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 장애인편의시설 없는데 출석요구서 발송
전장연 조사거부 후 김광호에 모의재판 출석 요구
“지구 끝까지 찾아가겠다”고 한 김광호, 출석 안 해
모의재판서 배심원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
장애인권리예산을 보장하라고 외친 장애인을 “지구 끝까지 찾아가 사법처리하겠다”고 말한 김광호 서울경찰청장. 출석요구서를 받은 장애인이 경찰서에 자진 출석했지만 엘리베이터가 없어 조사실로 올라가지 못했다. 이에 장애인은 “경찰서에 장애인편의시설부터 설치하라”며 조사를 거부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는 29일 오후 3시, 국회에서 국민참여모의재판을 열었다.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김광호 청장이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위반해 유죄라고 평결했다. 재판장은 배심원 평결을 반영해 벌금 3천만 원을 선고했다.
재판장 역할을 맡은 조영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아래 민변) 회장은 “큰 피해가 지속해서 일어나고 있고 김 청장이 이를 방치하며 차별행위를 하는 점을 보면 고의성이 충분하다”며,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규정하는 “악의적 차별행위”를 행했다고 판결했다.
- 전장연, 모의재판 열어 김광호에 출석 요구
전장연은 지난해 12월부터 장애인권리예산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매일 오전 8시 삼각지역에서 열리는 삭발투쟁은 99차, 출근길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연착 투쟁은 35차 진행됐다(29일 기준).
김광호 청장은 취임하자마자 전장연을 겨냥해 강경대응을 예고한 바 있다. 지난 6월 20일, 취임 뒤 열린 첫 기자간담회에서 전장연을 향해 “국민 발을 묶어 의사를 관철하는 불법행위는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라도 반드시 사법처리하겠다”고 말해, 전장연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공분을 샀다.
지난해부터 올해 6월 말까지 36건의 사건으로 전장연 활동가 28명이 경찰로부터 출석요구를 받았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 재물손괴, 일반교통방해, 철도안전법 위반, 기차교통방해 등의 혐의다.
전장연은 지난달 14일, 혜화경찰서를 시작으로 용산경찰서, 종로경찰서에 순차적으로 자진출석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찰서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어 이용자는 조사실에 올라갈 수 없었다. 전장연은 경찰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인을 차별하는 범법기관으로부터 조사받을 수 없다”며 조사를 거부했다.
7월 19일 용산서 출석 당시엔 김광호 청장 앞으로 공문을 보냈다. 서울시 내 경찰서와 파출소의 장애인편의시설 설치 여부를 전수조사하고 결과를 발표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김 청장은 아무런 답변 없이 전장연 사건을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남대문경찰서 한 곳에서 병합수사 하겠다는 입장만 밝혔다.
이에 대해 전장연은 지난 2일 서울경찰청 앞으로 찾아가 기자회견을 열고 “남대문서 병합수사는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등편의법) 위반을 가리려는 꼼수”라며 김 청장을 규탄하고 국민참여모의재판에 피고인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했다.
- 전국서 모인 배심원 10명, 인권변호사들이 재판장·검사 등 역할
그러나 “전장연을 지구 끝까지 찾아가겠다”고 한 김 청장은 정작 전장연이 출석을 요구하자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이날 모의재판은 김 청장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됐다.
재판장, 검사, 김광호 청장 변호인은 인권변호사들이 맡았다. 재판장은 조영선 민변 회장이, 검사는 김남희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교수가, 피고인 김광호 청장 측 변호인은 장서연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가 맡아 모의재판을 진행했다.
검사 측에서 요청한 증인은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아래 서울시협의회) 회장이다. 이형숙 회장은 용산서 등으로부터 출석요구를 받은 장애인 당사자다. 변호인 측은 경찰을 증인으로 요청했으나, 김광호 청장을 포함해 아무도 응하지 않아 박철균 전장연 조직국장이 경찰 연기를 해야 했다.
국민참여모의재판은 ‘장애인차별철폐법원’이라 이름 붙인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장애인 활동가와 취재진 등 50여 명이 재판을 방청하고, 유튜브 실시간 중계 영상은 30여 명이 시청하는 등 총 80여 명이 재판을 지켜봤다. 모의재판 배심원 열 명은 장애유무, 연령, 성별, 지역 등 다양한 배경을 고려해 꾸려졌다.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온 배심원도 있었다.
- 서울시 내 경찰서 30%는 ‘노 장애인 존’
검사는 장애인차별금지법 49조에 따라 피고인 김광호 청장이 장애인을 향해 “악의적 차별행위”를 행했다고 주장했다. 49조는 차별의 고의성, 지속성 및 반복성, 보복성, 차별 피해의 내용 및 규모에 따라 “악의적 차별행위”를 판단하여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검사가 증거로 공개한 ‘2022년 7월 경찰서 장애인편의시설 점검 현황표’에 따르면 지난 7월을 기준으로 서울시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경찰서는 혜화서, 용산서, 종로서 등 총 10곳이다. 서울시 내 31개 경찰서의 32.3%에 이른다.
엘리베이터 외에도 대소변기, 점자블록, 장애인접수대 등 장애인편의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곳도 많았다. 점검표 상 14개 항목의 편의시설을 모두 갖춘 곳은 성북경찰서, 마포경찰서 등 12개밖에 없었다.
용산경찰서의 경우, 1층 현관문 앞에 경사로가 있으나 경사로 각도가 심해 휠체어 이용자가 홀로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검사는 증인 이형숙 회장이 용산서 경사로에서 비장애인 두 명의 지원을 받으며 위태롭게 내려가는 사진을 증거로 제출했다. 검사가 “용산서는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인가”라고 질문하자 이 회장은 “갈 수 없다. 사진에 나온 것보다 경사가 더 급하다. 붙잡아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는 못 가는 각도”라고 설명했다.
- 1층 임시조사실, 타 경찰서 병합수사는 ‘차별’
김광호 청장 측 변호인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경찰서 1층에 마련된 임시조사실을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정당한 편의제공”이라 주장했다. 또한 이 회장을 반대신문하며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남대문서에 사건을 이송해 조사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 회장은 “그건 장애인 차별이기 때문에 그렇게 조사받을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제 학급은 국민학교 6년 내내 1층 첫 번째 교실이었습니다.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언제나 1반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제게 ‘너 때문에 다른 교실에 못 간다’고 말했을 땐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법이 있지 않습니까?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는데도 경찰은 지키지 않습니다. 비장애인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경찰서에서 병합수사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장애인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형숙 서울시협의회 회장)
또한 이 회장은 과거 경찰 조사 때 1층에 마련된 임시조사실에서 조사받은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재판장이 “1층에서 조사받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가”라고 묻자 이 회장은 “지문확인도 안 되고, 수사관은 내 주민등록증을 들고 위층과 1층을 왔다 갔다 했다. 조사시간이 계속 지연됐다”고 증언했다.
이 회장은 “장애인등편의법 제정 24년,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14년이 지났다. 경찰은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뭘 했나? 경찰서가 완전히 장애인편의시설을 갖출 때까지 조사받지 않으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 1년 예산 0.03%면 서울시 내 모든 경찰서 엘리베이터 설치 가능
변호인은 김광호 청장과 경찰 측이 기존에 밝힌 입장을 반복했다. 우선 “혜화서, 용산서, 종로서는 장애인등편의법 제정 이전인 1998년에 지어진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아도 위법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 청장의 차별에 고의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건물이 낡아 엘리베이터를 짓기 어렵고, 짓더라도 예산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편의시설을 제공하지 않아도 되는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변호인 증인신문에 나온 박경찰 씨(박철균 전장연 조직국장)는 “용산서는 1979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고 현재 신청사를 짓고 있어서 구건물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건 과도한 부담이며 예산 낭비”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검사는 경찰 한 해 예산의 0.03%만 쓰면 충분히 엘리베이터 설치가 가능하기에, 이는 ‘과도한 부담’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2021년 경찰청 한 해 예산은 11조 9651억 원이며, 4층 건물의 엘리베이터 설치 비용은 약 4억 원가량 된다. 서울시 내 엘리베이터 없는 경찰서가 열 곳이니 총 40억 원이면 가능하다.
“40억 원은 경찰청 1년 예산 12조 원의 0.03%입니다. 이 정도면 서울청 산하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을 장애인 직원, 경찰서에 매일 출입하는 장애인과 노약자의 접근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예산이 ‘과도하다’며 수십 년간 많은 사람의 어려움을 방치했습니다. 0.03%가 증인이 이야기하는 ‘과도한 부담’입니까?” (검사)
따라서 검사는 △1년 예산의 0.03%도 사용하지 않은 점(고의성) △이런 행위가 수십 년간 지속했다는 점(지속성 및 반복성) △김광호 청장이 “지구 끝까지 찾아가 사법처리 하겠다”고 협박한 점(보복성)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아 많은 사람이 긴 시간 피해를 본 점 등을 설명하며 징역 1년을 구형했다.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 배심원 만장일치로 김광호에 유죄 평결…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점 참작해 벌금 3천만 원 선고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김광호 청장을 유죄라고 평결했다. 재판장은 이를 반영해 김광호 청장에 벌금형 3천만 원을 선고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상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기관은 장애인을 차별해서는 안 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서울경찰청 소관 산하 경찰서 열 곳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고 장애인을 차별했다.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이 사법, 행정절차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제한, 배제, 분리되도록 했으며 피고인에게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 (재판장)
또한 재판장은 검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경찰서 열 곳에 외부용 승강기를 설치하는 비용은 경찰청 1년 예산의 0.03%에 불과해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이 있다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큰 피해가 지속해서 반복되고, 오랜 기간 이를 방치하여 차별행위를 하는 점을 보면 고의성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더불어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을 부인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점은 양형에 불리한 요소다. 그러나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차별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두 피고인에게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점을 형에 참작한다”며 벌금 3천만 원을 선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