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2000년대 초반 시설 문제와 함께 장애계의 또 다른 큰 흐름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운동이었어요. 2003년 그 규모나 성향이 각기 다른 58개의 장애인단체가 모여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아래 장추련)를 출범시켰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아래 연구소)에 있을 때부터 나는 차별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고 상담 전화도 많이 받았어요.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에서 만났던 장애인 청년들의 분노, 학교 입학 거부당한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의 이야기. 연구소가 직접 대응한 차별사건도 많았죠.
기억에 남는 사례 중 하나는 시각장애인 황선경의 경우에요. 피아니스트 황선경은 청주의 한 대학에 음악교육과로 편입을 시도했는데 학교에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원서를 받아주지 않았어요. 저희 쪽에 제보를 주셨는데, 그에게 어떻게 하실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원서 제출 마감날까지 계속 원서를 낼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너무나 멋진 분이었죠. 학교는 끝까지 그의 입학원서 받기를 거부했어요. 그 말을 듣고 그에게 바로 서울로 올라오라고 말한 후 새벽까지 보도자료를 써서 언론사 기자들에게 배포했어요. 잠깐 자고 아침 6시 반 사무실에 나오니 잠시 뒤부터 연구소 전화기가 기자들의 전화로 엄청나게 울리던 기억이 생생해요. 우리는 결국 이겼어요.
발바닥을 시작할 무렵 나는 연구소에서 무급휴직 기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당시 장추련 사무국장을 맡은 활동가가 건강상의 이유로 활동을 잠시 쉬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그 역할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어요. 탈시설만큼이나 장애인차별을 금지하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었고, 그때는 회의 진행이나 단체들에 연락을 취하는 역할 정도를 하겠거니 생각하고서 장추련에서 자원활동을 잠시 하겠다고 발바닥에 말했는데, 구성원들이 모두 반대했어요. ‘장추련에 들어가면 너는 절대 못 돌아온다. 법이 제정될 때까지 그곳에서 꼼짝도 안 할 사람이다’라는 이유였죠. 그렇게 자원활동으로 시작한 장추련 활동은 발바닥 멤버들의 예상대로 됐어요. 내가 들어가자마자 장추련이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를 점거하자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 거예요.
2001년 설립된 인권위는 장애뿐 아니라 성차별 등 다양한 차별문제를 다루는 기구였지만 그 실효성에 의문이 많았어요. 그래서 인권위가 더 강한 권한을 가지고 여러 사유로 발생하는 차별사건을 다룰 수 있도록 시민사회단체와 인권위가 노력하고 있었어요. 다양한 차별 사유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했던 거죠. 장애계는 그것도 필요하지만 장애인 차별을 별도로 규율하는 법률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걸 수년간 추진해오고 있었어요. 장추련 연대조직이었던 열린네트워크가 장추련 출범 전인 2001년부터 전국을 순회하면서 수많은 장애인 당사자들의 경험을 듣고 있었죠. 이러한 경험과 의견을 계속 수집하면서 장추련은 법조문을 만들고 있었고요. 그렇게 해도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세간의 이목을 충분히 받지 못한 의제였죠. 우리는 ‘사건’을 만들어야 했어요. 인권위의 관심이 장애인차별금지법으로 오도록, 세상의 관심이 모이도록. 발바닥으로 돌아가기는커녕 나는 발바닥 활동가 임소연까지 장추련으로 불렀고, 그날 우리는 인권위로 쳐들어갔어요. 그때 발바닥에 남아 엄청난 탈시설 운동을 혼자 감당해야 했던 김정하의 얼굴이란….
점거일 전까지 사무총장이나 인권위원들에게 만나 달라고 공문을 보내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지만 만날 수 없었어요. 우리는 인권위원장을 만나겠다며 13층의 위원장실까지 올라가서 엘리베이터 앞에 진을 쳤어요. 어쨌든 다음 날 위원장이 출근하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 테니까요. 사람들이 오갈 때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날 밤 잠들던 기억이 생생해요. 우리는 인권위가 있는 건물에 커다란 현수막을 내걸었고 60일간 농성을 이어갔죠. 위원장과 면담을 하고, 약간의 타협도 한 끝에, 결국 2006년 5월 26일 인권위는 일반적인 차별금지법을 추진하되 개별법으로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어요.
그때부터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은 급물살을 탔어요. 청와대 지시로 민관협의체가 만들어졌죠. 그 자리에 참석했을 때 보건복지부 담당자가 말했어요. “장추련이 제시한 장애인차별금지법안은 차별의 유형을 세부적으로 열거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오히려 어떤 종류의 차별행위는 법에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별이 아니라고 해석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일반적인 차별금지 조항의 형태로 법률을 만드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습니까?”라고요.
그러나 우리는 이 법안에 확신이 있었어요. 그동안 수없이 차별 상담을 받으며 수집한 사례들이 유형화되어 있었고, 장추련 초기부터 1~2주에 한 번씩 여러 장애유형의 당사자들이 모여서 각각의 차별영역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야기를 나눠왔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교육에 관한 차별조항을 만들 때, ‘학교 다닐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힘들었던 일이 뭐였는지 이야기해봅시다’라면서 모여요. 그 자리에서 한 장애인이 말을 하죠. 체육시간에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고 교실에 남아 있었는데, 학급에서 물건이 없어지자 도둑으로 의심을 받았다고. 나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나요.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생한 경험이죠. 그 경험을 반영해 만들어진 초안을 가지고 전국을 돌면서 또 의견을 모았어요. 이처럼 장추련의 장애인차별금지법안은 장애인들의 차별 경험을 세세하게 반영하고 있으니 보건복지부 담당자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죠. 설령 법이 담지 못하는 내용이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인권위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대응할 수 있는 문제이고요.
교육책임자는 특정 수업이나 실험‧실습, 현장견학, 수학여행 등 학습을 포함한 모든 교내외 활동에서 장애를 이유로 장애인의 참여를 제한, 배제, 거부하여서는 아니 된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3조 제4항)
경제계의 반대를 돌파하는 것도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었어요. 고용차별 관련 조항이 기업에 부담을 준다고 그들은 생각했으니까요. 토론회를 개최하고 경제계의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자 “장애인차별금지라는 취지에는 공감하나, 기업과 기업인의 손해가 과도할 수 있어 이 법률의 제정은 찬성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놨어요. 전동휠체어를 보급하는데 후원금을 내주던 기업들도 고용현장에서 장애인의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던 거죠.
장추련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상공회의소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어요. 그 과정에서 활동가들이 선고받은 벌금 총액이 5천만 원에 달했어요. 끝내 경제계의 입장 변화를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언론에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고, 다른 인권단체들의 연대가 이어졌죠. 수 없는 싸움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2007년 3월 6일 장애인차별금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어요. 그리고 2008년 4월 10일부터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됐죠.
이 법은 모든 생활영역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장애를 이유로 차별받은 사람의 권익을 효과적으로 구제함으로써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권 실현을 통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함을 목적으로 한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조 제1항)
- 차별이 도대체 뭡니까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되기 며칠 전에, 수백명의 장애인들에게 미리 진정서 양식을 배포하고 자신의 차별 경험을 기재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법 시행 당일 259명의 장애인차별 사건 진정을 집단으로 인권위에 제출했죠. 무엇이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른 차별이고 아닌지 여전히 불확실한 부분이 누구에게나 있었죠. 무인현금지급기(ATM)를 시각장애인이 사용하지 못하는데 이것도 장애인 차별일까, 어떤 시각장애인이 내게 물었어요. 이런 내용이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인권위가 차별로 해석할 수 있을 거라고 답하며 진정을 냈어요. 얼마 후 은행 쪽에서 개선하겠다는 답변을 보내면서 사건이 조사 중 해결된 것으로 종결되었고, 1~2년쯤 지나자 모든 은행의 현금지급기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안내를 하고 있었어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힘이죠.
인권위의 역할이 중요해요. 수많은 경험을 담아 만들었다고 해도 결국 인권위의 법 해석에 달린 일이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인이 배제당하지 않도록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라고 하죠. 뭐가 정당한 편의일까요. 한 대학에서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집단적인 따돌림을 겪던 ㄱ교수 사건을 인권위가 조사할 때였어요. 담당 조사관이 대학 측을 조사하고서 답답했던 모양이에요. 내게 전화를 걸었어요. “상대방 교수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ㄱ교수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소극적이었던 면도 있는 거 같다. 그런데 이걸 우리가 장애인차별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의견이었어요. 나는 ㄱ교수와 이 사건을 계기로 여러 차례 만났고 술을 마신 적도 있었는데, 그때 ㄱ교수랑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죠.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 어떤 정당한 편의가 당신에게 필요할까요”라고 내가 그에게 물었어요. 그가 고민하길래 손으로 살짝 그의 팔을 치고서 그의 눈을 보고 말했어요. 이런 건 어때요? ㄱ교수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서 그렇게 하고 자신을 보며 말하면 된다고, 그거라고 좋아하더군요.
전화를 한 인권위 조사관에게 그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어요.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요. 그 교수들은 ㄱ교수가 소극적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어떻게 ㄱ교수에게 인사를 했을까요. 말을 걸었는데 ㄱ교수가 듣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건 아닐까요? 잠시 뒤 그 조사관이 뭔가를 확신한 듯 전화를 끊었어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말하는 차별행위, 정당한 편의, 이런 개념들은 모두 장애인들의 생생한 몸의 경험, 삶의 경험에서 나왔어요. 그러니 그로부터 출발해서 해석되어야 할 법개념인 거예요.
법이 제정되고도 장애인들의 경험을 잘 반영한 시행령을 만드는 게 그래서 중요했어요. 그런데 법률이 만들어지자 한국장애인연맹(한국DPI),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등 여러 단체가 장추련을 나갔어요. 일할 사람이 점점 줄었죠. 시행령 제정을 둘러싼 싸움 이후에는 장애인차별금지 전국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장애인차별상담전화를 운영했어요. 그 무렵에 이르자 나는 이 역할을 더는 수행하기가 어려운 상태였어요. 장추련으로 상담 전화가 울리면 전화를 받으러 가야 하잖아요. 근데 손을 움직이기가 귀찮은 거야. ‘아, 귀찮은데’ 하면서 그냥 전화를 받지 않기도 하고. 너무나 피곤해서 잠을 계속 자고 그런 상태였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몸이 아프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냥 귀찮아, 귀찮아, 하면서 해야 할 일을 펑크냈어요. 더는 안되겠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을 찾았어요. 그런데 사람이 없는 거야. 조직들은 장추련을 나가버렸고, 겨우겨우 그 일을 하겠다고 말한 후배는 출근하기로 한 날 연락을 하더니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어요. 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활동가 한 사람만 사무실에 있었으니 내가 사무실로 나가야 하는데,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온몸이 부었고, 발이 더 커졌어요. 혈액순환이 안되어서 위험한 상태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왜 이렇게 귀찮을까 생각만 했던 거지. 혼자 사무실에 남겨둔 활동가 생각이 나 너무나 미안한 마음을 안고서도 집에서 끙끙 앓고 있을 때, 경석이 형(현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이 집으로 찾아왔어요. 영희 언니가 사무국장을 하겠다고 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는 막 울었어요. 뭘 어떻게 생각해. 영희 언니는 무조건 잘하지.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