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세계에이즈의 날 맞이 ‘HIV 장애인정’ 대담
김도현·김승섭·김지영

여러 보고서와 논문을 계속 읽어도 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스스로도 설득되지 않는 이야기를 내 것인 마냥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HIV 감염을 장애로 인정하라’는 주장의 합리성을 제도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공부를 하다가 맞닥뜨린 어떤 목소리들이었다.

“에이즈라는 낙인에 장애라는 낙인이 하나 더 덧씌워질 뿐이다.” (2014년, PL 당사자)*

* “에이즈 환자도 장애 범주에 포함해야” 하금철 기자. 비마이너 2014.05.09

“HIV 감염인이라는 사실은 드러나지 않고, 장애인으로 지원과 보호는 받고 싶다?: 장애인으로 여겨지기는 싫지만, 장애인으로 지원은 받고 싶다는 주장을 장애운동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2021년, PL 인권 운동 내부 세미나 자료)

이 목소리들을 두고서 고심하다 20여 년 가까이 장애인운동과 PL(People Living with HIV infection, HIV 감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운동을 해온 두 사람에게 의견을 구했다.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는 “장애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고, HIV 감염을 장애로 인정하라는 주장은 장애인운동이 거둬온 사회적 진보와 장애에 대한 인식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지 않겠냐”는 의견을 전해왔다.

김지영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 대표는 장애인운동이 당사자가 중심이 되어 자신의 세계를 바꾸어 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들었던 고민을 이야기했다. 그는 “HIV 감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중심에 서서 변화를 말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 난 후, 내 경험과 역량으로는 이 주제와 관련해 한국사회에 유의미한 글을 쓸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번 대담은 내 부탁으로 시작되어, 촌음을 아끼며 살아가는 두 분이 내어준 마음이 모아 만들어졌다. 대담은 지난 25일 온라인 줌으로 1시간 30분가량 진행됐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줌 화면 캡처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줌 화면 캡처 

이야기를 시작하며 부탁을 드렸다. “두 분이 각자의 운동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를 고려했을 때 발언의 대표성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개인인 김도현과 김지영이 가진 고민을 듣고 싶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가 처한 명확한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이 글이 비감염인이자 비장애인인 세 사람이 HIV 감염과 장애에 대해 나눈 기록이라는 한계와 함께, 긴 시간 현장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살아온 두 활동가의 시간이 쌓아온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독자분들도 함께 읽고 나눠주시길.

 

김승섭: HIV 감염을 가지고 사는 사람(People Living with HIV infection, 이하 PL)을 장애인으로 인정하라는 주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낯선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국내외적 상황을 살펴보면 2021년은 오히려 그 논의를 하기에 다소 늦은 감마저 있습니다.

국외적으로 보면, 현재 홍콩·영국·일본 등에서 이미 PL을 법적 장애인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2019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립재활원으로부터 입원을 거부당했던 감염인을 두고서 이것을 장애인차별금지법상의 장애인 차별로 해석하고 적용한 바가 있습니다. 현재 손가락이 절단된 HIV 감염인을 병원이 수술을 거부한 사건을 두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차별로 진정이 진행 중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주제는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공부를 하면서, 우리가 이 자리에서 직시하고 이야기해야 하는 두 가지 문장을 만났습니다.

“에이즈라는 낙인에 장애라는 낙인이 하나 더 덧씌워질 뿐이다.”

“HIV 감염인이라는 사실은 드러나지 않고, 장애인으로 지원과 보호는 받고 싶다?: 장애인으로 여겨지기는 싫지만, 장애인으로 지원은 받고 싶다는 주장을 장애운동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물론 둘 모두 배경과 맥락을 섬세하게 고려해서 이해해야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HIV 감염과 장애의 관계에 대해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김지영: 교수님과 그에 대해 대화를 한 후, 동료들과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요. 핵심은 PL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장애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였고, 결국 ‘차별이 장애를 구성한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에서 PL분들은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차별받으며 심리적인 좌절감과 내재적 낙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차별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데, 장애인운동과 연대하며 어떤 가능성과 희망을 본 것이지요. HIV 감염의 장애인정운동을 하면서 장애의 정체성, PL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재정의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PL 분들의 스펙트럼은 정말 넓어요. 20대부터 고령인 80대까지 계신데, 각기 다양한 욕구를 갖고 있고 신체적 증상도 매우 다양해요. 가령 50대 이상의 경우, 한두 개의 기회감염(면역 저하로 인해 세균, 바이러스 등에 감염되는 것을 뜻한다. HIV 감염으로 인한 주요한 사망 원인이 된다)을 경험했거나 대사 관련 질환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아 자신의 몸을 두고서 장애인인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실제 해외 여러 국가에서는 HIV에 감염된 상태를 두고, 그에 수반되는 기능상의 손상을 포함해 사회적 차별을 장애라고 정의해요. 유럽연합사법재판소는 장애를 질병과는 구별하지만, 질병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사회참여가 제약되는 상황을 장애라고 규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20대에서 한 40대 초반 정도까지는 진단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약을 통해 면역 상태가 잘 관리되는 경우에는 기회감염이 가까운 일은 아니어서, 자신을 장애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김지영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 대표. 줌 화면 캡처 
김지영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 대표. 줌 화면 캡처 

- 장애란 무엇인가 : 손상과 장애의 경계에서

김승섭: 저는 그 지점에서 질문을 던지고 싶어요. 2008년 제정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서 장애인은 ‘다양한 장벽과의 상호 작용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과 동등한 완전하고 효과적인 사회 참여를 저해하는 장기간의 신체적·정신적·지적 또는 감각적인 손상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되는데요. 이 정의에 따르면, 완전하고 효과적인 사회 참여가 불가능한 이유는 손상을 대하는 부당한 사회적 환경으로 인한 것이기에, 그 부조리한 사회적 환경에 초점을 맞춰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장애인권운동의 목표가 됩니다.

그런데 역으로 이 정의는 손상, 몸의 차이가 장애를 구성하는 요소라는 점을 명시하기도 합니다. 손상 없이 차별을 경험하는 이주노동자를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으니까요. PL은 지난 40년간 놀라운 의학기술의 발달로 꾸준히 약을 먹으며 관리할 경우 비감염인과 평균기대수명에 차이가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또 합병증에 걸리지 않은 젊은 PL의 경우는 실제 신체적 기능의 측면에서 손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애매한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장애를 정의할 때 ‘얼마나 손상된 사람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차별받는 대상인가’를 바라봐야 하는 것에 동의하더라도, 몸의 차이에 해당하는 손상, 그 손상이 없는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김도현: 저는 강의를 하며 장애를 설명할 때 ‘손상 혹은 손상이라고 간주되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을 손상이라고 규정할 것인가 자체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에 따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L 집단의 몸 상태 스펙트럼이 굉장히 다양하다는 게 논점이 되고 있는데, 실은 우리가 손상이라고 간주하는 모든 영역이 그런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법정 장애의 영역에 포괄되는 신장질환이나 간질환의 경우에도, 그 같은 진단을 받았지만 크게 증상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또 상당한 기능적 제약이 생겨나는 경우도 있겠지요. 손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포괄적이고 유연한 개념입니다. PL의 경우에도 감염이 없었다면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을 테니까, PL의 상태를 장애의 정의에서 이야기하는 손상이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논점은 ‘집단 전체를 장애인으로 규정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라는 것인데요. 차별금지법 같은 경우를 보면, 이건 사실 내가 이 법에 의거한 차별을 당했다고 진정을 제기할 때, 어떤 요인에 따른 차별인가를 확인하고 장애인으로서 규정을 받게 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일종의 신청주의와 같은 면이 있다고 볼 수 있겠죠.

김승섭: 최근 한국사회에서 장애의 범주가 넓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최근 백반증, 뚜렛 증후군, 기면증 등이 법적 장애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지요. 한국 사회에서 장애 개념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지요. 김도현 선생님 말씀처럼 PL의 경우도 어떤 손상이 있기 때문에 차별을 받는 것이고, 다른 장애의 경우도 몸의 차이 측면에서 그만큼 스펙트럼이 다양할 수 있다는 지점은 이러한 변화와도 닿아있는 논의라 생각됩니다.

김도현: 안면장애의 경우, 안면의 손상이 반드시 어떤 기능적 장애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장애가 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그러한 손상이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 때문에 사회 참여의 제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장애로 인정되지요. 이번에 새롭게 안면장애로 인정된 백반증도 그런 맥락이 있고요.

왼쪽 윗줄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김지영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 대표. 이번 대담은 지난 25일 온라인 줌으로 1시간 30분가량 진행됐다. 
왼쪽 윗줄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김지영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 대표. 이번 대담은 지난 25일 온라인 줌으로 1시간 30분가량 진행됐다. 

- 협소한 장애개념에 균열을 내는 HIV 장애인정운동

김승섭: 이번에는 김지영 선생님께 질문을 드려볼게요.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김지영 선생님의 HIV 감염과 장애에 대한 강의를 흥미롭게 봤는데요. 강의 제목이 ‘규정당할 것인가? 규정할 것인가!’였어요. PL 분들과 함께 오랫동안 운동을 하셨던 입장에서, 세상이 차별과 낙인 속에서 나를 규정하게 놔두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는 내가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라고 이해를 했습니다. 장애인운동의 오랜 구호인 ‘우리 없이 우리에 대한 것은 없다’와도 닿아있는 말이고요.

그런데 PL 인권 운동과 가까이 있지 않고 또 합병증이 없어 신체적 차이로 인한 불편함을 겪고 있지 않은 젊은 PL 분들은 오히려 ‘저 활동가가 왜 나를 장애인이라 규정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라고 느낄 여지도 있지 않을까요.

김지영: 2019년 12월에 HIV 감염의 장애인정과 관련해서 PL 102명이 참여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요, 응답자 중 ‘장애인정이 필요하다’고 답한 비율이 90%를 넘었습니다. 물론 이 숫자가 전체 PL을 대표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주제만이 운동의 과제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더 늦추기보다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보다 10년 앞선 2009년도에 ‘HIV감염인 지원강화를 위한 법정 장애인정제도의 타당성 조사’가 있었는데, 당시 PL분들 사이에서 저항감이 꽤 높았어요. ‘왜 우리보고 장애인 되래?’ ‘장애인 되면 PL인 게 노출되는 거 아니야?’ 이런 반응이 있었습니다. 당사자들 사이에서 장애인정에 대한 공감대나 논의가 없던 시기여서 지금 돌이켜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해요.

2014년에 저희가 또 한 번 이 주장을 꺼내 들었어요. 그때는 당사자분들과 공론의 장을 만들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만 해도 연대할 장애인 단체가 거의 없었어요. 당시 장애계는 장애등급제 폐지 운동이 화두였던 시기였기에 ‘너희들 왜 장애인이 되려고 해? 우리는 등급제 없애려고 하는데?’ 하는 식으로 온도 차를 느꼈던 시기이기도 해요.

그런 고민이 2019년까지 이어졌고 우리 운동을 조금 더 가시화시킬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다시 시작했어요. 저는 이 화두를 계속 던져왔기 때문에 내부의 목소리, 즉 당사자들의 필요에 대해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PL들이 직접 겪고 당하는 차별 그 자체가 장애의 경험이었어요. 유독 한국이 장애 등록률이 낮은데, HIV 장애인정과 연결 지어보면 장애 개념이 매우 협소하고,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어 등록을 꺼리시는 것 같아요. HIV 장애인정운동에서도 이 부분을 계속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즉, 지금 우리의 운동은 PL이 겪는 차별에 이름을 붙이고, 협소한 장애 개념에 균열을 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승섭: 한국에서 PL 분들이 모여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공개적인 장을 마련하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102명이 참여한 설문은 함의가 적지 않습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HIV 감염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가장 심각한 나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PL 분들은 사회적으로 고통을 겪더라도, 자신을 드러내며 그 어려움을 말하고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홀로 삭이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낙인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HIV 감염이 장애로 인정받게 되면 PL의 삶은 더 나아질까요?

19일 오후 2시 레드리본인권연대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은 서울시 중구 인권위 앞에서 HIV 감염인의 차별 진정 및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 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이가연
19일 오후 2시 레드리본인권연대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은 서울시 중구 인권위 앞에서 HIV 감염인의 차별 진정 및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 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이가연

김지영: 장애인차별금지법으로 PL의 차별 구제가 가능해지겠지요. PL 동료분들과 대화하면서 주로 나왔던 이야기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장애인정운동을 하는 것’ 이란 말이었어요.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을 드리니 결국 차별 안 받고 일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는 것이라고 답하셨습니다.

PL이 가장 빈번하게 차별을 경험하는 곳은 의료시설이에요. 자신의 감염 사실이 드러나는 최초의 장소이자 유일한 장소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사실 자신의 감염 사실을 굳이 드러낼 이유가 없고 외부적으로 표현되지 않으니까요. 또는 자유가 제한되는 교정시설 같은 곳에서 자신의 병력 정보가 노출되다 보니까 강도 높은 차별을 경험하시게 됩니다. 이러한 차별들이 현재보다는 더 나은 방법으로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도현: 사실 이 부분은 장애인권리보장법이 제정되고 장애등록제가 사라지면, 일정 정도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복지지원 영역으로 갔을 때, 주되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사회서비스나 장애인연금과 같은 소득지원일 텐데요. 사실 모든 PL 분들이 다 이런 서비스와 급여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닐 수 있잖아요. 예컨대 이건 당뇨와 약간 비슷할 수도 있을 것도 같아요. 당뇨병을 지니고 계신 분들의 경우, 일상생활이 잘 관리되고 합병증도 없고 직장 생활에도 무리가 없다면 그것 때문에 어떤 서비스나 급여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겠죠. 그러나 그 병으로 몸의 기능이 떨어지고 일상 활동에 제약이 생기면 구체적인 지원이 필요할 텐데요. PL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고, 이건 케이스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OECD 평균 장애인구 비율, 한국의 5배… 이유는?

김승섭: 마지막으로 한 분씩 말씀을 들었으면 하는데요. 두 분께 각각 말씀을 부탁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 김도현 선생님께서는 HIV 감염의 장애인정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서도, 동시에 북유럽 국가들의 예를 들며 이러한 장애인정이 과도기적 상황에서 전략적 과제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제게 하신 적이 있으셨거든요.

김도현: 제가 얼마 전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좀 확인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OECD 국가들의 평균 장애인구 비율이 24.5%더군요. 우리나라는 이의 5분의 1 수준인 5%에 불과하고요. 장애인으로 인정되는 인구가 늘어나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그에 대한 낙인이 점점 줄어드는 과정과 함께 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PL 분들이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을 장애라고 얘기할 수 있다는 건, 장애인운동의 성과 속에서 장애에 대한 낙인이 일정 부분 감소되고 장애가 좀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조금 더 주목해 볼 만한 국가들이 존재하는데요, 바로 한국의 장애인운동이 탈시설지원법을 성안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노르웨이와 스웨덴입니다. 이 두 나라는 2000년대 중반 탈시설을 완수해서 장애인시설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임과 동시에, OECD 회원국들 중 정부가 공식적인 장애인구 통계를 국제기구에 제출하지 않는 유이(唯二)한 국가들이기도 합니다. 이는 이 국가들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장애 모델에 입각해 장애를 바라보기 때문이에요. 즉 장애란 어떤 사람의 몸에 존재하는 특질(손상) 자체가 아니라 물리적‧사회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 유동적인 것이므로,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장애인구의 수를 산정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죠. 두 나라의 보건복지부 장관은 자기 나라의 인구 중 장애인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요. 서비스 지원의 과정에서 꼭 장애라는 개념을 거치지 않더라도 이를 필요한 사람에게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고, 차별금지의 경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종의 신청주의에 입각해 사례별로 판단하면 되니까요.

예컨대 활동지원서비스가 장애인에게만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볼 수도 있어요. 사실 ‘개인의 일상 활동을 지원하는 서비스’(personal assistance service)는 노인에게도 필요할 수 있고, 때로는 임신부에게도 필요할 수 있어요. 그럼 이러한 서비스는 꼭 장애인이라는 범주를 구분해서 지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교통약자’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쉬우실 거예요. 이동지원 서비스의 경우에도 교통약자라는 틀과 범주 속에서 마련하고 제공하면 되니까, 그 나라 법률에서는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이제 점점 사라져 가는 거죠.

제가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고 말하곤 하는데요. 장애인이라는 구분과 그 범주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면, 아마도 굉장히 먼 길이 되겠지만, 그것이 지금보다 근본적으로 진전된 단계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한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장애라는 것을 사람들이 특수하게 생각하지 않고 어떤 낙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죠. 이런 측면에서 PL의 장애인정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줌 화면 캡처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줌 화면 캡처  

- ‘언제까지 존재를 증명해야 할까’ PL 운동의 고민 

김승섭: 김지영 선생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활동가로서 자신의 경험 속에서 어떤 의제를 설정하고 그것들을 실현시키기 위해 주장을 하지만, 동시에 HIV 감염과 장애라는 예민한 주제를 두고서 많은 고민이 있으실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오랜 시간 PL분들과 함께하며 현장을 지켜온 활동가로서 하셨던 고민들을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김지영: HIV 감염이 장애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하면, ‘PL의 손상이 얼마나 되냐, 차별을 얼마나 받고 있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당연한 이야기를 자꾸 물으니 언제까지, 어디까지 우리 존재를 계속 증명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러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가시화 활동을 하지 않고 뭘 얻기만을 바란다’는 얘기도 듣게 되는데 사실 저희 운동의 한계는 명확히 그 지점인 거죠. 당사자분들이 가시화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데 이것이 PL 당사자의 탓인가, 아니면 우리가 활동을 잘못했던 건가. 활동해온 18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고민이 들 때도 많습니다.

그런 고민 과정 안에서 협동조합을 시작했고 PL이 조합원으로 직접 참여하는 경험을 통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기도 합니다. 저도 가끔 현장에서 공격받기도 해요. PL 분들에게 ‘너는 PL이 아니잖아. 우리 보고 왜 자꾸 발언하라 하는데. 말하기 대회는 왜 하는데. 하기 싫다.’ 이런 이야길 듣죠. 어떨 때는 당사자 대신 가족이 등장해서 PL의 경험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걸 근사한 기획처럼 생각하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당사자가 도저히 등장하기가 어려워서 누나분이 오셨거든요. 그에 대해 감탄하는 것을 보며 이건 원래 의도했던 기획이 아니라, 섭외가 안 되었던 건데...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 가시화 운동이 더욱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반드시 드러내야지만 우리의 요구를 주장할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렇게 해야만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PL분들에겐 폭력일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처음부터 PL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낙인을 받고 있는 집단이고, 소수일지라도 PL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장애인정운동 역시 PL 모두가 공감하지 않더라도, 소수라도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운동은 균열과 혼란에서 시작되는 거잖아요. 결국 HIV 장애인정운동은 PL의 가시화 운동의 과정이라고도 생각해요. 연대와 집단 경험에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근배 동지를 비롯해 연대할 수 있는 많은 단체와 지지자들을 알게 되면서 HIV 장애인정운동이 장애 개념을 확장시키는 활동이기에 빚진 마음이 아니라 빚을 갚는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김승섭: 기득권의 언어는 논리적으로 깔끔하고 정리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명확한 언어를 갖추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래의 가능성을 말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역으로 이는 사회적 약자가 ‘언어의 부재’로 고통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미 고착된 세계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가능성을 말하며 그 강고한 장벽에 몸을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균열이라고 생각합니다.

올 한해 제 여건이 마땅치 않아 기고 요청에 많이 망설였는데, 레드리본 김지영 선생님 부탁으로 김도현 선생님이 대표로 있는 비마이너에 글을 써달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쉬운 답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동년배 활동가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두 분 오늘 감사했습니다.

필자 소개

김승섭(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