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영희 언니와 나란히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아래 연구소)에서 일하며 장애를 가진 여성들을 만났어요. 그즈음, 정확한 계기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장애를 가진 여성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기획안을 김성재 이사장에게 제안했어요. 기획안을 본 그가 아주 좋아했어요. 이런 것이 바로 운동이라고, 우리가 어떤 프로그램을 잘 운영하는 것보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중요한 경험을 발견하고 그걸 의제로 만드는 것이 운동이라고요. 칭찬을 받았지요.
이미 알고 지냈고 연구소와도 연결되어 있던 몇몇 장애여성들과 첫 모임을 가졌어요. 모임 이름을 짓지는 못하고 우선 ‘여성장애인 모임’이라 부르고 시작을 했죠. 이후 대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간사로 일하던 배복주(현 정의당 정치인)도 참여하게 됐고요. 사람들을 모으는 일이 중요했죠. 이태곤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장애여성 이름과 연락처를 모두 알려달라고 해서는 그들에게 전화를 돌렸어요. 연락하지 말라는 사람들에게는 “알겠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생기면 전화주세요”라고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보냈어요. 매월 여덟 명, 열 명 정도로 진행되던 모임이 차츰 참여자가 늘면서 20~30명 규모가 됐어요. 참석하고 싶다는 분들 가운데는 휠체어를 타는 중증장애인이 많았으니 이들을 모시고 오려면 자원활동을 할 운전기사가 필요했죠. 각자의 집에서 나와서 차를 타려면 계단을 오르고 내려야 할 일도 있었어요. 가톨릭 기사회라는 단체와 연결되어서 그분들을 통해 이동지원을 하기도 하고, 물리적인 지원을 해줄 비장애인 남성들도 조직했죠. 이상엽 같은 사람들이 함께했어요. 또 모임 안에서 참가자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역할도 필요했고요. 비장애인 여성들이 많이 함께했어요.
영희 언니(현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를 그때 만났어요. 언니는 동해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때는 서울에 올라와 연구소에서 멀지 않은 방배동에 살고 있었어요. 모임에 참석해보라는 연락을 배복주와 내가 여러 차례 했는데 자기 집이 3층이라서 밖으로 나오기 어렵다고 했어요. 가까운 거리였으니 내가 직접 가겠다고 했죠. 집에서 영희 언니를 업고 내려와서 모임에 함께했어요.
언니에게 모임 운영에 필요한 역할을 제안했는데 언니가 자신은 할 줄 아는 게 없다면서 회원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역할을 하겠다고 했어요. 언니가 전화로 소통하면서 집에서만 지내던 장애여성들을 밖으로 불러냈어요. 그렇게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났죠. 내가 그저 밝고 명랑한 사람이라면 영희 언니는 따듯한 사람이었어요.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을 언니는 정말 따듯하게 대했어요. 모임 전체를 조율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데 영희 언니의 존재는 너무 컸어요. 운영위원회에서 회의를 할 때면 누군가가 크게 문제제기 할 때도 있죠. 나는 장애인 당사자가 아니었고 간사였기에 그런 문제제기에 맞설 수도, 넘어갈 수도 없었어요. 그냥 눈만 끔벅거릴 뿐이죠. 내 생각이 맞는지, 맞다 해도 그 이야기를 해도 좋을지. 나는 다른 몸의 경험을 가지고 있고 장애여성의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런 걱정에 빠져있을 때 영희 언니가 말해요. “이 문제는 좀 이러저러한 거 같은데요. 어때요, 박옥순 간사?” 지금은 굵고 단단한 눈빛의 사람이지만 그때 언니 눈을 보면 사슴 같았죠. 안전하고 깊은 신뢰감을 느끼게 하는 눈. 그 가운데서 나도 생각을 말하고, 다른 생각을 듣죠.
언니의 몸은 굉장히 가벼웠고 수동휠체어는 작아서, 언니 집에서 연구소까지 이동할 때는 내가 한 손으로 휠체어 뒷손잡이를 잡은 채 옆에서 나란히 이동할 수 있었어요. “언니, 우리 나중에 나중에는~~~ 이런 거 하자!” “이렇게 걸으니까 너무 좋지 않아?” 내가 그렇게 마구 말해요. 그럼 언니는 “맞아, 맞아” 하면서 같이 웃었던 기억이 나요. 회원은 100명까지 늘어났어요. 모임의 이름은 ‘빗장을 여는 사람들’이었죠.
- 장애여성의 삶이라는 보편적인 문제
1996년 빗장을 여는 사람들은 제1회 한국여성장애인대회를 주최했어요. 장애여성이라는 의제가 점점 표면에 드러나고 있었죠. 1995년에 열린 북경여성대회에 김미연(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이 한국의 장애여성으로 참가해서 여러 나라의 장애여성들을 만났고 그 경험을 한국사회에 전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여전히 장애여성이라는 의제에 부정적인 목소리가 많았어요. 장애남성을 포함해 일부 남성 토론자들이 “‘보편적인 장애인 문제’만을 이야기하기에도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많다. 장애여성이라는 별도의 의제를 또 나누는 것이 맞느냐”며 회의적인 주장을 했죠.
그런데 이건 여성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같은 해 제2차 동아시아 여성포럼이 한국에서 열렸어요. 당시 각 단체의 여성 대표들이 모여서 포럼의 세션을 정하는 회의를 했어요. 환경과 개발, 여성의 정치참여 등 주요 주제들을 정하는데, 청중석에서 회의를 듣다가 손을 들었어요. 장애여성 문제를 다루는 세션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죠. 그랬더니 하는 말이 똑같아요. 이 자리는 여성의 보편적인 문제를 얘기하는 곳이고, 여성문제만 해도 복잡하고… 또 장애여성들은 참여가 거의 없다는 이유도 들었죠. 다시 손을 들었어요. 발언권 줄 때까지 무시하거나 말거나 들고 있었죠. 말을 하라고 해서 그들에게 물었어요. 여성 인권에 있어서 보편성의 의미가 뭐냐고.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고, 나는 받아줄 때까지 또 손을 들고 있었죠. 그때 청중석에서 한 분이 발언권을 얻더니 일어나 말했어요.
“모든 인권 주제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여성의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라는 것이 별도로 있습니까? 그런 게 있다면 정의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조차 장애여성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서 이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지금 회의 진행하시는 분들, 말 좀 해주세요. 제가 정말로 궁금합니다.”
내 왼편에서 들려오던 그 날카로운 말을 떠올리면 지금도 울컥해요. 한국여성노동자회 이철순 대표였어요. 그분은 기억 못하실 테지만 나는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장애여성이라는 의제를 다루는 세션이 동아시아 여성포럼에서 그렇게 채택됐죠.
포럼이 열렸을 때 30여 명의 장애여성들이 서울타워호텔(현 반야트리 서울호텔)에서 열린 회의장에 찾아왔어요. 사실 참가비는 두 사람분을 냈던 것 같은데, 그냥 다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 거예요. 이 장면이 얼마나 멋진지 몰라요. 동아시아 각국에서 온 여성단체의 대표들이 호텔 회의장에서 여성문제를 논의하는 그 자리에, 휠체어를 탄 사람을 비롯해서 다양한 장애를 가진 여성 30여 명이 그 회의장 안으로 몰려드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포럼 일정이 끝나고 밤이 되어도 여전히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남아서 호텔방 두 개를 잡고 다 같이 잤어요. 좁은 공간에 엎어지고 포개져서, 막 다들 옷을 가볍게 입은 채 깔깔대며 웃었던 기억이 나요.
- 자유를 나누는 일
빗장을 여는 사람들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연구소와 갈라섰고,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장애여성공감 등으로 분리되어 장애여성운동을 이어갔어요. 당시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은 잘 되었다고 생각해요. 영희 언니와도 한동안 만나지 못했어요. 2001년쯤이었나. 아마도 장애인이동권 집회를 갔다가 오랜만에 영희 언니를 만났는데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었어요. 나란히 움직일 수 있었죠. 예전에 한 손으로 수동휠체어를 밀면서 언니 집에서 연구소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났어요.
전동휠체어가 어떤 의미일까, 언니는 이야기를 했어요. 처음 전동휠체어를 받고서 집 근처 시장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대요. 익숙해지려고요. 그러다 길을 건너려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대요. 빨간색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이 우르르 길을 건너는데 갑자기 건널 수 없었다고 해요. 그러다 파란색이 꺼지고 빨간색 불이 켜졌고, 다시 파란 불이 들어왔지만 여전히 건널 수 없었고 결국 세 번째 만에 길을 건너갔대요. 이전까지는 늘 자신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사람이 신호등이 바뀌는 순간 길을 건너게 했던 거죠. 그런데 이제는 내가 스스로 움직여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불이 바뀌어도 건너가고 싶지 않으면 건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이때 온몸으로 오는 짜릿한 그 느낌이, 이게 바로 자기결정권이 아니겠냐고 말했어요.
나는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해서 활동가로서 오랜 기간 이야기를 듣고 말하고 주장했던 사람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만큼 생생하게 다가온 게 없었어요. 며칠 뒤가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었고, 연구소 사무실로 돌아와서 이 이야기를 공문 맨 앞에 썼어요. 전동휠체어 나눔을 위한 기금을 모으는 공문이었죠.
상엽이 근무하던 기업에 제일 먼저 공문을 보냈어요. 그렇게 첫해 다섯 대의 전동휠체어를 기증받아서 이현준을 비롯해 혼자 힘으로 휠체어를 이동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들에게 보급했어요. 다음 해에는 20대를 지원받았고요. 이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제안해서 나눔사업 규모를 늘렸어요. 전동휠체어가 장애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 누구를 위한 활동일까
전동휠체어 나눔사업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사업과 연결되면서 더 많은 중증장애인에게 휠체어 지원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이를 계기로 연구소가 여러 기업과 연결되었고, 이사장도 기업들과의 관계가 좋았어요.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이런저런 모금 활동 성과는 계속 올라갔어요. 나랑 임소연을 포함해 네 명이 함께 모금사업을 했는데 2년간 60명이 넘는 직원의 급여를 마련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관계가 깊어지면서 점점 우리는, 말하자면 기업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어요. 나는 뭐가 어떤지 깊이 생각지도 않고 그저 기업을 만나고 사업을 제안하고 그랬는데, 인권운동계에서 비판이 제기됐어요. “장애우와 함께하는” 이런 케치프레이즈를 내세워서 기업의 돈을 받고 있다고요.
깜짝 놀란거죠. 아, 내가 정말 문제가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모금활동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연구소는 겉보기에만 뜻있어 보이는 일에 열중하는 것 같았어요. 밖에서는 한창 장애인이동권연대가 강력한 거리투쟁을 전개하던 때였고요. 이 운동의 주인은 누구일까, 나는 이 조직을 그저 유지 시키기 위해 활동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연구소가 곧 나고, 내가 곧 연구소라고 생각했던 내게 위기가 닥쳤죠.
연구소에서 14년간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밤새 토론하고 질문하고 답변한 날들이었어요. 우리가 왜 이걸 선택했는지, 왜 이 활동을 하고 있고 이 활동을 ‘운동’이라고 부르는지 이야기한 시간들이요.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 활동을 하는 거고, 장애를 가진 사람이 행복한 공간이나 사회라면 그곳에서는 나도 행복하고 안전한 공간일 거라고, 그러므로 이 운동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곧 연구소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는 걸, 내가 주인인 운동은 이런 식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일 때가 온 거죠.
2004년 말 연구소 활동을 정리하기로 했어요. 그 전부터 연구소에 여러 차례 실망해서 그만둘 것을 고민하던 김정하가 와서 말했죠. “박옥순 그만둔대며. 그럼 내가 여기 왜 있어. 나는 운동하지 않는 다른 선배들하고 같이 일하기 어려워.” 한 달 후 임소연이, 그 뒤 함께걸음 여준민 기자까지, 네 명이 차례차례 연구소를 떠났어요. 이들은 각자 관심사가 있는 사람들이었죠. 정하는 인권 쪽에, 소연과 준민은 환경운동에. 나는 계속 운동을 할 거라면 우리가 그간 같이 해왔던 장애인운동을 하자고 제안했어요.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지는데 필요한 운동의 하나로서 장애인운동이요. 내가 지금까지 해왔고 잘 아는 것을 하자고 말한 거죠. “나랑 같이했으면 좋겠는데 어때, 할래?”라고 말했는데, 세 사람 모두 곁에 남아줬어요. 그리고 연구소에 있던 박숙경까지 합류해서 다섯 사람이 2005년 인사동에서 모여 단체를 만들었고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2000년대 초반부터 연구소에서는 숙경, 정하, 준민 등이 장애인시설에서 제기된 인권침해를 취재하고 그에 대응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발바닥의 활동은 시설에 갇힌 사람들을 나오게 하자는, 탈시설 운동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어요. 탈시설은 장기적인 과제와 연결된 일이고 인권침해 시설을 조사하고 밝혀내는 그 싸움은 힘들겠지만, 우리는 싸움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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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순은 이날의 ‘인사동 회동’에서 자신이 동료들에게 한 말을 대수롭지 않은 듯 구술했지만 이날 그가 한 이야기를 김정하는 이렇게 기억했다.
“옥순은 별명이 ‘태평양’이었어요. 힘들어하는 후배들의 투정을 다 들어주는 사람이었죠. 그날도 옥순은 후배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말했어요. ‘너희들이 무얼 하자고 해도 내가 다 같이 할 테니 오직 장애운동판만 떠나지 말아줘.’ 참 이상하게도 어느샌가 우리는 술에 취해서 장애인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열변을 토하고 있었어요.” (홍은전, 김정하 인터뷰 중에서)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운동하는것이 끊임없는 추동력을 만들어내는것 같습니다!
이번회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