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고] HIV,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요구하다
유럽연합과 영국 “사회적 통합 가로막는 차별에 직면해 있다면 장애인”

[편집자 주]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는 장애인복지법상의 등록 장애인이 아님에도, 국립재활원에서 입원 거부를 당한 HIV감염인의 차별을 ‘장애인차별금지법’상의 차별로 판단했다. 그러나 “모든 HIV감염인 및 AIDS환자를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는 단서는 한계로 남았다.

인권위의 판단은 HIV 감염과 AIDS 확진 그 자체를 장애로 보고 차별을 금지하는 세계적 흐름에 비춰봤을 때, 여전히 보수적이다. HIV감염인은 감염을 이유로 사회적 격리와 분리, 차별을 경험한다. 이러한 차별은 왜 ‘사회적 장애’로 인정될 수 없는가? 비마이너는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과 함께 HIV감염인이 의료를 비롯해 생의 모든 영역에서 경험하는 차별의 맥락을 드러내는 연속기고를 연재한다. 

지난 2014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한국의 장애인복지법이 의료적 장애모델을 언급하고 있는 점에 대해 우려하며 “장애에 대한 인권 기반 접근방식” 도입을 권고한 바 있다. 이어 이러한 인권 기반 접근 방식의 일환으로 “현행 장애심사 및 등급판정 시스템이 장애인의 특성과 환경, 요구 등을 반영하도록 개정”할 것도 권고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한국 정부는 “장애인복지법 개정(2017년 12월 19일)을 통해 ‘장애등급’을 ‘장애정도’로 개편하여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하려 한다고 답변했다.

한국에서 등급제 폐지와 더불어 장애범위가 확대되기도 했다. 올해 4월, 그동안 국가가 ‘장애’로 인정하지 않아 장애 등록을 할 수 없었던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CRPS), 백반증, 강박장애, 뚜렛장애, 기면증 등 10개 질환이 새로이 기존 장애유형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등록 장애인 범위를 늘리는 것만으로 정말 ‘복지 사각지대’가 해소될 수 있을까?

가운데에 사람 그림이 있고 그 주변에 사람의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사회적 요소들이 그려져 있다. 사진 픽사베이 
가운데에 사람 그림이 있고 그 주변에 사람의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사회적 요소들이 그려져 있다. 사진 픽사베이 

- 유럽연합 판례를 통해 확립되어온 HIV의 장애 인정

유럽에서는 HIV감염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유럽연합(EU) 및 각 회원국의 ‘차별금지법(평등법)’에 명시된 차별금지 사유 중 ‘장애’에 관한 규정이다. 즉, HIV감염인에 대한 차별은 장애인차별금지에 관한 법률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향은 판례를 통해 구체화 되어왔다. 2010년 12월, 유럽연합에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이 발효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2011년, HIV감염인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따른 장애인의 정의에 부합하므로, 이들의 권리를 이에 부합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판례가 유럽인권재판소(EU Court of Human Rights)에서 나오게 된다.

러시아 여성과 결혼한 키유틴(Kiyutin)은 러시아 영주권을 신청했으나 기각당했다. 러시아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는 의료검진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HIV감염인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키유틴은 이러한 러시아 정부의 결정에 불복, 유럽인권재판소에 소를 제기했다. 결과는? 키유틴의 승리였다. 재판부는 (1) HIV 감염이 당사자의 ‘행실’에 대한 차별적이고 부정적 낙인으로 이어지는 만큼, 이들 역시 사회적 소수자이며, (2) 유엔인권이사회가 국제규범 내 ‘비차별’ 규정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태”라는 용어에 HIV 감염 등의 건강 상태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을 들며 “이러한 접근방식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이 당사국에 부여한 ‘장애로 인한 차별금지’ 원칙에도 적용되어야 하므로, HIV에 기반한 차별 역시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ECHR, Kiyutin v Russia, 2700/10, 10 March 2011)

2013년, 유럽사법재판소(ECJ)도 덴마크의 사무직 노조인 ‘HK 덴마크(HK Danmark)’ 사건에서 “질병으로 인한 장기적 손상 역시 장애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HIV 감염을 비롯한 질병이 ‘장애’에 포함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HK 덴마크 사건은 유럽연합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한 후 유럽사법재판소에 제기된 최초의 장애차별 관련 사전 질의였는데, 이로 인해 재판부는 고용에서의 장애인차별금지를 규정하고 있는 유럽연합의 고용평등지침(Council Directive 2000/78/EC)이 유엔장애인권리협약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의무에 따라, 재판부는 ‘장애’의 개념을 “다양한 장벽과의 상호작용으로 다른 노동자와 동등한 기반에서 직업생활에 완전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특히 신체적·정신적 혹은 심리적 손상으로 인해 초래되는 제약”으로 확장했다. 이에 따라 장기간 제약을 초래하는 질병―치료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상관없이― 역시 고용평등지침 내 ‘장애’에 해당하게 되어, 정당한 편의제공 및 차별금지 대상으로 포함되었다.

유럽사법재판소의 이러한 판결은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국내 재판부에도 영향을 미친다. 2014년, 독일 연방노동재판부는 무증상 HIV감염인을 약품 생산 공장에서 해고하는 것이 독일 일반평등법(Allgemeines Gleichbehandlungsgesetz)에 위배된다고 판단하였다. 재판부는 특히 평등법에서 차별금지 사유로 등장하는 장애를 재정의했는데, 이 과정에서 바로 위의 유럽사법재판소의 장애 정의를 차용했다. 즉, 6개월 이상 지속되는 신체적 손상은 노동 참여뿐만 아니라 사회 참여 전반을 저해하게 되므로 장애를 구성하기에 충분한 요건이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손상을 초래하는 증상이 없더라도 낙인을 강화하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만으로도 장애는 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새로운 장애의 정의―즉, 차별이 장애를 구성한다는 인식―에 근거하여 무증상 HIV감염인의 해고 역시 장애인 차별이라고 판단하였다. (▷참고 https://bit.ly/2Y7LePP)

타자기 종이에 평등(EQUALITY)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대문자로 적혀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타자기 종이에 평등(EQUALITY)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대문자로 적혀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 영국, HIV감염인은 증상 유무 상관없이 진단받은 순간부터 장애인

영국은 더이상 유럽연합 시스템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유럽 국가 내에서도 HIV감염인의 권리 보장을 광범위하고 적극적으로 이행하고 있는 국가로 꼽을 수 있다. 영국에서 HIV감염인은 진단과 동시에 장애인으로 보아 복지 지원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는 장애연금과 보조금 등도 포함된다. HIV 감염으로 일상생활이나 이동에 어려움이 있다면 활동지원을 비롯한 일상생활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영국의 2010년 평등법(Equality Act 2010)에서 기인한다. ‘2010년 평등법’은 HIV감염인을 증상 발현에 관계없이 진단받는 그 순간부터 장애인으로 보호한다. 이 법에 따라 직장, 교육, 부동산이나 재화의 구매, 시설 이용 등에 있어 HIV감염인을 차별하는 자는 처벌을 받게 된다(▷참고 2010년 평등법에서의 장애 정의). HIV 감염인에 대한 진료 또는 의료행위 거부, HIV 감염인에 대한 임금 불평등, 체육 시설 사용 금지 등이 대표적인 평등법 위반 사례이다.

특히 고용주들은 HIV감염인에게 직장에서의 적정한 편의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흔히 장애인 노동자에 대한 적정한 편의제공이라고 하면 물리적 접근성 보장만을 떠올리게 되지만, HIV감염인의 경우 HIV 자체로 인한 증상뿐만 아니라, 치료제 복용에 따른 부작용까지 고려하여 업무 시간 대체, 재택근무, 병원 예약 시 휴무 제공 등이 두루 포함된다.

- ‘사회적 차별이 장애를 구성한다’는 점을 복지 정책에 실질적으로 반영해야

유럽연합과 영국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근거하여, 신체적·정신적 손상과 사회적 장벽을 두루 고려한 장애 정의를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사회 참여 및 통합에 실질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안전망을 확충할 수 있고, 역으로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도 꾀할 수 있게 된다. 사회가 장애의 정의를 확장할수록, 장애로 인한 사회복지 체계 유입이 많아질수록, 장애인은 더이상 ‘무능한 존재’나 ‘약한 존재’라는 편견에 갇히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주목할 것은, 유럽과 영국에서는 무증상 HIV감염인 역시 장애인의 범주에 포함시켜 차별, 특히 노동 차별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바이러스로 인한 직접적인 손상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사회의 차별적 인식으로 인해 사회 통합이 저해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회의 차별적 인식이 장애를 구성한다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의 적용이야말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권고한 내용의 핵심일 것이다. 이제는 한국도 한정적인 장애 유형에 따른 등록이 아닌, 실질적 지원과 차별 대응이 필요한 이들을 지원함으로써 진정한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모색할 때다.

* 필자 소개 _ 한국장애포럼 최한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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