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연 활동가 4명 혜화경찰서 자진 출석
“국가의 책임은 왜 묻지 않는가” 규탄
경찰서 엘리베이터 없어…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전장연 “엘리베이터 설치되면 다시 불러달라”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펼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들이 14일 경찰에 자진 출석했다. 그러나 정작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 활동가 네 명은 조사실이 있는 3층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공공기관에 기본적인 장애인 편의시설조차 마련되지 않은 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에 해당한다. 전장연 활동가들은 “조사실로 올라갈 수 있도록 경찰서에 엘리베이터부터 설치하라”면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범법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을 수 없다고 밝혔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우리 헌법은 기본적인 권리를 무시하는 국가에 저항하라고 가리키고 있다”면서 “집시법 등 하위 법률에 의해 유죄로 판결 날지언정, 우리의 투쟁은 정당하며 끝까지 싸울 것이다”고 결의를 다졌다. 이날의 모습은 장애인 활동가들이 왜 이토록 법을 뛰어넘는 ‘과격한’ 투쟁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줬다.
- “지구 끝까지 찾아가 처벌해야 할 대상은 정부 자신”
전장연은 지난해부터 올해 6월말까지 36건의 사건으로 활동가 28명이 경찰에 출석요구를 받았다.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 재물손괴, 일반교통방해, 철도안전법 위반, 기차교통방해 등의 혐의다.
지난해 12월 3일부터 시작된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투쟁 역시 조사 대상에 올라있다. 전장연은 기획재정부에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촉구하며 출근길 지하철 연착 투쟁을 지금까지 총 33차례 진행했다.
지난달 20일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전장연의 시위를 두고 “국민 발을 묶어서 의사를 관철하는 상황이다. 엄격한 법 집행을 통한 법질서 확립이 시대적 과제다”라며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라도 반드시 사법처리하겠다”라고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이에 전장연은 서울경찰청에 직접 찾아가 김 청장을 규탄하며 사과를 요구한 바 있다.
전장연은 김 청장의 발언 이후 서울지역 6개 경찰서(혜화, 종로, 용산, 남대문, 영등포, 수서)에서 활동가들 앞으로 출석요구서가 매일같이 쇄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은 박경석 대표,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문애린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이 혜화경찰서에 출석했다.
전장연 활동가들은 오후 1시 혜화경찰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정한 잘못은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할 책임을 외면한 국가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규식 대표는 “경찰은 교통을 방해한 게 내 죄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건지 아니면 21년을 외쳐도 바뀌지 않는 대한민국이 잘못한 건지 묻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문애린 소장은 “김 청장은 우리를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사법처리하겠다고 했다. 그럼 장애인들을 거리에도 못 나오게 하고, 학교에도 못 가게 하고, 일도 못 하게 한 이 사회에 대해, 우리는 누구를 끝까지 쫓아가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장연은 2001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시작으로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각종 권리와 예산을 요구해왔다. 서울역 지하철 선로 점거 등의 투쟁으로 2005년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이동권’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2006년에는 한강대교 기어가기 투쟁으로 활동지원서비스가 제도화됐다.
전장연의 투쟁으로 장애인의 이동권, 교육권, 활동지원서비스 등은 법에 ‘권리’로 명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싸웠던 이들의 모든 활동은 ‘불법’으로 취급됐다. 애초에 국가가 보장했어야 할 권리가 마련되지 않아 일어났던 일임에도 자신의 책임을 방기해 온 국가, 지차체는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김두나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장애인 권리 보장을 외치는 목소리를 위축시키기 위해 활동가들 몇 명을 수사하고 처벌한다고, 이 문제는 사라지지도 해결되지도 않는다”면서 “지구 끝까지 찾아가 처벌해야 할 대상은 활동가들이 아니라, 수십 년간 제대로 된 정책을 마련하지 않은 정치권과 정부 자신”이라고 지적했다.
- “왜 사회적 약자에게만 가혹한 것인가”
힘없는 이들만 처벌하고 힘 있는 이들은 봐주는 국가의 태도는 비단 장애인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전장연 활동가들이 혜화경찰서에 출석하기 하루 전인 13일에는 ‘경제 형벌 규정 개선 태스크포스(TF)’ 첫 회의가 열렸다. 14개 정부 부처 차관이 참여한 이 티에프는 기업인에 대한 처벌을 행정제재 수준으로 완화하기 위해 출범했다.
이를 두고 이형숙 회장은 “기본적인 권리를 외치는 장애인들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 사법처리하겠다면서, 왜 경제사범은 처벌하지 않으려 하나. 너무나 불평등하다”고 분노했다.
또한 이날 오전에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을 비난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 장관은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에서 “선박 점거행위는 명백한 불법행위”라며 “비조합원들의 피해를 당연시하는 노동운동은 주장의 정당성 여부와 관계없이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에 대해 “왜 우리 사회는 이토록 사회적 약자에게만 가혹한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천성호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은 “2001년부터 투쟁을 계속하며, 수없이 많은 조사를 받고 벌금을 맞아왔다”면서 “그러나 자유를 향한 장애인들의 투쟁은 법으로 단죄할 수 없는 것”이라며 활동가들의 무죄를 주장했다.
- 코앞까지 와도 조사하지 못하는 경찰
조사실로 향하기 전, 박경석 대표는 혜화경찰서 건물과 관련해 변호사에게 법률자문을 받은 내용을 발표했다. 공공기관인 경찰서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라 장애인에 대한 정당한 편의 제공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 골자였다.
현재 혜화경찰서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지 않다. 전장연 조사를 담당하는 지능범죄수사팀은 본관 3층에 있어,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접근할 수 없다.
박 대표는 “혜화경찰서장과 서울경찰청장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위반한 범법자다. 범법자가 어떻게 우리를 조사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엘리베이터가 설치될 때까지 우리는 조사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자진 출석한 활동가 4명이 본관 1층에 다다르자, 양일홍 혜화경찰서 경무과장이 나왔다. 양 과장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사실을 인정하냐는 박 대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건물이 오래돼서 그렇다. 예산 문제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내년에 건물을 새로 지을 예정이다. 앞으로 노력하겠다”고만 대답했다.
활동가들은 양 과장에게 법률자문서를 전달하고 돌아섰다. 지구 끝까지 찾아가겠다던 경찰은 피의자들이 직접 코앞까지 찾아왔음에도 조사하지 못했다. 박 대표는 “우리는 도망갈 생각 없고, 성실히 조사에 응할 것”이라면서 경찰서의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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