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에게 머리카락은 신체이자 영혼”
133개 투쟁결의문에 차별에 대한 증언 고스란히
30일 국무회의서 내년도 예산안 의결
활동지원예산, 전장연 요구안보다 1조 원 적어
장애인권리예산 외면한 윤 정부… “분노스럽다”

삼각지역 벽에 붙은 현수막에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촉구 삭발결의식 2022.3.30~ 100일차의 기록’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문구 아래에 삭발 투쟁 참여자들의 사진과 이름이 나열돼 있다. 사진 하민지
삼각지역 벽에 붙은 현수막에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촉구 삭발결의식 2022.3.30~ 100일차의 기록’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문구 아래에 삭발 투쟁 참여자들의 사진과 이름이 나열돼 있다. 사진 하민지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진행해 온 삭발 투쟁이 30일로 100일차를 맞았다. 5개월간 삭발한 활동가는 30일 삭발결의자를 포함해 총 133명이다. 3월 30일에 첫 번째로 삭발한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아래 서울시협의회) 회장은 머리카락이 곱슬하게 자랐다.

정부는 133명이 머리카락을 잘라가며 요구한 장애인권리예산 요구를 사실상 거절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는 활동지원서비스 24시간을 요구하며, 이에 따라 다음해 예산을 기존 1조 7천억 원에서 2조 9천억 원으로 1조 2천억 원을 증액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30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보건복지부 예산안에 따르면 2023년 활동지원서비스 예산은 고작 2천억 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문재인 정부 때인 지난해 증액 폭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전장연은 30일 오전 8시, 삼각지역 삭발투쟁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자연증가분 정도만 반영된 금액”이라며, 윤석열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했다.

삭발 투쟁 100일차 기자회견 현장. 많은 취재진이 참여했다. 사진 하민지

- 장애인이 유일하게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신체, 머리카락

“미용실에 가서 이발하는 것도 어려워 아버지는 제 머리를 빡빡 깎으셨습니다. 언젠가는 마음대로 머리를 길러보고 싶었던 게 한때 소원이었습니다. (중략) 머리를 깎는다는 행위가 아무렇지 않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머리조차 내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했던 중증장애인들이 지금까지 길렀던 머리를 깎는 것은 신체 일부를 자르는 것과 같습니다.” (4월 8일, 8차 삭발결의자 박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조직실장 투쟁결의문 중)

“제게 머리는 제가 꾸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그런 머리를 밉니다. 그만큼 절박하기에,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이 제 머리보다 절박하기에 삭발합니다.” (4월 12일, 10차 삭발결의자 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투쟁결의문 중)

‘투쟁’을 외치는 활동가들. 사진 하민지
‘투쟁’을 외치는 활동가들. 사진 하민지

바리캉 아래 앉은 133명 중 많은 이가 “장애인에게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건 신체를 자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장애인거주시설에 갇힌 시설장애인이나 재가장애인 중엔 머리를 짧게 깎은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당사자의 취향과 상관없이 보호·관리하는 자의 입장에서 손쉽게 관리 가능한 머리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장애인이 탈시설-자립생활처럼 자기 의지대로 생활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머리를 기르거나 염색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장애인에게 머리카락의 길이와 신체의 자유는 긴밀히 닿아 있다.

1차 삭발결의자 이형숙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장애인에게 머리카락은 신체이자 영혼”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자유롭게 살아온 비장애인은 삭발하며 느끼는 침통한 심정을 잘 모를 것이다. 내 몸 중 유일하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신체가 머리카락이다. 133명이 신체를 잘라가며 장애인권리예산을 요구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도, 윤석열 정부도 이를 외면했다”고 성토했다.

가수 야마가타트윅스터가 기자회견 중 공연하고 있다. 야마가타트윅스터는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을 비판하며 “우주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다. 사진 하민지
가수 야마가타트윅스터가 기자회견 중 공연하고 있다. 야마가타트윅스터는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을 비판하며 “우주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다. 사진 하민지

- 133개 결의문에 삶의 고통 토해내고, 차별 증언하고… “이게 우리의 저항”

이날 기자회견에는 그간 삭발 투쟁에 참여한 활동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43차 삭발결의자 김솔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회장, 83차 삭발결의자 박창재 포천나눔의집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등, 다들 까만 머리가 조금씩 자랐다. 그러나 이들이 삭발한 장소로 다시 와서 또다시 기자회견을 하기까지, 윤석열 정부와 추경호 기획재정부 장관은 외면만 일삼았다.

삭발 투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투쟁결의문을 준비해 온다. 문자언어로 미리 작성해 삭발 전날에 공유하기도 하고, 당일 현장에서 메모지에 자필로 적어오기도 한다. 문자언어 사용이 여의치 않으면 삭발 투쟁 전후에 마이크를 잡고 음성언어로 투쟁결의문을 대신한다. 가까운 동료와 일문일답 형식으로 투쟁의 결의를 밝힌 사람도 있다.

133명의 투쟁결의문에는 삭발결의자가 장애인으로 살며 겪은 고통과 차별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장애인거주시설에 수십 년간 학대당하다 어렵게 탈시설한 이야기,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아 어머니 등에 업혀 다녔던 이야기, 힘들게 일하고도 최저임금을 받지 못한 이야기 등 수많은 증언이 있다. 활동지원사, 장애인야학 교사 등 장애인과 활동하는 동료는 끝까지 연대하겠다는 결의를 투쟁결의문에 녹여내기도 했다.

박경석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가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삶의 이야기 133개가 있다. 이 이야기를 말하고 들으며 100일간 국가권력에 저항해 왔다. 장애인권리예산을 제발 보장하라고, 우리는 살고 싶다고 외쳐 왔다. 삭발하고 지하철 타면서 ‘시민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100일간 말했다. 죄송한 마음은 이제 분노와 절망이 됐다”고 절규했다.

활동지원예산이 고작 2천억 원 증액됐다는 소식은 기자회견 중에 날아들었다. 전장연 요구사항과 무려 1조 원의 차이가 있다. 아직 국회 통과 절차가 남아있긴 하다. 그러나 정부를 상대로 100일간 삭발 투쟁을 해 왔는데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에 그간 장애인이 요구한 건 반영되지 않았다.

머리에 띠를 두른 김홍기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머리에 띠를 두른 김홍기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39차 삭발결의자 김홍기 노들장애인야학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는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이 부족해 장애인이 혼자 있다 죽거나 장애인 지원을 가족이 다 떠안아야 하는 현실이라고, 100일 넘게 외쳐왔는데 절망스럽다. 이곳에서 계속 삭발하겠다. 장애인권리예산이 보장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며 분노했다.

이날 100차 삭발결의자는 강원도 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는 빈운경 활동가다. 새벽 일찍 원주에서 올라온 빈 활동가는 “우리는 더 이상 동정과 시혜가 아닌, 우리에게 맞는 이동수단과 교육 방법과 노동 방식을 권리로써 붙잡고 누리겠다”고 결의를 밝히며 삭발했다.  

전장연은 기자회견을 끝내고 오전 9시 20분경부터 10시까지 약 40분간 4호선 삼각지역(숙대입구역 방향)에 온 열차를 멈춰 세웠다. 1-1칸부터 끝칸까지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장애인권리예산 요구를 외면한 윤석열 정부에 항의했다.

▷100일간의 삭발 투쟁결의문 보러가기 

10차 삭발결의자 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경찰에게 강경진압을 당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열차에 타 있는 이형숙 회장. 경찰 수십 명이 이 회장을 방패로 진압하며 열차 출입문 앞을 막았다. 이로 인해 열차가 더욱 지연됐다. 사진 하민지

 

관련기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