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 말하지 않은 것들 ⑤

[검증 대상]

지난달 24일과 25일, 한국 정부는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에 출석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 이행 상황에 대한 심의를 받았습니다. 위원회 한국 담당관들은 한국에 여전히 많은 장애인거주시설이 운영된다는 걸 우려하며, 탈시설 정책 시행 시기와 일정, 예산 등 계획이 어떻게 되냐고 질의했습니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8월 2일 발표한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아래 탈시설로드맵) 내용을 나열했습니다. 지난달 22일, 위원회에 제출한 국가보고서(보완보고서) 내용과 위원회에 출석해 답변한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요. 탈시설로드맵은 협약에 부합하는 정책일까요? 비마이너가 확인했습니다.

[검증 방법]

· 협약 일반논평 5호를 참고했습니다.

· 한국 정부가 위원회에 제출한 2·3차 병합 국가보고서(보완보고서)를 참고했습니다.

· ‘유엔 웹 티브이’에 올라온 제27차 장애인권리위원회 598~599차 영상회의록을 참고했습니다.

· 지난해 8월 2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보도자료 ‘‘거주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장애인의 온전한 자립을 뒷받침하겠습니다’를 참고했습니다.

· 보건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3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사업설명자료’를 참고했습니다.

· 비마이너가 발행한 1년 치 탈시설로드맵 관련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한 활동가가 ‘탈시설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명시된 권리이다!’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 DB
한 활동가가 ‘탈시설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명시된 권리이다!’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검증 내용]

이번 심의에서 로버트 조지 마틴 위원은 “탈시설의 정확한 시기와 일정, 그리고 얼마큼의 예산이 투여될 계획인지 일반논평 5호에 기반해 설명해 달라”고 질의했습니다. 사무엘 응주구나 카부 위원은 “많은 시설이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탈시설 가속계획을 설명해 달라. 장애인이 본인이 원하는 가정에서 자립해서 살 수 있도록 어떤 지원을 하는지도 궁금하다”고 물었습니다.

이에 염민섭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국장은 “대한민국 정부는 협약 19조가 규정하는 주거선택권과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장애인에 대한 범부처 국가전략인 탈시설 및 주거지원 과제를 국정과제로 채택해 지속해서 논의해 왔으며, 2021년 8월에 탈시설로드맵을 발표했다”며 탈시설로드맵 내용을 나열했습니다.

염 국장은 “탈시설로드맵은 2022년부터 20년간 지역사회의 서비스를 단계적으로 확충하면서 자립을 희망하는 장애인들부터 우선 지역사회로의 거주전환을 지원한다. 이를 위해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년간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2022년에는 10개 지역에서 200명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시작했으며 2022년 예산은 43억 원이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정부는 2024년까지 시범사업을 거친 후, 2025년부터 단계적으로 연간 740명, 610명, 500명, 450명의 거주 장애인 자립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오는 2041년에는 시설 거주 장애인의 지역사회 전환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캡처
정부는 2024년까지 시범사업을 거친 후, 2025년부터 단계적으로 연간 740명, 610명, 500명, 450명의 거주 장애인 자립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오는 2041년에는 시설 거주 장애인의 지역사회 전환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캡처

- 자립을 희망하는 장애인에게 지역사회로의 거주전환을 지원한다?

정부는 3년간의 시범사업을 포함해 총 20년간 탈시설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탈시설로드맵으로 탈시설할 수 있는 장애인은 현재 거주시설에 사는 장애인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습니다.

정부는 올해부터 2024년까지 3년간 시범사업을 시행한 후, 2025년부터 탈시설 정책을 시행합니다. 정부 계획에 따르면 2025년부터 2041년까지 개인별 주거로 탈시설하는 사람은 5452명뿐입니다. 이는 거주시설에 사는 장애인 2만 8565명(2021년 12월 기준)의 18.9%. 5명 중 1명만 탈시설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탈시설 인원수가 왜 이렇게 적을까요? 탈시설로드맵에서 정부는 탈시설을 권리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바라봅니다. 보도자료에서도 정부는 “장애인이 자신의 주거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겠습니다”라고 홍보했습니다. 즉, 시설을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을 배제한 ‘수용공간’이 아닌 ‘거주공간’의 하나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설은 주거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 됩니다. 실제 탈시설로드맵에도 현재의 거주시설을 ‘주거서비스 제공기관’으로 명칭을 변경한다는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탈시설 대상은 현재 시설에 있는 장애인 2만 8565명 전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거주를 전환하고 싶은’ 욕구를 스스로 표현한 장애인만으로 자연스레 한정됩니다.

이에 대해 탈시설지원법을 공동발의한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탈시설로드맵이 발표된 다음 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수많은 장애인에게 시설 입소는 선택이 아닌 강요였다. 애초에 선택해서 들어간 게 아닌데 나올 때 욕구를 따지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탈시설을 권리로써 명확히 법제화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은 지난해 7월 2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당시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을 향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기반한 탈시설로드맵 수립과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요구했다. 손피켓에는 “거주시설 개편은 탈시설이 아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기반한 탈시설로드맵 수립하라!”,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하라!”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은 지난해 7월 2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당시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을 향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기반한 탈시설로드맵 수립과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요구했다. 손피켓에는 “거주시설 개편은 탈시설이 아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기반한 탈시설로드맵 수립하라!”,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하라!”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또한, 정부는 시설 폐지가 아니라 소규모화에 방향성을 두고 단기·공동생활가정(그룹홈)을 탈시설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2021년 12월을 기준으로 단기거주시설 164곳에 거주하는 장애인은 1792명, 공동생활가정 753곳에 거주하는 장애인은 2823명으로, 정부가 제외한 단기·공동생활가정 거주 장애인은 총 4615명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탈시설로드맵 정책이 시행되고 나면 공동생활가정 거주인이 4배가량 늘어나게 됩니다. 현재 시설에 사는 장애인의 60%인 1만여 명을 공동생활가정으로 전원시킨다는 계획 때문입니다.

이에 시민사회는 탈시설로드맵을 두고 ‘시설 쪼개기 정책’, ‘시설 소규모화 정책’이라며 거세게 규탄했습니다. 전근배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은 “탈시설로드맵은 엄밀히 말해 ‘시설 서비스 재편 계획’, ‘재시설화 로드맵’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정부 또한 탈시설로드맵이 시설 재편 계획이란 걸 인정한 바 있습니다. 한영규 복지부 장애인정책과 통함돌봄연계TF팀장은 비마이너에 “탈시설로드맵에는 거주시설을 벗어나 자립생활 구조를 만드는 것과 현재의 시설을 변환하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공동생활가정으로 시설 개편을 한다는 방향성만 제시하고, 추후 ‘시설 정상화’를 추진하려는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현재 운영되는 시설을 모조리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탈시설로드맵은 시설을 쪼개어 ‘정상화’해서 단체거주의 틀을 벗어나려는 계획을 제시한다”고도 했습니다.

위원회의 헝가리 직권조사를 이끌어낸 스티븐 알렌(Steven Allen) 발리더티 재단(Validity Foundation) 공동대표가 “그룹홈은 집이 아니라 시설이고, 완전한 탈시설을 달성해야 할 당사국의 의무를 위반하는 것입니다”라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최혜영TV 캡처
위원회의 헝가리 직권조사를 이끌어낸 스티븐 알렌(Steven Allen) 발리더티 재단(Validity Foundation) 공동대표가 “그룹홈은 집이 아니라 시설이고, 완전한 탈시설을 달성해야 할 당사국의 의무를 위반하는 것입니다”라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최혜영TV 캡처

- 헝가리의 소규모 시설 전원에 제동 건 유엔

시설 소규모화 정책을 펼쳤다가 위원회의 제재를 받은 사례가 있습니다.

헝가리는 2011년부터 50인 이상 거주시설에 사는 장애인을 소규모 그룹홈으로 전원했습니다. 또한 2036년까지 장애인 1만 명을 소규모 시설로 전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2020년 4월, 위원회는 헝가리의 ‘가짜’ 탈시설 전략에 대대적인 개선 권고를 내렸습니다. 소규모 시설로 장애인을 이동시키는 현행 전략을 수정하고 효과적인 탈시설화를 위한 국가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장애인단체와 협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위원회는 협약에서 소규모 시설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협약 19조 ‘자립적 생활과 지역사회 포용’ 이행에 대한 지침과 유권해석을 담은 일반논평 5호에는 이렇게 명시돼 있습니다.

“자립적 주거 형태: 자립적 생활과 지역사회 내 포용은 모든 유형의 거주시설의 외부 생활환경을 가리킨다. 이는 단순히 특정 건물이나 환경에서의 거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특정 생활형태와 주거 형태로 인하여 개인의 선택과 자율성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백 명 이상이 거주하는 대규모 시설도, 5~8명이 사는 작은 그룹홈도, 심지어는 혼자 사는 집도 시설 또는 시설화의 요소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면 자립적 주거 형태로 볼 수 없다.”

이처럼 위원회는 물리적 건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기제들, 문화적 요소까지 없애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더라도 장애인이 고립돼 있다면 완전한 자립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장애인을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시설화의 요소’까지 없애는 게 위원회가 말하는 탈시설입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탈시설로드맵에서 여전히 시설의 필요성을 말하며, 탈시설로드맵이 끝나는 2041년에도 최중증장애인 2200여 명을 거주시설에 남겨두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아직 명확한 형태를 알 수 없으나 시설화 요소를 갖고 있을 공동형 주거, 개별형 주거까지 포함하면 1만 7775명이 20년 후에도 여전히 시설 형태의 거주공간에 남아있을 예정입니다.

전장연은 지난 2월 15일, 세종시 보건복지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참가자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손팻말에는 “탈시설 시범사업은 탈시설 시험사업인가? 탈시설 장애인 떠보지 말고 탈시설권리 보장하라!”라고 쓰여 있다. 사진 비마이너 DB
전장연은 지난 2월 15일, 세종시 보건복지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참가자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손팻말에는 “탈시설 시범사업은 탈시설 시험사업인가? 탈시설 장애인 떠보지 말고 탈시설권리 보장하라!”라고 쓰여 있다. 사진 비마이너 DB

- 2022년 예산이 43억 원?

올해 시범사업 예산으로 43억 원이 책정된 것은 맞으나, 이 중 국비 비율은 50%로 21억 5000만 원입니다. 나머지 50%는 지방비로,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해야 합니다. 지방비는 광역지자체와 기초지자체 예산으로 나뉩니다. 정부는 광역지자체와 기초지자체가 나머지 50% 지방비를 얼마씩 부담할 건지는 협의해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이럴 경우 지자체 의지와 재정 상태에 따라 시범사업 진행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에 시민사회는 국가 차원의 사업이므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강하게 규탄해 왔습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장애인운동단체가 올해 2월, 세종시 보건복지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며 정부의 탈시설 정책 의지를 비판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는 상태입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위원회에서 내년 장애인거주시설 운영 예산으로 6290억 원을 편성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올해 장애인거주시설 운영 예산은 6134억 원이었는데요, 정부는 내년에 시설에 드는 예산을 되레 증액한 것입니다. 탈시설은 시범사업에 드는 예산 48억 원만 편성했습니다.

[검증 결과]

정부는 위원회에서 탈시설로드맵 내용을 나열하며 장애인의 탈시설·자립생활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탈시설로드맵은 시설에 사는 장애인의 5분의 1밖에 탈시설하지 못하는 정책이며, 시설 소규모화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는 2022년 탈시설 예산을 43억 원 편성했다고 말했지만 이는 국비와 지방비를 합친 금액으로, 국비는 절반인 21억 5천만 원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2023년 탈시설 예산은 48억 원만 편성했으면서, 장애인거주시설에는 6290억 원의 예산을 편성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탈시설 예산의 130배에 달합니다.

불리한 것은 숨기고 유리한 것만 말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위원회에 출석해 정부가 답변한 내용과 보완보고서의 탈시설 관련 내용은 ‘절반의 사실’로 판정합니다.

* 이 기사는 방송통신발전기금의 취재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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