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30년 넘었지만 유명무실
중증장애인의 80%가 비경제활동인구
기존 중증장애인 일자리 사업은 실적 중심
실적 못 채운 중증장애인 당사자, 스스로 목숨 끊어
법과 제도 개선 절실… 전권협 ‘중증장애인고용법’ 제정 촉구

“나는 최중증장애인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내게는 일할 권리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일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일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나와 같은 중증장애인도 많이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확대해 주십시오. 나는 앞으로도 내 권리를 위해 투쟁할 것입니다.” (조정민 씨)

“언제까지 말로만 보장할 것입니까? 몇 명이 더 죽어야 보장할 것입니까? 점점 앞날이 참담해집니다. 우리의 목소리는 단 하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보장! 100% 보장!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이찬우 씨)

“작년부터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서 일하면서 나도 일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전에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싶었지만 쉽게 구할 수 없었어요. 사회에서 배제된 채 살다가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참여했고 지금 일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게 너무 행복합니다. 제게는 노동권이 보장된 평생 직장이 필요합니다.” (신동권 씨)

“지금 일하고 있습니다.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박미주 씨)

“권리중심공공일자리 5천 개 만들어라!” (서덕규 씨)

조정민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가 문화예술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조정민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가 문화예술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땡볕이 내리쬐다가 비가 쏟아지던 17일 오후 2시,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 400여 명이 서울시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 모여 결의대회를 열었다. 고용노동부에 중증장애인고용촉진특별법(가칭, 아래 중증장애인고용법) 제정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아래 전권협)는 고용노동부에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제도화’를 지속해서 요구해 왔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여전히 실적 중심의 기존 사업만 고집하고 있다. 2019년 12월, 실적을 못 채운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지만 노동부는 별 대책이 없는 상태다.

이에 전권협과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은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고용노동부를 규탄하고 중증장애인고용법을 하루 빨리 제정하라고 요구했다.

문애린 소장이 발언 중이고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 모인 활동가들이 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 하민지
문애린 소장이 발언 중이고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 모인 활동가들이 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재활’ 가능한 경증장애인만 고용하는 장애인고용촉진법

장애인 고용 관련 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중증장애인의 비경제활동인구(만 15세 이상 인구 중 일할 능력이 없거나, 일할 능력이 있음에도 의사가 없는 사람) 비율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노동부 소관인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아래 장애인고용촉진법)은 올해로 제정 32년차에 접어들었다. 이 법에는 장애인 의무고용제도, 고용장려금제도, 근로장애인 고용지원 정책 등 장애인이 노동하며 살아갈 권리와 이를 지원해야 할 국가의 의무가 명시돼 있다.

중증장애인, 경증장애인, 전체 국민의 고용률, 실업률, 비경제활동인구비율을 나타낸 표. 중증장애인 고용률 24.1%, 실업률 7.1%, 비경제활동인구비율 76.2%. 경증장애인 고용률 40.3%, 실업률 6.8%, 비경제활동인구비율 56.7%. 전체 국민 고용률 60.4%, 실업률 3.5%, 비경제활동인구비율 37.4%. 표 제공 전권협
중증장애인, 경증장애인, 전체 국민의 고용률, 실업률, 비경제활동인구비율을 나타낸 표. 중증장애인 고용률 24.1%, 실업률 7.1%, 비경제활동인구비율 76.2%. 경증장애인 고용률 40.3%, 실업률 6.8%, 비경제활동인구비율 56.7%. 전체 국민 고용률 60.4%, 실업률 3.5%, 비경제활동인구비율 37.4%. 표 제공 전권협

그러나 중증장애인 비경제활동인구 비율은 거의 그대로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중증장애인 비경제활동인구 비율은 약 78% 수준에 머무르며 소폭으로 상승했다가, 줄어들었다가 할 뿐이다. 현재는 지난해 기준 76.2%다. 이는 경증장애인(56.7%), 전체 국민(37.4%)에 비해서도 한참 높은 수준이다.

전권협은 “장애인고용촉진법을 기반으로 한 정책은 당장 일할 준비가 돼 있는 경증장애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중증장애인 고용촉진과 노동권 보장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박경석 전권협 대표가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박경석 전권협 대표가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박경석 전권협 대표도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된 지 32년이 지났지만 중증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 노동부가 장애인 중에서도 ‘능력’ 있는 장애인, ‘재활’이 가능한 장애인을 중심으로만 정책을 펼치며 중증장애인을 배제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 실적 중심의 정부 사업 때문에 노동자 스스로 목숨 끊기도

노동부는 2019년부터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지원 사업(아래 동료지원가 사업)을 시행했다. 동료지원가가 취업을 희망하는 중증장애인을 발굴해 상담하는 사업이다.

중증장애인 당사자인 고 설요한 씨는 이 사업에 참여해 동료지원가로 활동하다 2019년 12월 5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설 씨는 실적 압박을 받으며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혼자서 40명의 중증장애인을 발굴해야 했고, 1년에 240회 상담을 해야 했으며, 300여 개의 서류를 준비해야 했다. 월급은 최저임금에 반도 못 미치는 80만 원이었는데,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이마저도 반납해야 했다.

‘이것도 노동이다 disabilty pride’라고 적힌 노란색 깃발을 흔들며 ‘투쟁’을 외치는 문애린 소장. 그가 목에 건 피켓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성, 효율성 중심 노동세계 OUT’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이것도 노동이다 disabilty pride’라고 적힌 노란색 깃발을 흔들며 ‘투쟁’을 외치는 문애린 소장. 그가 목에 건 피켓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성, 효율성 중심 노동세계 OUT’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문애린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노동부가 만든 동료지원가 사업 일자리는 중증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아니었다. 장애인 이동권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서 장애인을 만나러 다니며 실적을 채워야 하는 일자리였다”고 비판했다.

전권협 또한 “중증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일자리다. 설요한 씨 죽음 이후 동료지원가 사업이 개편됐지만 중증장애인 노동자가 지속해서 노동할 수 있는 환경은 여전히 조성되지 않았다”고 규탄했다.

-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제도화 위해 중증장애인고용법 제정돼야

경증장애인 중심의 현행법과 실적 중심의 제도를 넘어, 중증장애인의 고용을 실질적으로 촉진할 정책이 필요하다. 따라서 전권협은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제도화를 위한 중증장애인고용법 제정을 노동부에 요구하고 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자본주의 시장 내에서 ‘노동할 수 없는 몸’으로 여겨지는 최중증장애인을 우선 고용하는 일자리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유엔장애인권리협약 홍보를 권고했는데, 그 역할을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가 한다. 구체적으로 권익옹호, 문화예술, 장애인식개선교육 등 세 가지 직무를 수행한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자본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가치 창출이 목표다. 공공의 가치란 ‘장애인의 권리’다. 이때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는 ‘권리 생산’의 주체가 된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돼 배제됐던 증증장애인이 그들 스스로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노동’이 된다. 이날 결의대회에 참석해 “나는 일하고 있습니다.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발언하며 중증장애인 권리를 외친 것이 ‘권리 생산 노동’이 되는 것이다.

안산단원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문화예술팀이 문화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안산단원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문화예술팀이 문화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현재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지자체 별로 제각각 시행되고 있다. 서울시, 경기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춘천시 등에서 전액 지자체 예산으로만 운영 중이다. 각 지자체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수는 약 700여 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여러 지자체로 확대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나, 중증장애인 수가 약 100만 명, 고용률이 약 24%뿐인 걸 생각하면 700여 개는 턱없이 부족하다.

전권협은 “노동부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중증장애인 고용의무를 지자체에 떠넘겨 중증장애인을 열악한 상황에 방치한다. 현재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지역별로 쪼개져 제각기 시행 중이고 서울을 제외하면 12개월 고용을 보장하는 지역이 없어 퇴직금도 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전권협은 중증장애인고용법 제정을 통해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정부가 제도화해,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일자리 5천 명 보장을 촉구했다.

전권협은 “중증장애인고용법을 제정하면 국가가 중증장애인을 고용할 법적 근거가 생긴다. 또한 중증장애인이 최저임금 이상을 보장받으며 일할 수 있는 고용환경이 마련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결의대회에 참석한 활동가. 그가 목에 건 피켓에는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노동을 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결의대회에 참석한 활동가. 그가 목에 건 피켓에는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노동을 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또한 전권협은 중증장애인고용법을 통해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제도화 및 확대뿐 아니라 전담인력도 1천 명으로 확대하라고 요구한다. 전담인력은 중증장애인 노동을 지원하는 인력인데 현재 수가 턱없이 부족해, 전담인력 1명이 20명 이상의 중증장애인을 지원하고 있다.

이외에도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사업 기간 12개월 보장 △동료지원가 예산 34억 원 편성 △근로지원인 1만 7000명으로 확대 등도 요구했다.

전권협과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는 오후 3시경 결의대회를 끝내고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서 마로니에공원까지 약 3km를 행진했다.

행진하는 활동가들. 경찰 수십 명이 에워싸고 있다. 사진 하민지
행진하는 활동가들. 경찰 수십 명이 에워싸고 있다. 사진 하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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