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어느 대학의 장애인권 활동
⑤ 학력, 장애, 계급의 교차로

대학 안에서의 활동은 누구나 접하기 쉬운 기록으로 잘 남지 않고, 길게 지속되지 않을 때가 많아서 종종 ‘추억’으로만 남는다. 졸업을 앞둔 필자는 더 많은 이야기가 글로 남아 읽히길 바라며, 대학 안의 활동이 어떻게 바깥과 연결되거나 단절되는지, ‘온실’이라고 여겨지기도 하는 대학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여전히 필요한지 기록한다. 서울 소재 한 대학, 그 안에서도 소수의 단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연재가 더욱 많은 ‘다른 이야기’에 연결되길 바란다.

[ 전편 ]

① 장애인권동아리에 들어가게 된 계기

② 접근성을 조사하며 타협해야 했던 것들

③ 학생사회, 접근성의 정치

④ 지워지거나 없던 것으로 취급되는 장애인권 활동

텅 빈 강의실에 옅은 갈색의 나무 의자 수십개가 놓여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지난 학기, 나는 수업 과제로 아랫마을 홈리스야학을 찾았다. 그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그 관계들은 반빈곤운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한 배경조사로 나는 야학 운동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있는 대로 찾아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유독 눈에 밟힌 것은 ‘대학생’이라는 위치였다.

야학마다 다른 맥락이 있을 수 있지만, 야학은 자주 학생 운동과 다른 운동을 연결하는 하나의 매개로 작동하고 있었다. 검정고시가 되었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할 수 있도록 하는 글쓰기가 되었건, 이런 걸 가르치는 사람은 어느 정도 교육의 기회를 누린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래서 야학 교사의 적지 않은 수는 대학생이었다. 노동 야학에서는 노동자가, 빈민 야학에서는 빈민이 학생이었지만, 교사는 어디서나 대체로 대학생이었다.

기록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은 바로 야학 안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위계였다. 야학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그 위계를 고민하며, 파울로 프레이리가 ‘페다고지’에 쓴 것과 같은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학생은 교사에게 지식을 배우는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교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식이었다.

물론 이는 유의미한 문제의식이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많았다. 야학에서 교사와 학생의 위계는 야학 안의 문제가 아니라, 야학 이전에 이들이 살아온 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관계는 기본적으로 교육의 기회에서의 차등 때문이었고, 이 차등은 대부분 계급에서 왔다. 대학생이란 단지 하나의 상태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고등교육을 받고 문화 자본을 쌓을 수 있는 ‘계급’이기도 했다.

한국장애인개발원에서 발행한 「2020 장애통계연보」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전체 인구 중 대졸 이상은 38.6%이지만, 장애인구 중 대졸 이상 인구는 13.6%이고, 중졸 이하가 56.9%로 절반을 넘게 차지한다. 가족의 경제력이 받쳐주더라도 공공·민간 교육기관의 접근성은 매우 열악하다. 제도적 보장이 너무도 부족하기에, ‘장애대학생’은 차별을 어떻게든 뚫어서 통과해낼 배경이 존재해야만 얻을 수 있는 위치가 된다. 그리고 대학 안에서 장애인권 의제를 처음 접하는 학생들이 만나는 장애인은 기본적으로 ‘4년제 대학에 다니는’ 장애대학생이다. 게다가 접근성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대학이 드물고, 있더라도 서울에 몰려 있는 까닭에 4년제 대학 중에서도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인 경우가 많다.

책상 위에 노트북 다섯 대와 커피, 차, 시리얼, 헤드폰, 노트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사진 프레임 속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거나 노트북을 사용하는 손만 보이는 정도이지만 분주히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사용하여 무언가를 하고 있는 중임을 알 수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책상 위에 노트북 다섯 대와 커피, 차, 시리얼, 헤드폰, 노트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사진 프레임 속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거나 노트북을 사용하는 손만 보이는 정도이지만 분주히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사용하여 무언가를 하고 있는 중임을 알 수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나는 이것이 대학 안과 바깥에서 주로 다루는 의제의 차이와 깊이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대학 바깥의 장애인 인권 의제 중 최근 몇 년 동안 나의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탈시설과 중증장애인의 노동권, 이동권 운동이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처럼 반빈곤운동과의 연결점도 꾸준히 다루어진다. 대학 안의 장애인권 활동에서도 다양한 주제를 다루지만 그럼에도 대학 안의 장애인권 활동은 ‘배리어프리’라는 단어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배리어프리 지도 제작, 온라인 환경에서의 대체텍스트 도입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대학에도 시설, 노동, 빈곤 문제를 경험하는 학생들이 존재하지만, ‘봉사 동아리’가 즐비하고, ‘사회 혁신’은 소셜미디어와 크라우드 펀딩, 기술 개발과 경영으로 가장 잘 달성될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게 깔린 공간에서 여전히 탈시설이나 권리 중심 일자리 등의 의제들은 이질적이다. 특히 내가 활동하는 대학처럼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접근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기초’를 넘어서는 요구를 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를테면, 속기사가 있더라도 속기사의 실력에 따라 청각장애학생의 학업 성취도는 크게 영향받기 마련이지만, 속기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것처럼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대학생이라는 위치는 이런 상황에 안주하게 될 위험이 있는 동시에, 이러한 기본적인 편의 지원이 제도적으로 보장될 수 있다는, 즉 그러한 편의들을 자신이 당연히 누릴 수 있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편의를 ‘시혜’나 ‘포용’이 아닌 권리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한 친구는 대학에 오기 전에 문자통역이라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조차 몰랐지만, 이제는 학교 바깥에서도 자신이 이전보다 당당하게 속기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소셜미디어에서 포스터나 카드뉴스, 동영상을 볼 때 항상 대체텍스트와 자막이 있는지 점검하고 피드백을 남긴다. 배리어프리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는 폐쇄자막이 잘못 들어간 경우는 없는지 살펴본다. 이처럼 내가 탈시설이나 장애인의 노동보다 시청각 자료의 접근성에 유독 신경을 쓰게 된 건 장애인권을 계급과 다소 동떨어진 무엇으로 여기도록 하는 대학 내의 담론의 영향이 크고, 그것은 명백한 한계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접근성을 ‘기본적인 조건’을 넘어서는 무엇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기본적인 속기가 지원되기에 우리가 더 나은 속기를 상상했던 것처럼, 나는 ‘감각 번역’으로서의 더 나은 폐쇄자막이나 대체텍스트의 가능성을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참고] 종합에서 대체로, 감각의 새로운 가능성). 혹자는 이런 이야기를 ‘배부른 소리’로 여길 수 있지만, 나는 이것이 지금의 대학 내 장애인권 담론에서 특히 잘 해낼 수 있는 영역 중 하나이고, 대학 밖의 활동에 연대하는 한에서 이런 ‘분업’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의 장애인권 활동은 대학생이 그 자체로 하나의 계급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장애를 구성해내는 사회적 문제에 발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 지원을 받기 위해 ‘인식 개선’ 사업을 벌여야 하기도 하고, 무지한 학내 단체나 기관들과의 협력 과정에서 너무 많은 실무적 문제에 부딪혀서 담론을 만들기보다는 업무를 처리하기 바쁘기도 하다. ‘본업’이 활동이 아니라 학생이라서 학업에 방해가 되면 활동을 그만두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다.

교문 바깥의 의제들을 충분히 따라잡기가 어렵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지금 하고 있는 ‘배리어프리’ 안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조금씩 더 깊게, 다양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비로소 ‘대학생’이라는 위치는 한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번 글로 다섯 번에 걸쳐 연재된 ‘어느 대학의 장애인권 활동’을 마무리합니다.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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