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고] HIV,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요구하다

[편집자 주]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는 장애인복지법상의 등록 장애인이 아님에도, 국립재활원에서 입원 거부를 당한 HIV감염인의 차별을 ‘장애인차별금지법’상의 차별로 판단했다. 그러나 “모든 HIV감염인 및 AIDS환자를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는 단서는 한계로 남았다.

인권위의 판단은 HIV 감염과 AIDS 확진 그 자체를 장애로 보고 차별을 금지하는 세계적 흐름에 비춰봤을 때, 여전히 보수적이다. HIV감염인은 감염을 이유로 사회적 격리와 분리, 차별을 경험한다. 이러한 차별은 왜 ‘사회적 장애’로 인정될 수 없는가? 비마이너는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과 함께 HIV감염인이 의료를 비롯해 생의 모든 영역에서 경험하는 차별의 맥락을 드러내는 연속기고를 연재한다.

HIV감염인은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차별과 혐오로 인해 감염사실이 알려질 경우 의료·고용 등의 많은 영역에서 격리와 배제를 겪는다. HIV감염인 당사자들이 “HIV로 인한 건강·신체상의 고통보다 사회적 차별로 인해 죽는다”라고 하소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차별금지법)’의 보호를 통해 HIV감염인을 그들에게 행해지는 차별로부터 구제할 수는 없는 것인가? 미국의 사례에서 이에 대한 단초를 모색해 볼 수 있다.

알약으로 HIV라는 글자가 만들어져 있다. 그 바깥으로는 알약과 주사 등이 놓여 있다. 사진 픽사베이. 
알약으로 HIV라는 글자가 만들어져 있다. 그 바깥으로는 알약과 주사 등이 놓여 있다. 사진 픽사베이. 

- 미국에서는 ‘장애 인정’ 받는 HIV감염인들

우리나라의 장애인차별금지법과 비슷하게, 미국에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금지 및 구제조치를 규정하고 있는 법률은 미국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1990)이다. 과거 미국은 재활법(Rehabilitation Act of 1973), 장애아동교육법(Education for All Handicapped Children Act of 1974), 건축장벽법(Architecture Barriers Act of 1968), 도시대중교통법(Urbans Mass Transportatation Act) 등 개별 영역에서의 장애인차별금지법제를 두고 있었지만, 내용이 모호하고 실효적인 구제수단이 미비하여 장애인의 차별금지 및 권리옹호에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에 따라 1990년에 미국장애인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공공시설·고용·교통·주 및 지방 정부 서비스·통신 등 모든 분야에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행위를 금지하면서, 차별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법무부나 고용기회평등위원회 등 기관에 고소하고, 연방법원에는 시정명령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여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미국장애인법에 의하면, 하나 이상의 주요한 생활상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 손상이 있거나 그러한 손상의 기록이 있는 경우 또는 그러한 손상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에 ‘장애’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에 비추어 HIV감염인은 하나 이상의 주요한 생활 활동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신체적 손상을 가진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되어 미국장애인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HIV감염인에 대한 미국장애인법 적용 법리를 명확히 확립한 것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브래그던 대 애보트(Bragdon v. Abbott, 1998) 판결이었다.

무증상 HIV감염인 시드니 애보트는 충치를 때우기 위해 치과병원을 방문하여 자신이 HIV감염인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해당 병원의 의사였던 랜던 브래그던으로부터 치료를 거부당했다. 이를 장애인 차별로 여긴 시드니 애보트는 랜던 브래그던을 고소하였고, 연방대법원은 ‘HIV감염인의 경우 외부로 나타나는 증상이 없더라도 미국장애인법상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해당 법률의 보호를 요청할 자격이 있다’고 판결하였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HIV감염은 감염되는 순간부터 개인의 혈액 시스템과 림프액 분비 시스템에 지속적이고 유해한 영향을 미치고 그로 인해 진행단계 전체에 걸쳐 생식 등의 주요한 생활 활동에 제한을 가져오므로, 외부증상 발현과 상관없이 미국장애인법이 규정하는 ‘신체적 장애’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확립된 법리는 고용·주거·다른 의료 제공자에 대한 접근·탁아소 및 교육 프로그램·건강 및 생명 보험·교정 및 형사 사법 시스템·교통을 포함한 광범위한 생활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현재까지도 미국에서는 HIV감염을 미국장애인법상 ‘장애’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도록 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축적해오고 있다. 일례로, 2020년 3월에 전국 소매점 및 약국 체인인 왈스그린은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한 매장에서 HIV감염인에게 독감예방 주사의 판매를 거부한 행위가 미국장애인법을 위반한 장애인차별이라는 이유로 법무부에 고소를 당했고, 이에 대하여 HIV/AIDS 차별금지를 위해 온라인 교육 내용 수정 및 연 1회 약사 대상 교육, 개인에 대한 배상금(2만4000달러)과 과태료(1만5000달러) 부과가 포함된 분쟁합의(Settlement Agreement)가 이뤄졌다. 더욱이, 미국장애인법은 HIV에 실제 감염되지 않았더라도 소문이나 가정에 근거하여 직업면허 또는 학교 입학이 거부된 사람들처럼 HIV감염인으로 간주되어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까지도 보호대상에 포함한다.*)

*) 미국 법무부 홈페이지 소개 내용 참조 https://www.ada.gov/hiv/

31번째 세계에이즈의 날을 맞아 2018년 11월 29일 대백 앞 광장에서 레드리본인권연대 주최로 촛불 추모제가 열렸다. HIV/AIDS를 상징하는 빨간 리본 주변에 ‘낙인에 반대한다(NO Stigma)’, ‘차별에 반대한다(NO Discrimination)’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이 놓여 있다. 사진 레드리본인권연대
31번째 세계에이즈의 날을 맞아 2018년 11월 29일 대백 앞 광장에서 레드리본인권연대 주최로 촛불 추모제가 열렸다. HIV/AIDS를 상징하는 빨간 리본 주변에 ‘낙인에 반대한다(NO Stigma)’, ‘차별에 반대한다(NO Discrimination)’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이 놓여 있다. 사진 레드리본인권연대

- 우리나라 장애인차별금지법을 통한 ‘장애 인정’의 가능성

우리나라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제2조 제1항에서 ‘장애’를 신체적·정신적 손상 또는 기능상실이 장기간에 걸쳐 개인의 일상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하는 상태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 개념은 장애인복지법의 장애와 그 개념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없고, 다양한 사회변화에 따라 확장될 수 있는 열린 개념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금지하는 차별행위의 사유가 되는 장애를 외부로 발현된 증상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2019년 5월, HIV감염인의 재활치료를 거부한 국립재활원의 행위를 장애인차별금지법 제31조(건강권에서의 차별금지)를 위반한 차별금지행위라고 판단하여 시정권고 조치를 내린 바 있다. 그러나 해당 사건의 진정인은 HIV감염으로 인해 편마비와 시력상실이 발현돼 일상생활과 사회생활 모든 영역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HIV감염 자체를 장애로 인정받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항바이러스치료제의 발달에 힘입어 과거와 달리 HIV에 감염되었다고 하더라도 생명·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즉, 외부로 발현되는 증상에만 매몰되어 장애 인정 여부를 판단하면 HIV감염인은 장애 범주에 포함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단 HIV에 감염되면 신체적 손상이 외부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감염인의 체내에서 끊임없이 면역능력이 저하되고 만성적인 염증이 지속하면서 심혈관합병증, 대사성 질환, 인지기능장애, 암성질환 등의 만성 중증질환의 발생 빈도가 높아진다. 그러므로 HIV감염은 외부적 발현 증상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말하는 ‘신체적 손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HIV감염인은 위험성 및 전파가능성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과도한 우려에 따른 혐오로 말미암아, 장기간에 걸쳐 사회참여에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장애인차별금지법의 보호대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

미국장애인법의 적용 사례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의 개념을 폭넓게 해석·적용함으로써, 차별은 만연하지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울부짖는 HIV감염인 당사자들이 우리 사회의 동등한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 필자 소개 _ 나동환. 사단법인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근변호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