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지난 8월 25일, 문상민 활동가가 인천 민들레(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장애인야학을 통칭) ‘불나비’ 회원들과 장애인운동 세미나 중 활짝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다. 불나비는 ‘불꽃같이 나의 인권을 찾아 비상한다’는 뜻으로, 집회에서 가장 잘 싸우는 사람들 중심으로 만들어진 모임이다. 그는 빨간색 불나비 단체 티쳐스를 입고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8월 25일, 문상민 활동가가 인천 민들레(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장애인야학을 통칭) ‘불나비’ 회원들과 장애인운동 세미나 중 활짝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다. 불나비는 ‘불꽃같이 나의 인권을 찾아 비상한다’는 뜻으로, 집회에서 가장 잘 싸우는 사람들 중심으로 만들어진 모임이다. 그는 빨간색 불나비 단체 티셔츠를 입고 있다. 사진 현다혜 

인천민들레장애인야학에선 조직 내 민주주의를 위해 서로 닉네임을 부른다. 사무국장인 문상민의 닉네임은 ‘탐’이다.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상민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탐 크루즈처럼 사람들이 다 탐내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나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탐 크루즈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부끄러운 바람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상민이 나는 너무 웃겼다.

‘탐 행크스라면 또 몰라도.’

나는 상민 같은 곱슬머리를 가진 탐 행크스가 주인공이었던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렸다. 묵묵히 달리고 달려서 세상의 모든 중요한 역사적 현장에 다 나타나는 포레스트 검프 말이다. 상민은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1991년),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1997년), 장애인실업자연대(1999), 장애인노동조합 오픈에스이(2001), 에바다 투쟁, 이동권 투쟁,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위한 인천, 경기, 대전 농성을 통과해 2008년 서른여덟의 나이에 인천민들레야학에 도착했다. 그 후에도 상민은 어디에나 나타났지만 그때부턴 언제나 민들레 사람들과 함께였다.

상민은 탐 크루즈처럼 파워풀하게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거나 시선을 압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탐 행크스처럼, 포레스트 검프처럼 순박하고 촌스러워서 아무리 비장했던 역사도 그의 입을 통하면 어딘가 좀 우스워져 있다. 2001년 내가 처음 장애인운동 현장에 발을 디뎠을 때, 그는 이 집안(?)의 삼촌 같은 존재였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딱히 모르겠으나 하는 일마다 잘 안되는 그런 삼촌, 집안 대소사에 꼬박꼬박 참석해 걱실걱실 일하는데 왜인지 집안 어른들한테 자꾸 면박을 당하는 그런 삼촌 말이다. 좋게 말하면 사람 냄새나고 더 좋게 말하면 좀 만만한 사람.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언제나 좀 놀려먹고 싶어진다.

지난 8월 25일, 문상민 활동가(맨 오른쪽)가 인천 민들레장애인야학에서 불나비 회원들과 함께 장애인운동 세미나를 하고 있다. 세미나는 2주에 한 번씩 이뤄진다. 사진 현다혜 
지난 8월 25일, 문상민 활동가(맨 오른쪽)가 인천 민들레장애인야학에서 불나비 회원들과 함께 장애인운동 세미나를 하고 있다. 세미나는 2주에 한 번씩 이뤄진다. 사진 현다혜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내가 준비했던 회심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형(상민)이 했던 조직들은 왜… 다… 망했어요?”

그는 언짢은 기색 없이 대답했다.

“되돌아보니까 대중성, 현장성, 투쟁성이 없었어. 선배들이 그러는데 운동이 잘 되려면 그 세 가지가 필요하대.”

나는 속으로 ‘꺄악, 너무 운동권 같아. 그러니까 망하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묻고 싶었던 걸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속 망했는데 왜 떠나지 않았어요?”

인터뷰 내내 비말이 1미터쯤 튀도록 쉴 새 없이 말하던 상민이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나 또 사고 친 건가. 인터뷰 망한 건가.’ 내 머릿속이 하얘지고 있을 때 상민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숨 쉬는 걸 잊을 정도였다. 상민이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절실했어.”

그의 시간이 2001년 여름 광화문 이동권 투쟁 현장으로 달려갔다. 서른 살이었고 그가 하던 장애인 실업자 운동이 잘 되지 않아서 잠수를 타다 막 돌아왔던 때였다. 평생 집 안에 유폐된 채 살았던 장애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버스를 점거하고 농성을 하자 경찰은 불법시위를 중단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며 쩌렁쩌렁하게 해산 명령 방송을 했다. 상민은 확성기를 갖고 버스 차체 위로 기어 올라갔다. 서른 살의 상민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장애인의 70.5%가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하지 못합니다! 1997년 저상버스를 만들어주겠다던 정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불법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쉰한 살의 상민이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장애인의 70.5%가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그런 현실이 너무 슬프고 화가 났어.”

2001년 여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장애인 이동권 투쟁 현장. 서른 살의 문상민 활동가가 버스 위에서 확성기를 들고 “장애인들 70.5%가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을 못합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사진 다큐 ‘버스를 타자’(고 박종필 감독) 캡처
2001년 여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장애인 이동권 투쟁 현장. 서른 살의 문상민 활동가가 버스 위에서 확성기를 들고 “장애인들 70.5%가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을 못합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사진 다큐 ‘버스를 타자’(고 박종필 감독) 캡처

그리고 평택 에바다투쟁 이야기도 했다. 에바다복지회에서 운영하던 시설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성폭행을 당하고 맞아서 죽었던 청각장애인들의 이야기. 에바다학교 교사들과 농인 학생들이 똘똘 뭉쳐 재단에 맞서 싸웠지만 역사를 아는 자라면 그 싸움엔 희망이 없다는 걸 알았다. 시설에 맞섰던 투쟁들은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7년이나 싸우는 사람들을 보며 상민은 겨우 3~4년 하던 일이 잘 안됐다고 도망쳤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바뀌는 거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상민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마침표를 찍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왜 떠나지 않았냐면, 신념, 나는 신념이 있었어.”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세상 사람들은 활동가라는 사람들이 다들 그런 단단한 걸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현실에서 그렇게 말하는 활동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신념이란 말이 처음 들은 것처럼 낯설었다.

“형의 시, 시, 신념이 뭔데요?”

상민이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사회주의. 자본가가 없는 세상, 차별과 착취가 없는 세상.”

나는 유령이라도 만난 것처럼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상민이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문상민스럽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가장 문상민스러운 것 같기도 한 그런 눈빛이었다.

지난 8월 16일, 인천 민들레장애인야학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문상민 활동가. 뒤에 책장에는 책이 빼곡하다. 사진 현다혜 
지난 8월 16일, 인천 민들레장애인야학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문상민 활동가. 뒤에 책장에는 책이 빼곡하다. 사진 현다혜 

*                       *                       *

- 내 삶을 바꾼 책

아주 어렸을 때 다리가 바깥으로 돌아가서 제대로 걷지 못했대요. 만날 업혀 다녔던 기억밖에 없어요. 다행히 약을 잘 먹어서 다리는 나았는데 중학생 시절까지 내내 약골이었어요. 1986년엔 고등학교 가려면 연합고사라는 시험을 봤는데 그때 체력장(체력시험) 점수가 2점 모자라 인문계 고등학교에 떨어졌어요. 그래서 간 데가 특지고(특수지 고등학교)라고 불리는 곳이었는데 인문계지만 그중에서도 공부를 좀 못하는 학생들이 가는 학교였어요. 집은 서울 동대문 근처였는데 학교는 강동구에 있어서 버스 타고 왕복 세 시간이 걸렸어요. 생각해 보면 장애 쪽에 관심을 가진 게 어려서 내가 아팠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대학에 갈 마음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공부를 안 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별명이 ‘록키’인 선생님이 나에게 영어책을 읽어보라고 시켰어요. 제대로 못 읽으니까 이건 중학생도 다 아는 거라면서 나를 코너에 몰고서 권투하듯이 막 때리더라고요. 얼마나 모욕적이고 자존심이 상했던지 그때부터 하루에 4~5시간 자면서 공부를 했어요. 우리 학교는 대학을 가려고 하는 애들이 드물었기 때문에 나의 변화를 선생님들이 아주 좋아했어요. 자기들 말만 믿고 따라오면 대학에 갈 수 있다면서 투지를 불태우더라고요.

여름방학에도 내내 학교에 나가서 자율학습을 했는데 그사이 교회 수련회가 있었어요. 가도 되냐고 선생님께 물었더니 절대 안 된다면서 갔다 오면 너는 죽는 줄 알라고 했어요. 선생님 입장에선 공부 안 하고 놀러 가는 거였겠죠. 하지만 나는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선생님 말을 거역하고 수련회에 갔어요. 연극도 하고 즐겁게 보내고 돌아왔더니 선생님이 아주 화가 나 있었어요. 어마어마하게 길고 두꺼운 몽둥이로 지칠 때까지 나를 팼어요. 아프긴 했지만 억울하진 않았어요. 나는 내가 한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거든요.

초등학생 시절 보라매공원에 있는 공군 비행기 앞에서. 사진 제공 문상민 
초등학생 시절 보라매공원에 있는 공군 비행기 앞에서. 사진 제공 문상민 

1990년 전북 완주에 있는 우석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했어요. 나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지나가는 사람한테 시간도 못 물어볼 정도였기 때문에 대학에 가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성격을 바꾸고 싶어서 동아리를 다섯 개나 가입했어요. 컴퓨터, 수어, 메탈(락), 먹고 놀자, 그리고 독서토론 동아리였어요. 모든 동아리를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웬만한 우석대 학생은 다 나를 알았어요. 눈 밑에 시커먼 점이 있어서 별명이 마당쇠였어요. 캠퍼스를 걷고 있으면 여기저기서 “어이! 마당쇠!”하고 불렀어요. 교회에 열심히 다녔기 때문에 욕도 안 하고 술, 담배도 안 했지만 술자리엔 끝까지 앉아 있었어요. 사람들 만나는 게 좋아서 만날 싱글벙글 웃고 다녔어요.

제일 마지막에 들어간 동아리가 독서 토론 동아리 ‘굴렁쇠’였어요. 동아리방에 들어갔는데 벽에 빨간색으로 구호가 쓰여 있고 캐비닛을 열었더니 쇠파이프, 최루탄, 방패 같은 게 쏟아져 나왔어요. 동아리방을 잘못 들어왔나 싶었는데 책장에 책도 많기에 잘못 온 건 아닌가 보다 생각했죠. 어느 날 선배가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줬어요. 5.18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는 너무 이상해서 책을 던져버렸어요. 믿지 않았던 거예요. 선배가 책 읽었냐고 물었을 때도 퉁명스럽게 그 책 좀 이상한 것 같다고 대답했죠. 그러다 카톨릭에서 복사해서 돌린 5.18 비디오를 보게 됐는데… 너무 충격이었죠.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할 수가 있지? 온몸에 전율이 왔어요.

1990년에는 군인 출신 노태우가 대통령을 할 때여서 학생운동이 활발했고 데모를 아주 많이 했어요. 1991년은 강경대, 박승희, 김귀정 등 대학생들이 백골단에 맞아 죽고 분신을 해서 10여 명의 ‘열사’가 나왔던 열사정국이었어요. 처음에 데모하러 나갔을 땐 무서웠어요. 전경들과 백골단이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면서 잡으러 올 때는 정신없이 도망가기 바빴어요.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화염병과 짱돌을 던졌어요. 하지만 그걸 맞는 전경들 역시 그저 군대에 끌려온 나 같은 청년들이었어요. “저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화염병을 던져야 하죠? 데모를 하면 주변 가게에 피해를 주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하고 선배들에게 물었어요.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이렇게 싸우지 않으면 열사들의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고 정권은 더욱더 민중들을 억압하고 탄압할 것이라고요. 우리의 투쟁은 폭력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해방을 위한 저항의 몸부림이라고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언론은 열사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얼마나 절실했으면 그렇게 했는지 같은 건 보도하지 않으면서 시위대를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했으니까요.

대학에 입학한 1990년의 문상민. 눈 아래 큰 점이 있어 ‘마당쇠’라고 불렸다. 사진 제공 문상민 

결정적으로 운동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전태일 평전》을 읽었을 때였어요. 청계천 재단사였던 전태일은 열심히 노력하면 공장장까지도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걸 포기하고 하루 16시간씩 피를 토하며 일하는 어린 여공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동조합을 만들었어요. 배고픈 여공들에게 풀빵 사 주고 자기는 차비가 없어서 집까지 걸어가다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자는 전태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성경공부를 하러 교회에 갔던 날이었어요. 교회가 전북대 앞에서 있었는데 늦게까지 데모가 있어서 거리가 최루 연기로 자욱했어요. 그날 배운 성경 구절은 이런 내용이었어요. 어떤 사람이 예수한테 물었어요.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추앙하며 메시아라고 떠받드는데, 그럼 당신이 왕입니까? 예수가 동전을 보여주면서 여기 누가 그려져 있냐고 그에게 물었어요. 거기엔 당시 체제를 지배하고 있던 헤롯 왕이 있었어요. 예수가 말했대요.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 왕입니다. 목사님은 그 이야길 통해 비록 왕에게 문제가 있더라도 체제를 인정해야 한다며 데모하는 세력들은 옳지 못하다고 비난했어요. 나는 예수도 전태일 같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목사님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혼란스럽더라고요. 한동안 고민하다 종교가 이 폭력적인 체제를 더 공고하게 만든다는 걸 깨닫고 종교를 버리기로 했어요. 술 먹고 담배 피는 삶이 시작됐죠.(웃음)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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