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시설로드맵이 꺼낸 위험한 시설 소규모화②
가짜 탈시설 정책 펼친 헝가리, 유엔 제재받다
탈시설로드맵, ‘시설화 종식’을 목표로 해야

▶ (이전 글) ① ‘시설 쪼개기가 미래’라는 탈시설로드맵

지난 4월 21일,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이 세종시 보건복지부 담벼락에 올라가 ‘탈시설’ 용어를 부정하는 복지부를 규탄하는 기습 시위를 벌였다. 현수막에는 “보건복지부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명시된 탈시설 용어를 부정하지 말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지난 4월 21일,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이 세종시 보건복지부 담벼락에 올라가 ‘탈시설’ 용어를 부정하는 복지부를 규탄하는 기습 시위를 벌였다. 현수막에는 “보건복지부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명시된 탈시설 용어를 부정하지 말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인 당사자가 지역사회에 살더라도 일상적 의사결정에 대한 통제권을 발휘할 수 없거나, 자신이 누구와 함께 살지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자신의 의지와 선호가 존중되지 못하는 환경 등을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 일반논평 5에서는 ‘시설화된 환경’이라 보고 이를 철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유럽연합의 탈시설가이드라인에는 공동생활가정을 현대화된 위성시설이라고 정의하고, 탈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장애인이 지역사회에 살면서 시설화된 환경에 처해 있다면 탈시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미다.

탈시설로드맵이 시설변환을 지향한다고 할 때, 주목해야 할 나라가 있다. 헝가리다. 공동생활가정(그룹홈)을 탈시설-자립생활 정책으로 채택한 헝가리는 협약 위반으로 지난 2018년부터 3년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의 직권조사를 받았다. 2007년 협약 선택의정서를 비준했지만, 장애인 탈시설 정책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 가짜 탈시설 정책 펼친 헝가리, 유엔 제재받다

한국장애포럼 등이 번역한 ‘위원회 헝가리 직권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헝가리는 지난 2011년부터 ‘50인 이상 거주시설’에 사는 장애인을 소규모 그룹홈으로 전원했다. 그 결과 2017년까지 655명이 전원조치 됐다. 또 2017년부터 2036년까지 1만 명의 장애인을 그룹홈과 같은 소규모 시설로의 전원을 계획하고 있었다. 

스티븐 알렌(Steven Allen) 벌리더티(Validity Foundation) 공동대표가 “그룹홈은 집이 아니라 시설이고, 완전한 탈시설을 달성해야 할 당사국의 의무를 위반하는 것입니다”라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출처 유튜브 최혜영TV
스티븐 알렌(Steven Allen) 벌리더티(Validity Foundation) 공동대표가 “그룹홈은 집이 아니라 시설이고, 완전한 탈시설을 달성해야 할 당사국의 의무를 위반하는 것입니다”라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출처 유튜브 최혜영TV

헝가리 직권조사를 끌어낸 스티브 알렌 발리더티 재단(Validity Foundation) 대표는 지난해 4월 22일 열린 ‘협약에 기반한 탈시설권리, 국제적·국내적 실천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헝가리는 인구 1000만 명이지만, 약 8만 5000명의 장애인이 시설에 수용돼 있다. 유럽에서 시설 수용률이 가장 높은 국가”라며 “헝가리는 15년 전 협약을 비준했지만, 시설 수용인 숫자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스티브 알렌 대표는 “헝가리는 30년 탈시설 계획을 세웠지만 이에 대한 중간평가 지표도 없고, 단계별 계획도 없었다. 이는 시설에서 자립생활로의 전환을 보장하겠다는 진정한 의미가 없다는 방증이다”라며 “더욱이 후견인 제도 등 법률적인 제약이 심해 결국 장애인이 계속 시설에 수용되는 효과만 나타났고, 시설 내 학대와 방임, 폭력 사건이 일상적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최한별 한국장애포럼 사무국장은 “헝가리 직권조사의 핵심은 시설의 소규모화를 탈시설-자립생활 정책으로 내세웠다는 것에 대한 비판과 장애인 법적능력 제한을 이유로 한 시설화 지속 두 가지였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나라 탈시설로드맵이 지닌 한계점과도 정확히 맞물린다고 지적했다. 

지난 2020년 4월, 위원회는 헝가리의 ‘가짜’ 탈시설 전략에 대대적인 개선 권고를 내렸다. 그중 ‘시설화의 종식’에 대해서는 △시설을 개발하는 프로그램을 중단하여 장애인의 추가적인 시설화 방지 △대규모 시설에서 소규모 시설로 장애인을 이동시키는 현행 전략 수정 △효과적인 탈시설화를 위한 국가 계획 수립을 위해 장애인단체와 협의할 것 등을 권고했다. 

이는 향후 우리나라 탈시설로드맵에 대한 권고가 될 수도 있다. 지난해 12월 14일 협약 선택의정서가 제54회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앞으로 대통령 재가, 국회 비준동의, 서명 또는 가입서 기탁을 거쳐 공포될 예정이다. 협약 선택의정서 비준국이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따라서 협약에 맞는 탈시설 계획을 새로 짜야 할 필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 시설화 종식을 목표로 한 탈시설로드맵으로

시설 소규모화가 탈시설 정책과 병행될 수 없다는 것은 지난 정부 정책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2011년 장애인복지법 개정으로 새로 지어지는 거주시설은 30인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2011년 이전에 만들어진 거주시설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아서 여전히 대형 거주시설은 존재한다. 2020년 기준 200인 이상 시설은 2곳(충남 보령 정심원, 경기 가평 꽃동네), 100인 이상 시설은 23곳이다. 

그와 함께 시설 소규모화에 따른 사회복지법인의 시설 쪼개기도 빠르게 진행됐다. 대형시설 거주 장애인은 사회복지법인이 만든 소규모 시설로 전원 됐다. 박혜영 씨도 이러한 환경 변화에 따라 대형시설에서 공동생활가정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시설 소규모화 정책으로 시설 개수는 2012년 1348곳에서 2020년에는 1539곳으로 191곳이나 늘었다. 

시설 크기만 작아졌을 뿐 정작 시설에 사는 장애인 수는 유의미하게 줄지 않았다. 시설 거주장애인은 2012년 12월 기준 3만 640명이고, 2020년 12월 기준 2만 9086명이다. 8년간 고작 1554명이 줄었는데, 이 수치에는 사망자도 포함된다. 

장애인권활동가들이 신아원 긴급탈시설을 요구하며, 길바닥에 흰색 락카로 ‘장애인 거주시설 폐쇄하라’라고 쓰고 있다. 사진 허현덕
장애인권활동가들이 신아원 긴급탈시설을 요구하며, 길바닥에 흰색 락카로 ‘장애인 거주시설 폐쇄하라’라고 쓰고 있다. 사진 허현덕

탈시설운동 진영에서는 탈시설로드맵이 시설 소규모화가 아닌, 시설폐쇄를 목표로 해야 하며, 나아가 시설화 종식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정하 발바닥행동 활동가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들이 지금과는 달리 일반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탈시설이다. 그러나 정부는 탈시설로드맵을 짜면서 정작 장애인의 삶을 중심에 두지 않았다. 장애인이 왜 탈시설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절절한 공감이 있었다면, 행정중심적인 시설 소규모화 정책을 내놓을 수 없다. 시설 소규모화는 공급자의 권한과 영향, 전반적인 체계는 그대로 둔 채 시설만 잘게 쪼개는 것이다”라며 “정부가 시설 서비스 공급자 눈치를 보지 않고, 탈시설로드맵에 개인주택이나 사회서비스로 구성된 탈시설 정책을 새롭게 내놓아야 한다. 정부의 강력한 탈시설 정책 의지가 담겨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시설화 종식은 작은 의미에서는 장애인복지법 제58조에서 정의하는 거주시설의 정리(폐쇄)이며 넓게는 그동안 사회에서 장애인에게 강요되었던 선택권 박탈을 비롯한 모든 시설적 문화를 배척하는 것이다”라면서 “시설화가 종식된 사회는 마치 차별이 없는 사회와 같이 이상적인 사회다. 우리가 차별 없는 사회를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이를 지향하듯이, 시설화 종식을 위해서도 목표와 지향을 지녀야 한다. 탈시설로드맵이 시설화 종식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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