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전장연 ‘제35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전개
윤 대통령 취임 100일 맞아 기자회견 열었지만…
“장애인의 ‘지읒(ㅈ)’ 자도 안 들리더라”
전장연 “윤 대통령 응답할 때까지 계속 투쟁할 것”
윤석열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는 17일, 장애인들이 또다시 출근길 지하철을 멈춰 세웠다. 이들은 윤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장애인권리예산을 보장하라고 요구했지만, 윤 대통령은 인수위원회를 거쳐 취임 100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는 ‘제35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00일 넘게 장애인의 권리를 외면한 윤 대통령을 규탄했다.
지하철 투쟁이 한창인 오전 10시, 윤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도 장애인권리예산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지하철 안에서 중계를 지켜본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장애인의 ‘지읒(ㅈ)’ 자도 안 들리더라”고 한탄했다. 이날 윤 대통령은 ‘작은 정부’를 기치로 규제 완화, 법인세제 정비 등 그동안 다른 분야에서 추진해온 정책들을 열거하는 데 모두발언 시간을 할애했다. 장애 문제는 윤석열 정부의 ‘주요한 국정과제’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다.
- 9개월째 이어진 시위에도 묵묵부답인 윤석열 정부
전장연은 장애인권리예산을 요구하며 지난해 12월 3일부터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고 있다.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시작한 삭발 투쟁도 현재 총 91차 진행했다. 장애인권리예산은 장애인의 이동권·교육권·노동권·탈시설 권리를 위한 예산으로, △특별교통수단 운영비 국비 지원 △장애인평생교육시설 운영비 국비 지원 △활동지원서비스 하루 최대 24시간 보장 △탈시설 예산 807억 원 등을 포함한다. 전장연은 OECD 평균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우리나라 장애인예산을 OECD 평균 수준으로 늘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1일 ‘제34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벌인 전장연은 윤 대통령의 답변을 기다리겠다며 연착 투쟁을 중단했다. 지난 8일에는 대통령 민원실에 예산 보장 약속을 촉구하는 공문도 접수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한편, 윤 대통령은 지난 15일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장애인들의 일상생활이 불편하지 않도록 돌봄서비스를 대폭 보강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를 두고 박경석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의 이야기는 원론적인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우리가 21년 동안 들어온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 ‘장애인을 위해 열심히 하겠다’, ‘여러분 마음 이해한다’고 하면서 정작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 그것이야말로 요즘 정치권에서 이야기하는 ‘양두구육(羊頭狗肉,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겉보기만 그럴듯하게 보이고 속은 변변하지 않음을 뜻함)’이다”라고 꼬집었다.
권달주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우리는 지난해 12월 3일부터 승객들에게 욕을 먹어가며 출근길에 지하철을 탔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100일이 될 동안 장애인권리예산에 대해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면서 “각 부처도 기재부도 청와대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우리는 다시 지하철을 타며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자’는 21년의 외침을 다시 알리겠다”고 힘줘 말했다.
- “장애인의 권리 보장, 비장애인의 허락이 필요한 문제 아니다”
이들은 30분가량의 짧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오전 8시경, 4호선 삼각지역에서 지하철 탑승을 시작했다. 열차 문 사이로 출근 복장의 승객들이 쏟아져 나오자, 상복을 입은 활동가들이 “장애인권리예산 보장하라”고 적힌 가관(假棺)을 들고 지하철에 올랐다. 철창 수레 안에 들어가 쇠사슬로 몸을 감은 권달주 대표가 뒤를 이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활동가 20여 명도 세 칸에 나눠 탔다. 이 과정에서 열차는 약 11분간 정차했다.
좁은 틈을 비집고 열차에 올라타는 장애인들을 승객들은 위에서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거장마다 장애인들이 승하차를 반복하며 열차를 지연시키자, 승객들의 분노는 점점 커졌다. 승객들은 의도적으로 활동가들을 밀치고 내리며 분노를 표현하기도 했다. 욕설 역시 난무했다.
“방법이 잘못됐다고! 왜 우리한테 지랄하냐고!”
“출근 시간 피해서 하면 되잖아요.”
“장애인 내세워서 일반시민 볼모로 잡는 거잖아!”
“이렇게 해서 돈 받아먹으려는 거 모르는 줄 알아?”
“이렇게 하면 여론이 더 나빠져요.”
한 중년 남성은 상복을 입고 가관을 든 활동가를 보고서는 “누가 죽었어요? 오버하지 마세요”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장애인 활동가들은 마이크를 잡았다.
“20년 전, 초등학생이던 저의 이동수단은 어머니의 등이었습니다. 그때는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할 수 없는 것은 물론, 휠체어도 제대로 보급이 안 되던 시기였습니다. 어머니의 등을 빌려 학교를 다니던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처음으로 음악실에 가봤습니다. 이후 전동휠체어가 생겨 혼자 등하교하며 학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세상이 변하며 저도 조금씩 이동하고 교육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래의 장애인들을 위해 저는 오늘 이렇게 지하철에 나왔습니다.” (안일환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활동가)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단체로 KTX를 타고 여행을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KTX에는 전동휠체어가 2대밖에 타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시간 차를 두고 기차를 여러 대 예약해 두 명씩 따로따로 여행을 갑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열차에서 같이 도시락을 먹으며 가는 여행을 우리는 하지 못합니다.” (서권일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활동가들은 오전 9시경에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반대 방향 열차를 탄 이들은 사당역에서 다시 반대편 지하철을 타고 오전 11시경 삼각지역으로 돌아왔다.
박경석 대표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 권리는 다른 시민의 동의와 허락으로 보장되는 게 아니다. 시혜와 동정에 기대 비장애인이 공감해야지만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가 획득되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전장연은 윤 대통령의 답변이 있을 때까지 출근길 지하철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