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정서 비준된다면 유엔 진정 가능해져
영국 장애인복지 예산 삭감, 헝가리 시설 소규모화에 유엔 직권조사 이뤄져
국내 인권의식 견인할 제도로 기대 높지만, 구체적 제도 마련엔 고심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에 개인이 피해 상황을 진정할 수 있다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까. 위원회는 한국 정부를 직권조사하여 권고할 수 있게 된다. 장애인에 대해 시혜와 동정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사회에서 장애인권의식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다. 단,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의 선택의정서를 비준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2007년 협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협약에 따른 권리구제 절차를 규정하고 있는 선택의정서는 비준하지 않았다. 선택의정서를 비준하면 개인(혹은 단체)은 위원회에 진정할 수 있고, 위원회는 권리침해에 대해 직권조사를 할 수 있다.
지난해 6월 29일, ‘협약 선택의정서 비준 촉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후 문재인 정부는 관계 부처와의 협의를 거쳐 조약 국문본을 마련하고 이에 대한 대통령 재가까지 마쳤다. 국회 비준만이 남았으나 지난해 12월 28일 발의된 ‘협약 선택의정서 가입동의안’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상정되지 못한 채 차일피일 미뤄지고만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6일, 해외 사례를 통해 ‘유엔 진정 제도의 국내 실효성 강화 방안’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이번 토론회는 15일부터 17일까지 2박 3일간 강릉 세인트존스호텔에서 열린 2022평창장애포럼 분임세션5에서 진행됐다.
- 영국 장애인복지 예산 삭감, 헝가리 시설 소규모화에 유엔 직권조사 이뤄져
2014년 3월, 영국 정부는 ‘2015년 7월부터 자립생활기금(Independent Living Fund)을 완전히 없앤다’고 밝혔다. 이에 ‘장애인복지예산 삭감에 저항하는 장애인들(아래 디팩, Disabled People Against Cuts, DPAC)’ 등 영국 장애인단체는 런던 국회의사당 인근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점거하는 등의 투쟁을 벌이며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영국 대법원은 ‘정부의 자립생활기금 삭감은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장애인복지서비스에 대해 개인예산제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에서 자립생활기금이란 중앙정부 차원의 장애인복지예산과 같다. 장애인은 자신이 가진 자립생활기금 내에서 활동지원인을 직접 고용해 이용하는 등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꾸려간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기금 삭감으로 중증장애인 1만 8000여 명의 활동지원서비스가 중단되는 등 그야말로 삶이 벼랑 끝에 내몰렸다. 이는 당시 보수-자유당의 집권으로 영국에 불어닥친 사회복지예산의 대대적인 삭감과 궤를 같이한다.
이에 대해 디팩은 영국 정부가 협약을 위반했다며 선택의정서에 의거해 유엔에 진정했다. 그로 인해 2015년, 협약 19조(자립생활), 27조(고용), 28조(적절한 생활수준) 위반 여부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조사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한다.
앨렌 클리포드 디팩 활동가는 “위원회가 영국에 직접 방문해서 200여 명에 이르는 증인을 만나 조사했다. 그 결과 2016년 12월, 1천 쪽에 달하는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면서 “보고서에서 위원회는 영국 정부의 중대하고도 조직적인 협약 위반 사례가 있었다고 밝혔다. 2017년에 이뤄진 정기검토에서도 위반 사례가 발견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축소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클리포드 활동가는 “국내법에 협약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 조사 결과가 나와도 정부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면서 “영국 정부는 위원회의 발표를 무시하고 언론에도 위원회 조사 결과 축소를 시도했다. 그러나 우리는 SNS를 통해 보고서 내용을 적극 알리고, 선거철을 활용해 야당 인사들로부터는 협약 이행을 약속받았다”고 밝혔다.
2017년 헝가리에서도 위원회에 직권조사를 요청한 바 있다. 헝가리에서는 대규모 시설에 있는 장애인을 소규모 시설(그룹홈)로 옮기는 일이 자행되고 있었다. 여기에 유럽연합기금이 쓰였다. 위원회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헝가리 인구 960만 명 중 2018년 기준 아동, 노인, 장애인 등 9만 8539명이 시설에 수용되어 있다. 이중 장애인은 2만 4553명으로 두 번째로 많이 수용되어 있다.
유엔 진정을 이끈 발리더티 재단(Validity Foundation)의 스티브 알렌 전무이사는 “위원회 조사로 헝가리가 중대하고 체계적인 장애인권침해를 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시설화 문제도 알릴 수 있었다. 결과보고서는 이후 헝가리어로 번역하여 장애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제공했다”면서 “현재는 1억 8천만 달러(약 2200억 원)의 유럽연합기금이 중단된 상태다. 유럽연합과 헝가리 정부 양측의 진지한 논의 후, 지원금을 향후 어떻게 집행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 국내 인권의식 견인할 제도로 기대 높지만, 절차 지원할 제도 마련엔 고심
이날 토론회 참여자들은 선택의정서 비준 후 일어날 국내 변화에 대한 기대를 밝히면서 이행에 필요한 구체적 절차를 논의했다.
위원회에 대한 진정은 국내에서 활용 가능한 권리구제 절차를 모두 소진했을 때만 가능하다. 즉, 국내법을 뛰어넘은 위원회의 권고가 가능해지며 이는 국내의 인권의식을 견인할 진보적인 제도로 기능할 수 있음을 뜻한다. 게다가 직권조사 청구는 피해 당사자가 아닌 단체도 가능하기에 사회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또 다른 창구로도 활용할 수 있다.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선택의정서 비준의 가장 큰 의미는 유엔에 문제제기함으로써 우리의 권리구제 범위가 매우 넓어진다는 것”이라면서도 “절차에 대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못하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수 있다”고 짚었다.
유엔은 한국 상황을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진정 사건을 영어로 잘 번역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공적인 지원이 필요한 이유다. 이뿐만 아니라 진정 이후 진행 상황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위원회의 결정 이행에 대한 감시가 이뤄져야 한다.
김 사무국장은 “국가가 권고를 이행하지 않을 때 진정인은 민형사상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송과 같은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에서 권고 이행이 이뤄질 수 있도록 압박하는 방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절차를 이행할 공적 기구로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가 가장 적절하다고 밝혔다. 김 사무국장은 “많은 국가에서도 인권기구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인권위가 절차 지원과 향후 이행에 대한 감시, 미이행 시에 대한 조치까지 역할을 맡아 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반면, 독립적인 별도 기구를 설치하자는 의견에는 회의적이라고 밝혔다. 김 사무국장은 “만약 별도 기구를 설치한다면 예산부터 어느 기관 밑에 둘지까지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그사이 긴급하게 비준한 선택의정서를 활용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복지부는 인권침해를 하는 피진정기관이 될 가능성이 크기에 복지부를 담당 기관으로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날 인권위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며 다른 입장을 보였다. 안은자 인권위 장애인차별조사 1과 과장은 “‘개인’이 진정하는 사건에 대해 국가(인권위) 예산을 쓰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또한, “인권위가 진정을 기각한 경우, 사건이 대법원까지 갈 수 있다. 그럼에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경우, 피해자는 유엔에 사건을 진정할 수 있다. 이때 인권위가 기각한 사건을 인권위가 지원하는 게 적절한가”라면서 “따라서 유엔 최종권고에 대한 이행을 촉구하는 것만이 인권위 역할로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고 의견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