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 말하지 않은 것들 ②

[검증 대상]

지난달 24일과 25일, 한국 정부는 스위스 제네바 유엔 본부에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에 출석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 이행 상황에 대한 심의를 받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장애등급제 폐지 후 장애인 중심의 서비스 지원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장애인단체의 의견을 충실히 수렴해왔다고 밝혔습니다. 2013년부터 약 70여 차례의 토론회, 공청회, 설명회 등을 진행하고,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장애인단체와 민관협의체를 구성해 11차례의 회의를 거쳤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장애등급을 대신할 “새로운 서비스 지원기준 및 장애인 중심의 전달체계 모형”을 만들기 위해 3차례 시범사업(2015년 1차, 2016년 2차, 2017년 3차)을 진행해 타당성을 검증했다고도 했습니다.

국가의 정책 결정 과정에 장애인단체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은 협약의 주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부는 정말 장애인단체의 의견을 귀담아들었을까요? 비마이너가 확인해봤습니다.

[검증 방법]

· 한국 정부가 위원회에 제출한 2·3차 병합 국가보고서(보완보고서 포함)를 참고했습니다.

· ‘유엔 웹 티브이’에 올라온 제27차 장애인권리위원회 598~599차 영상회의록을 참고했습니다.   

· 2019년 6월 25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보도자료 ‘장애인 정책이 31년 만에 바뀝니다’를 참고했습니다.

·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1~3차 시범사업 관련 보도자료를 참고했습니다.

· 민관협의체, 1~3차 시범사업에 관한 비마이너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2017년 8월 25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 농성장에 찾아온 박능후 전 보건복지부 장관. 사진 비마이너DB
2017년 8월 25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 농성장에 찾아온 박능후 전 보건복지부 장관. 사진 비마이너DB

[검증 내용]

- 민관협의체에서 장애계와 심도 있게 논의했다?

“장애인 중심의 서비스 지원체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2014년부터 70회의 공청회와 설명회를 하고 2019년까지 장애인단체와 관련 전문가가 참여하는 민관협의체를 구성하여 11차례 회의를 거쳤고, 이 과정에서 장애인의 다양한 특성을 고려하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세부 지침을 마련했습니다.” (유엔 심의에서 염민섭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국장 발언)

정부가 유엔 심의에서 장애등급제 폐지와 관련해 주요하게 강조한 것 중 하나가 장애계 의견 수렴입니다. 이는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 시행을 알리는 2019년 6월 25일 발표된 복지부 보도자료에서도 무려 6쪽에 걸쳐 나열됩니다.

특히 정부는 장애인단체, 관련 전문가와 함께 민관협의체를 구성해 11차례 회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확인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는 민관협의체가 구성된 배경이며, 두 번째는 실제 민관협의체가 어떻게 진행됐는가입니다.

장애계는 2012년 8월,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며 광화문 지하 광장에서 농성에 돌입합니다. 이 농성은 5년(1842일)간 이어졌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시작된 농성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끝난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인 박능후 전 장관이 2017년 8월 말에야 농성장에 찾아와서 “장애등급제 폐지와 관련한 민관협의체를 꾸리겠다”고 약속하며 농성은 마무리됐습니다. 즉, 민관협의체는 장애계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라, 장애계가 5년간의 투쟁 끝에 쟁취해낸 ‘정부와의 협상 테이블’이었습니다.

2017년 8월 25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 농성장에 찾아온 박능후 전 보건복지부 장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문제로 인해 사망한 이들의 영정 앞에 고개를 숙이고 조의를 표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2017년 8월 25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 농성장에 찾아온 박능후 전 보건복지부 장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문제로 인해 사망한 이들의 영정 앞에 고개를 숙이고 조의를 표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2017년 10월, 첫 번째 민관협의체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민관협의체는 법적 권한이 있는 자리가 아니기에 여기서 논의한 내용을 수용할 의무는 없다’는 태도를 줄곧 취해왔습니다.

민관협의체에 참석한 장애계는 ‘장애등급’을 중·경증의 ‘장애정도’로 변경하는 정부안에 대해 유보를 요청했지만 복지부는 아랑곳없이 법안 개정을 밀어붙였습니다. 복지부는 2018년 7월에 열린 열 번째 회의 후엔 11개월가량 민관협의체 개최를 미루다가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가 시행되기 한 달 전에 부랴부랴 마지막 회의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 정부는 장애계와 제대로 된 논의 없이 활동지원 시간을 결정짓는 ‘종합조사 점수 산정 방법’을 확정했습니다. 이는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 과정에서 매우 논쟁적이고 중요한 내용으로 민관협의체의 핵심 논의 안건 중 하나였습니다. “심도 깊은 회의를 하며 세부 실행방안을 논의”했다는 정부 주장이 거짓인 이유입니다.

- 세 차례 시범사업으로 타당성 검증, 끝?

정부는 장애등급제 폐지 후 도입할 종합조사를 마련하기 위해 세 차례 시범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시범사업의 목표는 ‘종합조사를 통해 장애인 맞춤형 서비스 지원체계를 구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정부는 종합조사의 타당성을 검증했다고 하는데, 현장의 온도는 사뭇 달랐습니다. 1, 2, 3차 시범사업이 당시 어떻게 진행됐는지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1차 시범사업에서 당시 복지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장애인 2565명 중 2534명(98.8%)에게 서비스를 연계하거나 정보를 제공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중 신규 등록장애인을 제외한 기존 등록장애인 1631명에게 기존 자원을 잘 연결하여 “96.5%의 욕구해소율을 보였”다고 자평했습니다. 이러한 복지부 보도자료는 〈장애인에 필요서비스 찾아서 지원하니…“복지욕구 96.5% 해소”〉(연합뉴스)라는 제목으로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1차 시범사업에 대한 복지부의 결과는 “기존 등록장애인이 ‘서비스 예산 확대 없이’ 종합판정 및 전달체계 구축을 통한 서비스 연계로 욕구해소가 용이해짐을 확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2차에서는 1차에서 한 활동지원뿐만 아니라 야간순회, 응급안전, 시각장애인 보행훈련 등 다양한 사업을 대상으로 “서비스 종합판정도구의 적합성을 검증”했습니다.

즉, 1, 2차 시범사업에서 정부가 한 것은 예산을 확대해서 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종류와 양, 대상자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서비스를 연계한 것이었습니다. 당사자가 먼저 신청해야만 받을 수 있는 복지신청주의가 문제여서 정부가 ‘직접 찾아가서’ 현재 있는 복지제도를 알려준다는 것이 시범사업의 주된 골자 중 하나였고, 이는 “장애인을 찾아가는 수요자 중심 전달체계 구축”(2차 시범사업 보도자료 7쪽)이라는 내용으로 홍보됐습니다.

2018년 9월 3일에 열린 ‘장애등급제 폐지 시행을 위한 장애인단체 토론회’의 모습. 
2018년 9월 3일에 열린 ‘장애등급제 폐지 시행을 위한 장애인단체 토론회’의 모습. 

2017년 4월부터는 3차 시범사업이 시작됩니다. 장애등급을 대체하는 종합조사를 모의적용하는 시범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지부는 3차 시범사업 이후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18년 9월에 열린 ‘장애등급제 폐지 시행을 위한 장애인단체 토론회’에서 장애등급제 폐지 민관협의체 민간위원장이었던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에 의해 이 내용이 폭로됩니다. 직전에 열린 9차 민관협의체에서 복지부가 대외비로 민관협의체에만 공유한 내용이었습니다.

복지부는 2017년 4월부터 10월까지 활동지원을 이용하는 장애인 1886명을 대상으로 종합조사를 모의적용했습니다. 그 결과, 활동지원 시간은 전체적으로 월평균 5.13시간(약 4.58%)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대상자 중 45.76%에 해당하는 860여 명은 시간이 감소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체의 13.52%(246명)는 서비스 수급권에서 탈락했습니다. 활동지원 이용 자격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반면, 종합조사표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 시간인 16.84시간을 받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정부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한다고 알리면서도 예산 확대 계획이 없었습니다. 예산 확대 없이 무리하게 성과를 내려다보니 우려했던 바가 3차 시범사업에서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조차도 장애계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쉬쉬하고 있다가 들통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박경석 대표는 3차 시범사업 결과를 알리며 “종합조사표는 개인별 복지 욕구와 필요도가 반영된 결과가 아니라, 점수대로 사람을 잘라내는 등급제 패러다임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토론회 현장에는 시각장애인단체, 농인단체, 정신장애인단체 회원들도 대거 참석해 다양한 장애유형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다고 비판했습니다.

2018년 9월 3일에 열린 ‘장애등급제 폐지 시행을 위한 장애인단체 토론회’에서 시각장애인단체 회원들이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2018년 9월 3일에 열린 ‘장애등급제 폐지 시행을 위한 장애인단체 토론회’에서 시각장애인단체 회원들이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검증 결과]

정부는 민관협의체를 구성해 장애계와 심도 있게 논의했다고 하나 이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머물렀습니다. 정부는 민관협의체에서 장애인단체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려 하기보다, 이미 결정된 사안을 통보하고 공유하는 식으로 회의를 운영했습니다. 시범사업 또한 이미 답을 정해놓은 상태에서 진행했습니다. 그 답이란, 1차 시범사업 보도자료에도 나와 있듯 “예산 확대 없이 서비스 연계로 욕구 해소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장애계는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가 시행되는 이듬해 7월까지 1년 여간 3차 시범사업 결과를 바탕으로 ‘장애등급제 가짜 폐지’에 대한 싸움을 전개해나갑니다. 이들은 자체적인 모의조사를 진행해 종합조사 도입 후 활동지원 시간이 삭감되는 문제를 알리며 싸움을 조직해나갑니다. 이후 종합조사표를 둘러싸고 벌어진 모든 문제적 사태는 3차 시범사업에서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정부가 민관협의체와 시범사업 과정에서 장애인단체의 목소리를 충실히 수렴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 이 기사는 방송통신발전기금의 취재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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