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살아있는 게 제일 잘한 일 _ 박길연 ⑤

《 박길연 _ 살아있는 게 제일 잘한 일 》

① 그렇게 아파본 건 처음이었어
② 신비한 꿈
③ 생의 욕구가 둑을 넘어
④ 탈시설, 삶을 구하는 탈출
⑤ 살아있는 게 제일 잘한 일

- 죽음이 가르쳐준 것들

하지만 막상 나오면 너무 괴롭죠. 사람은 밥때 되면 밥 먹어야 하고 볼일 보고 싶으면 봐야 하니까요. 갇혀있을 땐 무조건 나오고 싶어서 다 참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막상 부딪치면 너무 힘들죠. 위험한 상황들도 계속 생겨요. 전선에 갑자기 스파크가 튄다던가, 병에 걸린다던가.

2018년에 돌아가신 권오진 씨는 2011년에 내가 직접 데리고 나왔어요. 20대에 뺑소니 차에 치여서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되었고 꽃동네에서 10년을 살았어요. 오진 씨는 욕창이 심한 사람이라 체위변경을 자주 해주고 대소변을 빨리 처치해주는 일이 아주 중요했어요. 좌약을 넣은 후 몇 시간 안에 조치를 취해주지 않으면 욕창이 있는 사람은 위험하거든요. 우리가 계속 활동지원서비스를 요구해서 인천시 최초로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를 받게 됐어요. 오진 씨가 너무 좋아했어요. 몸이 편해지니까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얼굴에 생기도 돌았어요.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고 싶다면서 장애인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했어요. 그런데 박근혜 정부 때 24시간 지원이 중단되어서 하루 14시간 밖에 못 받았어요. 그때부터 잠도 잘 못 자고 서서히 입맛도 없어지면서 살이 점점 빠지더라고요. 나중에 욕창이 온몸에 퍼져서 입원을 했어요. 그런데 간병도 24시간 받을 수가 없거든요. 병원을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거예요. 결국 병을 더 키워서 응급실에 실려 가고 나중엔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에 들어갔어요. 시설에서 나왔는데 또 시설에 들어간 거죠. 거기서 패혈증으로 갑자기 사망하셨어요. 사실 시설에 있을 때부터 오진 씨는 폐가 안 좋았어요. 나가면 1년 안에 죽는다고 할 정도였는데도 오진 씨가 꼭 나오고 싶어 했죠. 죽기 일주일 전에 병문안 가서 만났었어요. 오진 씨가 계속 집에 가고 싶다고 했고 내가 열심히 싸워서 24시간 활동보조서비스 꼭 다시 받아내자고 했는데…. 우리가 지켜주지 못했어요.

2018년 8월 8일에 열린 고 권오진 활동가의 49재 추모제. 영정 속 고인은 420 투쟁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18년 8월 8일에 열린 고 권오진 활동가의 49재 추모제. 영정 속 고인은 420 투쟁 손피켓을 들고 있다.

얼마 전(2020년 2월)에 한민희가 세상을 떠났어요. 안 울어야지, 안 울어야지. (울먹임) 민희 씨는 스물다섯 살이었어요. 우리와 함께 보낸 시간도 2년이 안 됐어요. 갓난아이 때 버려져서 평생 시설에 살다가 나왔어요. 체구가 120cm로 아주 작았어요. 신장장애가 있어서 6시간에 한 번씩 스스로 투석을 해야 했어요. 성인이 되어서 자립을 하고 싶어 했는데 다른 센터에선 안 받아줬대요. 투석해야 한다고 하니까 위험하게 느껴졌겠죠. 민희 씨는 자존심이 강하고 좀 까칠했어요. 그런데 죽기 얼마 전부터 좀 외로웠는지 사무실에 자주 찾아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유품을 정리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유품 대부분이 의료기구였어요. 4개월 동안 입은 옷이 먹는 약보다 적었어요. 약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어요.

사망 후에 의사로부터 들어서 안 거지만 민희 씨 같은 장애는 보통 10년, 잘해야 20년을 살 수 있고 급사할 위험이 크대요. 우린 몰랐어요. 민희 씨를 지원하던 담당자가 병원에 같이 가자고 한 적이 있었는데 눈물을 보일 정도로 싫어하더래요. 우리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센터에서 이것저것 배워보자고 제안하면 “어차피 죽을 건데 뭐” 그렇게 툭 한마디씩 했었대요. 그러면서도 나중에 자기만의 집을 구할 거라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어요. 한 줄기 실낱같은 희망을 잡고서 의사가 시키는 대로 혼자 혈압 체크하고 투석하면서요. 죽고 난 뒤에 보니까 통장에 천만 원 넘는 돈이 있었어요. 그렇게 아끼면서 모은 돈인데 무연고자라서 전부 국가로 귀속되었어요. 장례비조차 우리가 따로 모금해서 마련했어요. 시설 살 때 친구들은 코로나 때문에 장례식장에 와보지도 못했어요. 살아서도 외로웠는데 세상 떠날 때도 너무 외로웠어요.

민희 씨가 시설 나와서 2년도 못 산 게 너무 슬프고 화나요. 또 한 번 나에게 숙제를 주었어요.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침을 줘요. 그런 삶들이 그들에겐 아픔인데 나한테는 살아야 할 목적이 돼요. 내가 집안에서만 살았을 때 우리 가족들한테 항상 그랬어요. “나 괜찮아. 괜찮아.” 진심이었어요. 그런 삶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참 힘들었거든요. 욕구는 계속 있었어요. TV 보면서 유행하는 화장을 해보기도 하고 유행하는 옷도 사 입어보고 매니큐어도 이것저것 칠해보고요. 가끔씩 창문 열고 바깥을 쳐다보면 사람들 웃는 소리가 들렸어요. 저 속에 포함되고 싶다는 생각을 언제나 했어요. 나는 창밖이라도 바라볼 수 있었는데, 누군가는 그것도 못 하잖아요. 갇혀있으면 지나가는 자동차 한 대, 어떤 사람들이 무슨 말하면서 걸어가는지 그런 사소한 것까지도 다 궁금하고 중요해져요.

댄스발표회를 앞둔 한민희 씨(가운데)를 응원하며. 왼쪽은 박길연 민들레장애인야학 교장, 오른쪽은 전혜정 활동가. 사진 제공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댄스발표회를 앞둔 한민희 씨(가운데)를 응원하며. 왼쪽은 박길연 민들레장애인야학 교장, 오른쪽은 전혜정 활동가. 사진 제공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시설엔 자유가 없다고, 그들을 시설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시설에서 장애인들을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느냐고 해요.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자유를 뺏는 건 교도소가 하는 일이잖아요. 감옥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죗값을 치르는 곳인데 장애인들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잖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고 있다는 거예요. 장애의 몸을 갖고 있으면 그런 욕구를 갖는 것마저도 호사스럽다고 말하는데 절대 아니에요. 그들의 욕구가 오히려 비장애인보다 더 강할 수 있어요.

활동하다 보면 힘들 때가 있어요. 이런 죽음을 겪으면 막 분노가 생겨서 다시 열심히 하게 돼요. 나는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지치기라도 하는구나. 그러니까 지칠 수가 없어요. “살아있는 자여, 조직하라.” 그 말 좋아해요. 사람인지라 힘들면 지치고, 지치면 도망갈 구멍을 찾게 돼요. 그런 면에서 박경석 대표님 참 대단하다고 느껴요. 누구보다 지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건 어쩌면 그에겐 동지들의 죽음이 더 아프게 다가와서가 아닐까. 더 아파서 더 길게 가는 게 아닐까.

- 통증

류마티스 관절염이 있는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날 때가 정말 힘들어요. 밤새 뻣뻣해진 관절을 억지로 움직이려니까 너무 아파서 눈물 콧물 다 짜면서 일어나요. 아침 11시에 서울에서 하는 기자회견에 가려면 새벽부터 일어나야 하는데 우리처럼 관절 없는 사람들은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아예 잠을 안 자고 밤을 새요. 밤새 몸을 움직여주는 거죠. 잠을 못 자면 물론 피곤하긴 하지만 차라리 그편이 나아요. 뼈와 뼈 사이를 채우고 있는 관절이 없어지면 뼈의 끝이 뾰족한데 그것들끼리 서로 부딪치다가 나중엔 붙어버려. 경남지역에 연대하러 가서 경찰하고 싸우다가 팔을 꺾였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관절이 꺾이면 다시 돌아오질 못해요. 오른쪽 손목이 그때 굳어서 굽혀지지 않아요. 왼쪽 팔은 2018년에 오체투지 투쟁하면서 아스팔트 위를 기어갔을 때 완전히 작살 나 버렸어요. 기어가려면 어깨 힘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어깨가 전혀 힘을 쓸 수가 없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기어보려고 용을 쓰다가 더 안 좋아졌어요.

2018년 4월 19일, 장애인활동가 77명이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광화문사거리에서 효자동 입구까지 2시간 30분 동안 오체투지 투쟁을 벌였다. 오체투지 도중 박길연 대표가 쉬고 있다. 
2018년 4월 19일, 장애인활동가 77명이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광화문사거리에서 효자동 입구까지 2시간 30분 동안 오체투지 투쟁을 벌였다. 오체투지 도중 박길연 대표가 쉬고 있다. 

그래도 후회 안 해요. 차라리 안 가면 몰라도 일단 가서 내 눈으로 보면 안 돼요. 여기서 죽더라도 싸워야 된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웃음) 2015년에 시설에서 맞아서 사망한 이재진 씨 장례 투쟁할 때 너무 힘들었는데 그때 염증이 잇몸까지 올라왔어요. 그 후부터는 좀 무리했다 싶으면 잇몸부터 퉁퉁 부어올라요. 잇몸 염증은 자칫하면 뇌로 퍼질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한 거예요. 재작년에 죽을 고비도 한 번 넘겼어요. 그때 우리 언니가 자기 딸한테 이모 건강식품 사 먹어야 한다고 돈을 부탁해서 천만 원을 보내줬어요. 조카가 서른한 살이고 결혼 앞두고 있는데 이모 아프면 안 된다고 집 담보로 대출받은 거예요. 그 돈으로 식품 사 먹고 간신히 가라앉았어요.

지금은 치아가 다 흔들려서 이를 다 빼고 틀니는 해야 하는 상황인데 너무 큰 일이라 아직 엄두를 못 내고 있어요. 잇몸에 염증이 심해지면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힘들어요. 마이크를 잡으면 목소리가 무의식적으로 커지는데 그러면 혀가 이를 더 세게 치니까 너무 아파요. 그래서 요즘엔 집회에서 웬만하면 발언 안 해요. 또 솔직하게 말하자면 치아 사이가 벌어진 걸 보이고 싶지 않아요. 꼭 창자를 내보이는 것처럼 싫어요. 내가 여기까진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걸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다닐 수가 없잖아요. 작년에 집회를 하는데 어떤 활동가가 발언을 요청했어요. 치아 때문에 못 하겠다고 했더니 그 동지가 내가 자꾸 핑계를 댄다는 식으로 “또 치아 때문이래!” 툴툴거리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너무 마음이 상해서 다 때려치워 버리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하…. 내가 통증을 참는 건 미련할 만큼 독종이에요. 잇몸이 일어서면 바람만 스쳐도 아파요. 통증이 잇몸에서 귀로, 뇌 쪽으로 더 올라가면 뭐랄까 톱으로 써는 느낌이에요. 너무 아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먹으로 벽을 쳤다가 땅바닥을 박박 긁었다가 해요. 그런데 그런 걸 동지들한테도 이해받지 못하면 외롭고 화도 나죠.

몸에 대한 건 남이 모르는 게 당연해요. 그건 장애인끼리도 모르고 같이 사는 사람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몸이라는 게 뼈와 관절, 근육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게 어떤 정도로 손상되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관찰이 필요하고, 물어보는 게 필요해요.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이나 장애를 이유로 뭔가를 거절하거나 부탁할 땐 믿어줬으면 좋겠어요. 1박 2일 농성을 할 때 제일 힘든 건 뱃속에 가스가 차는 거예요. 집에선 누워서 다리를 올리고 흔들어주거든요. 척추를 자극해줘서 가스를 배출해야 돼요. 그런데 농성장에서 사람들 많은데 뽕, 뽕, 방귀를 뀔 수가 없잖아요. 그걸 못하면 뒷날 아침이 너무 힘들어요. 배가 막 뒤틀려요. 하지만 사람들은 잘 모르죠. 말하기도 어렵고요.

아프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요. 내가 문 닫고 들어가서 엉엉 운다 한들 누가 내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요. 내가 감당하는 수밖에 없죠. 이 아픔은 내 친구, 나의 동반자라고 생각해요. 많이 아픈 날은? 오늘 친구들 많이 왔어, 그렇게. 진통제는 안 먹어요. 불면증이 심해요. 잠자려고 누우면 통증이 슬슬 신경 쓰이기 시작해요. 그러면 더 잠이 안 오죠. 많이 자면 보통 3시간 정도 자는 것 같아요. 나 같은 장애는 몸을 자주 움직여줘야 돼요. 그건 잘 때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내 몸은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뒤척일 수 있는 그런 몸이 아니니까 의식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그러니까 더욱 잠을 못 자죠.

- 짐작과는 다른

비장애인으로 27년, 장애인으로 30년 살았어요. 변한 내 몸을 받아들이지 못한 시간이 아주 길었죠. 지금 삶에 만족해요. 비장애인으로 살았을 때는 신체적으로 자유로웠지만 오히려 나만의 세상에 갇혀 살았어요. 넓은 세상에 살았지만 그땐 세상을 몰랐어요. 장애인이 됐기 때문에 이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덕분에 세상을 넓게 볼 시야가 생겼어요. 이렇게 활동하는 거 재밌어요. 아, 이런 게 바로 사람이 사는 세상이구나, 생각해요.

2019년 민들레 봄소풍 단체 사진. 사진 제공 박길연
2019년 민들레 봄소풍 단체 사진. 사진 제공 박길연

시설에 살다 나온 사람들은 처음엔 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사람들 눈치를 보고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해요. 너무 안타까운데 어떤 때는 막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어요. 그런데 그들이 점점 변해요. 숙였던 고개를 들기 시작해요. 그 표정엔 삶이 있어요. 점점 뜨거운 태양도 볼 수 있고 자기를 보고 있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바라볼 수 있게 돼요. 눈빛이 달라져요. 그건 그 사람의 삶이 달라졌다는 거죠. 자신이 인간임을 알게 해주는 삶, 자유가 있는 삶, 최소한의 행복할 권리를 누리는 삶. 그걸 내가 알죠. (두 팔로 자기를 안아주며) “너 그때 집에서 나오길 참 잘했어!” “사람들이 몸 좀 사리라고 할 때 그러지 않았던 것도 참 잘했어!” 만약 내가 머리로 계산기를 돌리고 몸을 사렸다면 지금의 이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 내 손을 더 못 쓰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나는 계속 싸울 것 같아요. 그러면 내 삶도 달라지고 다른 사람의 삶도 달라져요.

지하철 타면 예전엔 움츠리고 고개 숙이기 바빴던 사람들이 이젠 같이 웃고 떠들어요.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나는 이상하게 사람을 굉장히 좋아해요. 이 사람들하고 같이 장난치고 노래방 가서 막 흔들고 빡세게 투쟁하고 연애 상담하면서 사는 이런 게 행복이지, 좋은 집에 혼자 앉아서 금가락지 끼고 비싼 밥 먹는 게 행복이 아니에요. 활동 초기에는 정답을 찾아서 갈피를 못 잡고 좁은 골목길을 헤매고 다녔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길들이 큰길로 모이고 좁혀지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다니기 편안해졌어요. 죽지 않고 살기를 잘했어요. 그때 끝까지 죽으려고 노력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이런 삶을 살게 되었으니까요.

만약 내가 활동을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땐, 흐응(기쁨의 콧소리), 여행 다니고 싶어요. 비장애인 시절에 굉장히 여행을 좋아했어요. 가끔 탐(애인인 문상민 활동가의 별칭)한테 나중에 우리 일 못하게 되면 여행 다니면서 살자고 했어요. 우리 차를 캠핑카로 개조해서 전국 유람을 다니고 싶어요. 커피하고 토스트를 팔면서 하루 장사하고 하루 여행하면서. 우리 둘 다 이 운동을 완전히 떠나진 못할 것 같아요. 누가 억울한 일 당했다거나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금세 욱해서 달려가겠죠. 민중가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면 그 노래가 그리워서라도 달려갈 게 뻔해요. 그래도 매일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우리에게 온다면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요. 지금은 집에서도 새벽까지 정책적인 이야기로 토론하는데 그땐 정말 연인으로서 사는 거죠.

사진 제공 박길연
문상민 활동가와 박길연 대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제공 박길연

 

살면서 제일 잘한 게 뭐냐고 물었더니 길연은 이렇게 답했다.

 살아있는 게 제일 잘한 거야.

나는 그에게 똑같은 형식의 질문을 계속하던 중이었다. 살면서 제일 힘든 게 뭐였나요. 살면서 가장 힘이 되는 사람은 누구였나요. 그가 어떤 대답을 하면 나도 그가 가리키는 쪽을 함께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추임새를 넣는 식이었다. 그러던 중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뭐냐는 질문에 이르자 그가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으면서 그 문장을 그대로 반복했기 때문에 나는 갑자기 시선 둘 곳을 잃은 기분이었다. 야학을 만든 것, 갇힌 사람들의 탈출을 도운 것, 자유를 위해 함께 투쟁한 것,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대답쯤을 상상했던 나는 눈을 꿈벅거리며 내가 무슨 질문을 한 거였더라 하고 질문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얼른 알아듣지 못하자 길연이 말했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거,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거, 그게 잘한 거라고.

사람은 갑자기 죽는 게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천천히 죽는 것인데 힘들어서 죽고 싶었던 그때 죽으려고 너무 애쓰지 않았던 게 잘한 일이라고 그가 이어서 말했다. 타인의 긴 생애를 들으면 어떤 부분은 결국 부옇게 남는다. 나는 결국 나일 뿐이어서 그를 그답게 만든 수많은 연결과 동력들을 결코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 어떤 문장이나 단어를 들으면 카메라 렌즈가 피사체를 향해 ‘삐리릭’ 하며 정확히 초점을 맞출 때처럼 부옇게 남아있던 영역이 선명해진다. 나는 이제 어떻게 그가 그가 되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라면 눈감았을 것들, 나라면 더 신중했을 것들을 그는 어떻게 그토록 가볍고 무모하게 훌쩍 뛰어넘을 수가 있는가.

그는 ‘살아있다’는 걸 감각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실제로도 길연은 인터뷰 내내 ‘살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나는 그걸 온통 예사로 들어 넘겼다가 ‘살아있는 게 제일 잘한 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야 그가 그 말을 나와는 완전히 다르게, 그러니까 그 자체의 온전한 의미로 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어떻게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온전히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나. 그런 사람이라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을 더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말할 것도 없이 길연의 그 능력은 그의 질병과 장애, 16년이라는 길고 긴 유폐의 시간 속에서 길러지고 훈련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렵다’는 길연의 말을 듣고 시설에서 나오고 싶어 하던 한 장애인이 ‘어쩔 수 없지 뭐’ 하며 체념하던 목소리를 전화 저편에서 들은 날 밤, 길연은 잠을 자지 못했다고 했다. 그 얘길 듣고 나는 그가 그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졌다. “도저히 안 되겠어. 밥을 먹어도 같이 먹고 죽을 먹어도 같이 먹자.” ‘도저히’라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쓰지. 나는 그 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는데, 나라면 “도저히 안 되겠어. 지금은 그와 함께 살 수 없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고 말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인터뷰를 하고 돌아오는 길 ‘살았다’는 말을 주문처럼 소리 내어 반복했다. 살았다, 살았다, 살았다. 그러자 그 이상한 박길연식 연결의 비밀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나에겐 아주 작게 들려서 충분히 눈감을 수 있을 정도의 어떤 소리가 길연에겐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절규처럼 울렸던 것이다. 그의 아기가 침대에 발이 끼여 살려달라고 악을 쓰며 엄마를 부르는 소리처럼 말이다. 말도 제대로 못하던 어린아이가 엄마는 자기를 구해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옆집 사는 아이의 엄마를 불렀을 때 흘렸던 피눈물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길연에게 어쩌면 그건 구원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결국 그 장애인의 손을 잡고 시설을 탈출해 나왔을 때 들려온 소리-‘휴, 살았다’-가 실은 길연 자신을 살렸던 것이라고.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 게 아니라 뒤로도 흐르고 멈춘 듯 보이지만 응축되어 어느 순간 결국 폭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구함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

2012년 8월, 중증장애인활동가들이 장애인운동 과정에서 쌓인 벌금에 대해 항의하며 노역투쟁을 결의했다. 당시 노역 투쟁에 참여한 박길연 대표의 모습.
2012년 8월, 중증장애인활동가들이 장애인운동 과정에서 쌓인 벌금에 대해 항의하며 노역투쟁을 결의했다. 당시 노역 투쟁에 참여한 박길연 대표의 모습.

그러나 살다 보면 힘들고 지치고 상처받는 데에 집중하느라 살아있음을 잊는다. 그럴 때마다 그가 살아있음을 일깨워주는 건 살고 싶어 했던 이들의 죽음이었다. 자신이 급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설에서 나온 스물여섯의 한민희, 시설을 나가면 1년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단 1년이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어 했던 권오진 같은 이들이다. 시설 안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었던 이들을 꼬드겨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박길연은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했던 게 분명했다.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그가 여러 번 힘주어 대답했기 때문이다.

“후회하지 않아. 어떻게 내가 그걸 후회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지를 결정할 권리를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며 설사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지라도 그것 또한 그들 자신의 것이지 남이 빼앗아선 안 된다는 듯이 길연은 말했다. 다만 길연은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아서 행복했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졌다고 말할 뿐이었다. 어쩌면 무수히 후회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후회 역시 소중한 권리니까.

“살면서 제일 잘한 게 뭐예요.”
“살아있는 게 제일 잘한 일이야.”

그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은 듯했지만 실은 그 모든 것을 가리켰다. 살아서 만난 모든 사람, 살아서 한 모든 일들, 내가 사랑했고 나를 배신했던 사람들, 내가 살렸고 나를 살렸던 사람들, 지키고 싶었으나 놓쳐버린 것들, 사랑한 만큼 고통받았던 순간들, 누군가의 아픔에 위로받고 누군가의 죽음이 삶의 이유가 되며 사경을 헤매던 나날 동안 얻은 죽음의 감각이 삶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는 그 모든 연결들을. 그러니까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그 모든 것을 말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 필자 소개 _ 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 [자문] 인천 민들레장애인야학 박길연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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