한 구분선은 내 안에도 깊숙이 새겨져 있으며, 그렇기에 언뜻 이타적으로 보이는 ‘퇴원 후 취업연계’의 과정은, 무수한 장애화하는(disabling) 시선들로 장애 당사자를 재단한다.

차별적 시선을 내면화해왔던 내게 ‘노동’은 변하는 것이 아니었고 ‘손상’ 혹은 ‘증상’만이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고정된 ‘노동’에 맞추어 손상, 증상을 바꾸어내는 것이었다. 노동을 할 수 있으려면 A씨의 증상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을까. 약물을 어떻게 바꾸면 B씨가 ‘정상적’으로 일터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인가. 노동의 틀에 어떻게 장애인의 몸과 마음을 맞추어낼 것인가.

이미 내 안에는 무수한 등급이 정해져 있었고, 마치 좌푯값을 넣으면 결과가 산출되는 기계처럼, 증상과 손상을 투입하면 자동으로 나는 ‘일할 수 있는 사람, 어쩌면 일할 수 있는 사람, 일할 수 없는 사람’의 등급을 매겨내곤 했다. 기계의 충실한 작동부품으로서 내가 했던 일은, ‘일할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든 ‘어쩌면 가능한 사람’으로, ‘어쩌면 가능한 사람’을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한 등급 올리려는 몸부림이었다. 이렇게, ‘장애등급제’는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때로는 “이 손상과 증상으로는 결코 노동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그럴 때는 장애 당사자와 가족에게 조심스럽게 당장 취업은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하곤 하였다.

처음부터 ‘장애’라는 범주가 부랑인 집단으로부터 “일할 수 없는(unable to work)” 몸을 “딱 보면 알 수 있는(tell by looking)” 기준으로 구분해내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던 것처럼,1) 어쩌면 나는 ‘취업연계 서비스’ 앞에서 마치 19세기 구빈원의 관료처럼 특정한 사람들을 ‘장애인(disabled person)’으로 선포하는 작업을 반복해왔던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나의 행위는, 국경을 건너려는 수천 명의 이민자들 중 “결함 있고,”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장애인’으로 분류해 추방시켰던 1900년대 미국 이민국 관료들의 계보에,2) 활동지원 여부를 심사하기 위해 당사자와 가족의 삶을 “쿡쿡 찔러보는” 오늘날 한국 복지행정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르리라.3)

- ‘권리중심 / 중증장애인 맞춤형 / 공공일자리’

이처럼 손상과 증상을 ‘약’과 ‘훈련’으로 변화시켜 ‘노동할 수 있는 몸(able-bodied)’으로 거듭날 것을 요청해왔던 내게, 2020년 노들장애인야학의 여러 중중장애 당사자들이 ‘취업했다’는 소식은 큰 놀라움이었다.

취업을 연계한 제도의 이름은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였다. ‘공공일자리’라는 명칭이 들어간 것은 일견 이해가 갔지만, ‘권리중심’과 ‘중증장애인 맞춤형’이라는 단어는 쉬이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 출발점부터 ‘노동할 수 없는 몸’으로 배제된 중증장애인에게 노동을 ‘맞춘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단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권리중심’ 일자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활동가는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이를 풀어서 설명하였다. 산 넘어 산이었다. 권리를 생산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취업한 중증장애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활동들을 목격하며, ‘권리를 생산한다’는 낯선 개념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2020년 12월 24일,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 취업박람회-이것도 노동이다’가 열렸다. 사진 허현덕
2020년 12월 24일,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 취업박람회-이것도 노동이다’가 열렸다. 사진 허현덕

- ‘권리중심 노동’ 의 세 가지 방식들

① (충족되지 못했던) 권리의 실현을 ‘촉진하는’ 노동

우선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4)

첫 번째인 ‘장애인 권익옹호 직무’는 편의시설에 대한 장애인 접근성 모니터링과 현장 캠페인 등이 포함되며, 두 번째인 ‘장애인 인식개선 직무’에는 장애인 인식개선 강의에서의 강사업무 등이 포함된다. 이는 이제까지 권리로 명명되었으나 충족되지 못했던 ‘미충족 권리’들의 실현을 촉진하는 노동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이는 우리가 이제까지 ‘시민운동가’ 혹은 ‘활동가’라고 칭해왔던 사람들이 해왔던 노동에 해당한다. 외면된 권리의 회복을 촉진하는 노동으로서 중증장애인의 노동은, 모든 중증장애인에게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첫 번째 측면을 갖는다.

② (충족되지 못했던) 권리를 ‘실현하는’ 노동

그러나, 이러한 ‘활동가’로서의 측면이 ‘권리를 생산한다’는 단어를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의 혁신성은, 노동의 ‘내용’에 집중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노동 자체가 ‘행해지고 있다’는 노동의 ‘실현’에 주목할 때에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장애인의 경우 15세 이상 생산가능 인구 중 약 3분의 2가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어 있으며, 나머지 3분의 1 인구만을 대상으로 실업률을 계산한다. 이처럼 현대국가는 ‘노동할 수 없는 몸’으로서의 장애인(disabled people)을 미리 정의해놓고서, 처음부터 이 집단을 ‘노동할 수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장애화하는 국가의 규칙을 넘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서는 중증장애인이 ‘노동하고 있다.’ 그동안의 논리에 따르면 일견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이러한 노동의 현장은, 그동안 노동권의 비적용지대였던, ‘(노동할) 권리를 가질 권리’를 박탈당한 중증장애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는’ 노동이기도 하다. 이처럼 권리중심 노동은, 중증장애 당사자들이 ‘활동가’로서 일한다는 그 ‘내용’에서의 측면에 더하여, 노동에 대한 권리를 ‘실현한다/생산한다’는 두 번째 차원의 의미 또한 중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③ (권리라 생각되지 않았던) 권리를 ‘밝히고 확장하는’ 노동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권리와 관계 맺는 마지막 방식은, 통용된 ‘노동’이라는 개념 자체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노동에 대한 권리’를 생산해낸다는 점에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차별적 시선을 내면화해왔던 나와 이 사회에서 ‘노동’은 변하는 것이 아니었고 ‘손상’ 혹은 ‘증상’만이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중증장애인들은 언제나 고정된 ‘노동’에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맞추어 왔다.

그러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손상과 증상을 노동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란 개념 자체가 중증장애 당사자에 맞추어 바뀔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것도 노동이다”라는 슬로건처럼5), 손상과 증상, 당사자의 ‘몸’이 먼저 존재하고 그 위에 노동이 새롭게 발명된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세 번째 직군인 ‘문화예술 직무’는 노동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동안 ‘가치’의 생산자 혹은 ‘가치’의 실현자로서의 지위에서 배제되었던 중증장애인들이 노래, 춤, 작품 속에서 행위를 통해 가치를 생산/실현한다. 그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는 순간, 그리고 그 가치의 창조행위를 ‘노동’이라 명명하는 순간, 노동이 생산되고, 그 노동에 대한 권리가 생산된다.

즉,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서의 노동은, ‘노동의 개념 그 자체를 바꾸는 노동’이다. 노동의 개념이 ‘노동(A)’에서 ‘노동(A+B)’로 확장됨으로써 ‘노동에 대한 권리(A)’ 또한 ‘노동에 대한 권리(A+B)’로 새롭게 탄생하고, 이로써 권리의 확장과 생산이 이뤄진다. 그리고 이렇게 밝혀진 새로운 권리의 영토 위에서, 새로운 노동의 가능성이 다시 출발하며 권리는 조금씩 그 외연을 넓히게 된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의 활동. 장애인권리옹호 직무인 저상버스 인식 개선 캠페인(2020년 10월 김흥구 작가, 왼쪽), 장애인권익옹호 직무인 공원에 홍보물을 설치하여 UN장애인권리협약을 알리는 활동(2020년 10월 정택용 작가, 오른쪽). 사진 ‘이것도 노동이다’ 사진집 캡처 편집.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의 활동. 장애인권리옹호 직무인 저상버스 인식 개선 캠페인(2020년 10월 김흥구 작가, 왼쪽), 장애인권익옹호 직무인 공원에 홍보물을 설치하여 UN장애인권리협약을 알리는 활동(2020년 10월 정택용 작가, 오른쪽). 사진 ‘이것도 노동이다’ 사진집 캡처 편집.

- 노동 (불)가능한 몸을 넘어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퇴원 후의 취업연계를 시행할 내게,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새로운 시도는 너무나 반갑지만 동시에 절망적이다. 지난 2020년, 전국에서 모집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대상자는 단 260명이며, 전국에서 서울이 유일했다. 그 극소수의 인원 바깥의 수많은 중증장애 당사자들은 다시 노동에 스스로의 손상과 증상을 어떻게든 ‘끼워 맞추거나,’ 노동 바깥의 영역에서 배제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한다.

그리고 병원 노동자인 나 또한 장애 당사자들이 ‘정상적’ 노동에 몸과 마음을 잘 끼워 맞출 수 있도록 약과 치료를 이어나갈 것이다. 사회구조가 비장애 중심적 노동시장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의료인으로서의 나의 실천 또한 장애 차별적인 테두리 바깥을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노들야학의 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확대를 원한다. 새로운 노동을, 중증장애인의 노동을 원하며, 이로써 새로운 권리가 태동하고, 중증장애인이 새로운 권리의 주체가 되는 세상을 꿈꾼다. 노동과 권리가 새롭게 탄생한 세상에서는, 많은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의료 또한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다. 정해진 노동에 손상과 증상을 맞추어가는 의료가 아닌, 손상과 증상에 맞춘 새로운 노동이 탄생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의료가 태동하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새로운 의료 또한 생산해내는 것일지 모른다. 그것을 ‘권리중심 의료’라 명명할 수 있다면, 나는 ‘권리중심 의료인’이 되는 날을 기쁘게 기다리고 싶다.

*              *              *

1) Stone, Deborah A., 『The disabled state』, Temple University Press, 1986, 29~41쪽.

2) 킴 닐슨, 『장애의 역사』, 김승섭 역, 동아시아 출판사, 2020, 209쪽.

3) 장혜영, 『어른이 되면』, 시월 출판사, 2018, 7쪽.

4)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의 유형은 첫째, 장애인 권익옹호 직무, 둘째, 장애인 인식개선 직무, 셋째, 문화예술 직무로 나뉜다.

5)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협업단, ‘이것도 노동이다 : 노동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2020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취업박람회 자료집

필자 소개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 공학, 인류학, 의학 등을 떠돌다가 노들야학에 입성하였다. 야학과 병원의 언저리에 머물며, 억압하는 의학이 아닌 위로하는 의학을 꿈꾸고 있다. 노들야학 바로 앞에 사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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