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참정권 침해 여전히 심각하지만
사과조차 없는 중앙선관위, 장애계 규탄
공직선거법 왜곡이라는 지적도
“지방선거 전까지 재발 방지 대책 마련하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전경. 사진 이슬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전경. 사진 이슬하

지난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 장애인 유권자의 참정권이 또다시 침해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13일 오전 11시 장애계는 경기도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아래 중앙선관위)를 항의방문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도 70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2월 법원은 중앙선관위가 돌연 중단한 발달장애인 투표보조를 3·9 대선부터 재개하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도 투표보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례가 속출했다.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대응팀(아래 참정권 대응팀)은 중앙선관위를 규탄하며 오는 6월 1일에 있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전까지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 발달장애인 투표보조 다시 받을 수 있게 됐는데, 현장은 달랐다

장애인 유권자의 참정권이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 투표보조는 중요하다. 공직선거법 역시 장애인은 투표보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선관위는 공직선거법이 ‘시각 또는 신체장애인’에 대한 투표보조만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선거사무지침상 투표보조 대상에 발달장애인은 제외해왔다. 이에 대해 장애계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자, 지난 2016년 중앙선관위는 투표보조 지침에 ‘지적·자폐성 장애 포함’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하지만 발달장애인이 투표보조를 받을 권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앙선관위는 지난 2020년 4월에 시행된 21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발달장애인 투표보조를 지침에서 삭제했다. 4년의 세월을 거꾸로 돌린 것이다.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가 3행시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참말로! / 정말로! 화가 난다! / 권리 무시하는 선관위는 각성하라!” 사진 이슬하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가 3행시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참말로! / 정말로! 화가 난다! / 권리 무시하는 선관위는 각성하라!” 사진 이슬하

이에 장애계는 지난해 11월 발달장애인 투표보조 지원에 관한 임시조치를 법원에 신청했다. 지난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 50부(재판장 송경근)는 강제조정을 통해 중앙선관위의 선거사무지침 중 ‘자신이 혼자서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에 ‘발달장애인’을 포함하도록 수정하라고 결정했다. 이로써 발달장애인은 3·9 대선부터 투표보조를 다시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3월 4일과 5일 양일간 치러진 사전투표에서 발달장애인의 투표보조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참정권 대응팀은 3월 9일 본투표에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중앙선관위에 공문을 보냈으나, 본투표 날에도 별다른 개선은 없었다. 현장에서 발달장애인 투표보조가 거부되자 항의하다 못해 투표용지를 찢고 기권하는 일까지 있었다.

김수정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장은 “법원의 임시조치가 내려졌다고 해서 지난 2020년 총선과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의 혼란이 줄어들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막상 대선 투표 날이 되자 지침을 전달받은 적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선관위 직원들로 인해 투표보조를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투표사무원이 동반투표는 안 된다며 막무가내로 거부하는 바람에 한바탕 싸우고서야 (기표소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며 현장의 혼선을 방치한 중앙선관위를 규탄했다.

김기백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이슬하
김기백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이슬하

- “중앙선관위가 공직선거법 왜곡하고 있다”

“저는 너무 화가 납니다. 발달장애인이 투표를 못 하고 쫓겨나는 게 몇 년째입니까? 중앙선관위는 언제까지 우리 발달장애인이 이런 식으로 투표장에서 쫓겨나도록 만들 것입니까? 만약 장애인 당사자가 아닌 비장애인이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한겨레, 경향, 조선, 중앙 가릴 것 없이 신문 1면에 부정선거라고 커다랗게 뜰 것입니다. KBS, MBC, JTBC, TV조선 메인 뉴스 첫 꼭지에 올라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발달장애인이 투표소에서 쫓겨나는 일은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데도 왜 무시되는 건지, 정말 답답하고 화가 납니다.” (김기백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

투표보조 임시조치 소송대리인으로 참여한 최초록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임시조치 소송 당시) 선관위는 ‘앞으로 발달장애인이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는 거냐’는 판사의 질문에 ‘그렇다. 이번 선거(3·9 대선) 때부터 가능하다’고 대답했다”며 말을 뒤집은 중앙선관위를 비판했다. 그는 “(중앙선관위가) 이 상태를 그대로 두는 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이며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반한다”고 힘줘 말했다.

최 변호사는 중앙선관위가 공직선거법의 취지를 왜곡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공직선거법은 ‘발달장애인을 투표보조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하고 있지 않다. 단지 시각 또는 신체장애인이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투표보조 대상에) 어떤 유형의 장애인이 포함되는지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장애유형을 불문하고 투표보조가 필요한 장애인이라면 모두 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직선거법의 취지에 맞다”고 말했다.

최초록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그의 뒤로 “발달장애인도 대한민국 국민이다”라고 적힌 피켓이 보인다. 사진 이슬하
최초록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그의 뒤로 “발달장애인도 대한민국 국민이다”라고 적힌 피켓이 보인다. 사진 이슬하

- 투표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애인들

참정권 대응팀에 20대 대선 장애인차별 사례로 접수된 사건은 63건이나 된다. 발달장애인 투표보조 문제 외에도 고질적인 장애인 참정권 침해 사례들이 수두룩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인 ㄱ 씨는 서울시 송파구 장지동 사전투표소를 찾았다. 투표소는 2층에 있었으나 접근이 되지 않아 1층에 마련된 임시기표소에서 투표하게 됐다. 1층에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활동지원사를 통해 서명을 하자 직원이 투표용지를 가지고 내려왔다. 활동지원사가 투표보조를 하려 하자 다른 직원은 ㄱ 씨 혼자서 해야 한다며 투표보조를 제지했다. 실랑이가 벌어지는 사이 투표를 하러 온 코로나19 확진자들이 들어서면서 현장이 어수선해지는 바람에 ㄱ 씨는 투표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본투표 날 투표장을 다시 찾은 ㄱ 씨는 투표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미 3월 5일 5시 37분에 투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CCTV 확인 등을 요청하며 2시간이나 항의했으나 ㄱ 씨는 결국 투표를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피켓에는 “공직선거법 내용도 모르는 선거사무원”, “법원 임시조치 투표보조 방해 선관위 규탄”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이슬하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피켓에는 “공직선거법 내용도 모르는 선거사무원”, “법원 임시조치 투표보조 방해 선관위 규탄”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이슬하

뇌병변장애인 ㄴ 씨가 찾은 경상남도 진주시 가호동 제4투표소는 입구에 계단이 있음에도 경사로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경사로가 있는 후문은 이용하지 못하게 잠가놨다. 결국 ㄴ 씨는 입구 밖에 있는 임시기표소에서 투표할 수밖에 없었고, 기표한 투표용지를 직접 투표함에 넣지 못했다.

이승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활동가는 “이번 대선 코로나 확진자 사전투표 때 기표한 투표용지를 바구니에 담아 투표함으로 옮기는 일이 있자 난리가 났다. 노정희 중앙선관위원장이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 장애인 유권자들은 그런 참정권 침해를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겪어왔는데도 사과 한번 받은 적 없다”고 꼬집었다.

- 장애계, 중앙선관위 책임자 면담 요구

이번 대선에서도 반복된 장애인 참정권 침해와 관련해 참정권 대응팀은 지난 6일 중앙선관위에 면담을 요청했으나, ‘책임자 일정이 안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는 “우리는 더 이상 장애인의 참정권이 침해돼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중앙선관위에 면담을 요청했다. 그런데 중앙선관위는 국회 출석 때문에 일정이 안 된다는 이유로 책임자를 만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다”라고 말했다.

참정권 대응팀은 지방선거가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중앙선관위가 이번 달 안에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최용기 대표 등은 책임자 면담을 다시 요청하기 위해 중앙선관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면담요청서를 전달하기 위해 찾은 중앙선관위 민원실은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공간이 협소했다. 김성연 장추련 사무국장이 “휠체어 이용 장애인 1명도 접근이 어려운 이런 좁은 데서 만나야만 했나”라며 문제제기하자 중앙선관위 직원은 “건물이 오래돼 마땅한 곳이 없었다”고 했다. 최용기 대표는 “투표소나 여기나 장애인이 못 들어가는 건 똑같다. 이게 장애인의 현주소”라고 일갈했다.

이날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대선 과정에서의 장애인 참정권 침해에 대한 사과는 없이 “임시조치 결정사항은 현장에 전달하고 교육을 진행했다. 아마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이 안 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공직선거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발달장애가 있다는 것만으로 인력지원은 어렵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김대범 피플퍼스트 활동가가 중앙선관위 직원에게 면담요청서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이슬하
김대범 피플퍼스트 활동가가 중앙선관위 직원에게 면담요청서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이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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