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명랑 쾌활함의 뒤편
나는 명랑 쾌활한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어떤 밤에는 힘들어서 죽음을 생각한 적도 있죠. 어느 날 계속 고민하고 끝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어요. 밤이 되면 특히 그랬죠. 보통 내 퇴근 시간이 새벽 한두 시, 서너 시였는데, 그때 들어가면 몸이 피곤하죠. 발이 부어서 혈액 순환이 안 되고, 염증이 생기는 거죠. 굉장히 피로를 많이 느꼈어요. 이 몸과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 때문에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마 스물아홉쯤 연구소에서 일할 때로 기억해요. 새벽 2시에 퇴근하고 누워서 내 삶이 계속 이런 거라면 이 인생은 어떻게 될까, 생각하며 무작정 나와 택시를 잡아탔어요. 가까운 동작대교로 가자고 했죠. 택시기사분이 “아, 동작대교를 가십니까” 그래서 “네” 했더니 “그래요” 하면서 조용히 운전을 하세요. 나는 엉엉 울고 있었고. 동작대교 앞에 왔을 때 기사분이 말했어요. “제가 (다리를 지나서) 조금 더 가도 될까요” 다리를 지나쳤고, 나는 석관동 쪽에 살던 친구네 집으로 가달라고 했죠.
낮이 되면 다 잊고 명랑한 사람이 되었어요. 활동하면서 사람들 때문에 힘든 일도 있었지만 사실 누구나 서로를 힘들게 할 때가 있잖아요. 나도 누군가에게 그랬을 거고. 그러면서도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큰일을 해왔는지를 깊게 생각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해요. 2019년 안식년을 갖고 삼달다방이 있는 제주에 와서 상엽과 오랜만에 같이 지낼 시간을 가졌죠. 그때 가족의 존재에 대해 각성한 것 같아요.
이상엽은 장애우대학 4기 멤버로 처음 만났어요.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15년을 기업에서 일했는데 그러면서도 항상 장애인운동 영역에, 장애인운동의 가치에 연대한 사람이죠. 1995년 김미연이 북경여성대회에 참가할 때 아주대학교 선후배들을 모아서 일일호프를 열고 비용을 마련한 것이 상엽이에요. 이현준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아래 연구소)의 상근자로 출근하고 부모님에게서 독립하는데 필요했던 ‘도우미’를 지원할 길을 만든 것도 상엽이었죠. 연구소가 지하 1층에서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올 때도 이상엽이 근무하던 회사의 도움을 받았어요.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아래 장추련)가 숙대입구에 사무실을 만들 때도, 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당산동으로 갈 때도, 노들야학이 혜화로 올 때도 그가 리모델링을 맡았죠. 장추련이 기업의 장애인차별금지법 반대에 맞서 싸우다 5천만 원의 벌금을 받았을 때도 상엽이 일일호프를 기획하고 모금활동을 해서 다 갚을 수 있었어요.
나는 이런 그의 역할을 조금 당연하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현수막 좀 어디다 걸어줘” 부탁하면 알아서 다 처리해주니까. 그저 가끔 내가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너는 왜 그렇게까지 하냐 물으면, 그는 자기가 정말 사회운동을 하고 싶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나와 결혼한 게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했어요. 자신은 너무 가난했기에 돈을 벌기 위한 삶을 선택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운동에 기여를 하고 싶었다고요.
- 장애인차별을 철폐하는 지속가능한 연대체를 위해
영희 언니가 장추련 사무국장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놓여서, 바로 활동을 쉬었어요. 2010년 10월 무렵이었죠. 그때부터 1년간 병원에 다니고 마사지를 받고 춤을 배웠어요. 다리를 적절히 움직여서 혈액순환을 계속 도와야 한다네요. 다른 치료법은 없다고 해요. 조금 몸이 나아지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에서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죠. 쉬는 동안 몸을 회복하면서도 마음이 계속 덜컹거렸거든요. 그쪽으로 향하는 거죠. 2012년부터 전장연에서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했어요. 조직과 기획업무에 집중했죠.
전장연은 당시 상근자가 네 명에서 다섯 명 정도의 조직이었어요. 그때까지 장애인운동이 많은 법과 제도를 만들어냈지만, 이러한 성과들이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지 지켜보며 새로운 투쟁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러기 위해서는 지속 가능한 활동이 필요했고요. 전장연이 그런 조직, ‘지속가능한 투쟁체’가 되기를 바랐죠. 우리가 활동을 지속하지 않으면 그간 만든 법과 제도는 과거로 돌아갈 테니까요. 2022년 현재 전장연은 21명의 상근자가 일하는 조직으로 커졌어요.
전장연은 장애인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조직이죠. 잘 싸우고 어려운 싸움을 하는 곳이라서 활동가들이 천천히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기보다는 맡은 일을 빨리 잘 해내는 역량을 많이 요구해왔어요. 단체가 커지면서 의사소통 과정이 어려워지기도 하죠. 나는 활동가들이 서로에게 필요한 말을 명료하게 하되, 상대를 비난하거나 그릇되게 충고하고 함부로 평가, 명령하지 않는 말하기를 어떻게 할지 자주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회의를 할 때 “나는 누구누구 때문에 최근 행복했다”는 주제로 각자 말해보자고 제안하죠. 서로를 챙겨주고 행복하게 해주고 이해하면서 모두의 성장을 돕는 안전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요.
가장 잘 싸우는 활동가 박경석에게도 질문을 많이 하죠. 내가 가끔 경석이 형이 듣기에 힘든 질문들도 조금 하나 봐요(웃음). “박경석 대표님, 지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내가 듣기에는 이렇게 들리는 데 맞나요?” “지금 다른 활동가들이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게 아닌데, 왜 자꾸 그렇게 전제하고 말씀하시나요” 이런 말도 하고요.
박경석과 나는 잘 맞아요. 우리 둘 다 필요한 일이라면 일단 그 일을 해버리죠. 그 후에 돈이나, 활동공간 같은 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서요. 혜화로 전장연 사무실이 오기 전 2016년 영등포 당산동 사무실에 있을 때예요. 그 무렵 4년 넘게 정부를 상대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싸우면서 감당하기 힘든 벌금이 쌓였고, 활동비가 없었죠. 사무실 월세를 내기 어려운 사정 앞에서, 그냥 그 공간을 나오기로 결정했어요. 은평구의 서울혁신파크 내에 있던 민주노총 서울본부 앞에 천막을 치고 우리 사무실을 차린 거죠. 그때도 우리는 생각이 일치했어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한다면, 그에 따르는 조건들은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래도 지속가능한 투쟁조직을 만드는 데에는 여전히 답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 있어요. 몇 년 전 정말 훌륭하게 활동한 한 활동가가 장애인운동을 떠나기로 했어요. 내가 무척 사랑했던 사람이죠. 그의 역량, 기개, 다른 이들을 대하는 태도 모든 면이 훌륭했어요. 그런 그가 전장연의 활동은 정당하고, 지금처럼 활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지만, 자신이 감당하기는 어렵다면서 떠났어요. 그처럼 장애인운동을 부정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운동에 수반되는 이 많은 일들이 너무나 힘들어서 떠난 사람들이 마음에 계속 걸려요. 전장연은 지금처럼 많은 역할을 짊어지고, 고된 투쟁을 감내하며 갈 수밖에 없고, 그것이 어떤 면에서 전장연의 정체성임을 나도 박경석도 받아들여요. 그럼에도 어떻게 좋은 활동가들이 더 오래 남아 운동을 지속할 수 있을지,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늘 고민하죠.
- 활동가라는 직업을 선택했기에 나는 행복했어요
2017년 즈음부터 다시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전장연 활동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점차 한계에 부딪힌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함께 활동하기를 바라는 동료들의 지지가 고맙고 한편으로 그 상황이 안타까웠어요. 다섯 번째 임기가 시작되는 2019년 나는 사직을 하는 대신 안식년을 갖기로 하고 삼달에 내려와 지냈어요. 1년의 휴식기를 가지고서 2020년 6월 전장연에 복귀했죠.
그런데 복귀한 후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상엽과 초코(옥순과 상엽의 가족이었던 강아지. 2021년 세상을 떠났다)가 있는 제주에 계속 마음이 쓰이는 거죠. 그동안 상엽이 해왔던 일에 대한 고마움, 만성질환을 가진 그가 혼자 삼달에서 그 많은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2022년에는 반상근 활동가로서 재택근무로 근무형식을 전환하고 결국 다시 삼달로 돌아왔어요. 2022년을 끝으로 나는 전장연 활동을 마무리해요. 20대 초중반 활동가들이 곁에 와서 “옥순 내가요~”하면서 치대면 얼마나 예쁘고 뭉클한지 모르겠어요. 이 사람들이 전장연이라는 조직의 활동이 고되고 힘들더라도, 또 그것을 자기의 운동으로 즐겁게, 오래 지속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지속 가능한 활동의 조건을 조금이라도 더 만들어두고 싶어요. 우리는 이제 힘든 투쟁을 한 다음 날은 꼭 휴식을 취하자고 하고, 당일 쉬지 못하는 사람은 나중에라도 휴가를 쓰자고 하는 정도에는 와있죠(웃음).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삼달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하는 거예요. 청소, 농사, 식사를 만들고 같이 나누어 먹는 일들에 온전히 익숙해지고 싶어요. 상엽이 일군 삼달다방이 추구하는 가치는 내가 장애인운동을 하며 추구한 가치와 닿아있어요. 누구나 존중받고 서로 협력하며, 오래오래 연결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일이요. 삼달다방에 휠체어를 타신 분이 턱이 없는 문으로 쭉 바퀴를 굴려 들어와 자리를 잡고 웃는 모습을 보면 정말 행복해요. 같은 말을 반복하는 발달장애인 분도 이 공간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어울릴 수 있어요. 뇌병변장애인 이규식(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편하게 돌아다니며 바다 수영을 즐기고, 삼달을 찾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편하게 어울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 여기예요.
오래오래 장애인운동을 지속하는 투쟁체. 그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안전하게 어울리며 지지하고 연대하는 공간. 그런 곳을 만들고 싶었고 많은 시간 그런 곳에서 활동해왔어요. 활동가라는 삶을 선택해서 나는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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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의 끝에, 옥순은 자신이 장애인운동의 활동가로서 한 첫 역할이 ‘장애인복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는, 각종 ‘공대위’ ‘무슨 무슨 연대’에서 활동했다. 그 활동들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입장들을 듣고 조율하고 설득하고 중재하는 역할이었다. 옥순은 그것이 자신에게 때로 너무나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러한 활동이, 자신에게 운명처럼 시작된 장애인운동에서의 역할이었다고,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옥순과 상엽은 나흘간 삼달다방에 머무르는 나를 세 번 바다로 데려갔다. 삼달다방에는 휠체어리프트가 달린 차량이 있었다. 마지막 밤에는 삼달의 이웃주민과 삼달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게스트와 사진작가 현다혜까지 모두 같이 밤바다로 나갔다. 장애인들의 투쟁현장에서 아마도 가장 용감하고 강렬하게 싸우는 활동가 이규식은 삼달다방의 사람들과 함께 바다에서 수영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상엽은 뇌병변장애를 가지고 전동휠체어를 타는 규식이 언제든 제주바다를 찾을 수 있도록, 그가 활동지원사와 함께 편히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삼달다방의 마당 한 켠에 따로 만들었다.
옥순과 상엽은 규식과 물놀이를 할 수 있음을 배웠으므로, 물을 무서워한다며 손사래를 치는 내게도 밤 수영을 제안했다. 보름달이 떠오른 제주바다에 나는 이규식의 수영조끼를 빌려 입고 들어갔지만, 10초도 버티지 못한 채 겁을 먹고서 몸을 벌벌 떨었다. 무려 이규식을 지켜낸 조끼를 입고서도 나는 그토록 무력했다. 물에 젖은 몸을 끌고 나와 옥순과 나는 방파제 끝에 앉았다. 옥순 옆에서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옥순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후였던 그때, 나는 그에게 고생했다고, 덕분에 내가 지금의 삶에 이르렀다고 소심하게 털어놓았다. 명랑한 그가 내 첫마디에 터진 자신의 웃음소리로 내 말을 묻어버렸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