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인천시교육청 정문 앞에 문상민 활동가가 서 있다. 민들레장애인야학을 만들 당시 야학 지원을 요구하며 인천시교육청 앞에서 천막을 쳤다가 다 뜯겨 내쫓긴 후, 인천문화예술회관 옆에 천막을 치고 ‘천막야학’을 운영했다. 사진 현다혜 
인천시교육청 정문 앞에 문상민 활동가가 서 있다. 민들레장애인야학을 만들 당시 야학 지원을 요구하며 인천시교육청 앞에서 천막을 쳤다가 다 뜯겨 내쫓긴 후, 인천문화예술회관 옆에 천막을 치고 ‘천막야학’을 운영했다. 사진 현다혜 

- 윤시몬과 인정투쟁

‘손짓 사랑’이라는 수어동아리에선 수어도 배우고 가끔 농아인 단체나 시설에 가서 봉사를 했어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기니까 자연스럽게 장애인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궁금해져서 선배들한테 물어봤어요. 전부 비장애인이었는데 청각장애인이 몇 명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더라고요.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던 즈음 제가 속해있던 학생운동조직에 있던 특수교육과 학생들을 만나게 됐어요. 자기들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면서 동아리를 만들 거라고 하더군요. 그럼 나도 같이하겠다고 해서 탄생한 게 ‘장애인문제연구회 상쇠’였어요. 동아리는 만들었는데 우린 모두 비장애인이고 장애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알아보니 인근의 원광대학교엔 ‘동틀녘’이라는 장애 당사자들이 만든 동아리가 있다고 했어요. 찾아가서 소아마비장애가 있는 조성남(현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이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 시기 서울을 중심으로 청년 장애인들이 전국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라는 걸 조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상쇠와 동틀녘을 중심으로 전북장애인운동청년회를 만들었어요.

그때 만난 장애인 형이 있었어요. 1958년생 윤시몬. 아직도 기억나요. 그 형이 진짜 최중증장애인이었는데 언어장애가 심해서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계속 만나다 보니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는데 그 형이 무학이란 이야기를 듣고 입이 떡 벌어졌어요. 아, 이게 장애인의 현실이구나, 실감했죠. 그런데 그 형이 아는 게 진짜 많아서 더 놀랐어요. 아버지가 도서관 관장이라 관사에 살면서 책을 많이 봤대요. 발가락으로 책장을 넘겨 읽더라고요. 동생들이 학교 가고 나면 혼자 라디오를 들었는데 어느 날 발가락으로 주파수를 맞추다 우연히 교육방송이 잡혀서 그걸 매일 빠짐없이 들었대요. 나는 이과라서 그런지 시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되게 존경스러운데 그 형은 시도 잘 썼어요. 만약 시몬 형을 안 만났다면 내 삶은 좀 달랐을 것 같아요. 그때 어떤 편견이 깨졌죠. 그냥 윤시몬이라는 사람이 보이더라고요. 장애인이라고 하면 내가 도와줘야 할 불쌍한 존재라고 여겼는데 그런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막연하지만 몸으로 느꼈어요. 그 후로 그 형을 못 만났지만 지금도 그 분한테 고마워요.

그 시기 대학생들의 운동은 두 가지 축이 있었는데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이었어요. 제가 속한 조직은 노동운동 계열이었고 사회주의를 표방했어요. 선배들은 장애인운동을 ‘운동’으로 쳐주지 않았어요. 세상엔 근본적 모순과 부차적 모순이 있는데 근본적 모순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이고 장애문제 같은 건 거기서 파생되는 부차적 문제라고 했어요. 근본 모순이 해결되면 장애문제 같은 건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역량을 노동해방을 위해 쏟아야 하는데 너는 왜 이 아까운 시간을 장애인운동에 쓰고 있냐는 식이었어요. 선배들은 철학적 근거를 대면서 말하는데 나는 반박할 논리도 객관적 데이터도 없었어요. 그 시절엔 장애인운동에 대한 책도 없고 자료도 없었으니까 “시몬 형 사는 게 힘든 것 같은데…” 정도밖에 말할 수 없어서 답답하고 힘들었어요. 저에게 장애인운동은 인정투쟁이었던 것 같아요.

군대 휴가를 나왔을 당시 문상민의 모습. 사진 제공 문상민
군대 휴가를 나왔을 당시 문상민의 모습. 사진 제공 문상민

군대를 제대하고 1995년에 복학했더니 전북장애인운동청년회도 없어졌고 제가 속해있던 학생운동조직도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91년에 소련이 붕괴하면서 시대의 흐름이 급격히 바뀌고 있었어요. 많은 운동권들이 떨어져 나가서 나도 처음엔 남들처럼 마음잡고 공부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동기 한 명이 군대도 미뤄가면서 망해 가는 조직을 부여잡고 있는 게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너는 군대 가라, 이제 내가 할게, 하고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어요. 90학번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세례를 받아 아는 것도 많고 선전·선동도 잘하는 뛰어난 친구들이 많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어요. 학우들 앞에 서면 덜덜 떨려서 한마디도 못했죠. 그런 사람이 조직에 혼자 남아 후배들을 가르치려니 많이 힘들었어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금융실명제 같은 개혁을 단행하니까 이제 운동세력은 할 일이 없어진 건가 혼란스러웠어요. 정부는 개혁과 동시에 학생운동을 엄청나게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1996년엔 연세대에 모여 있던 한총련 소속 대학생 수천 명을 무도한 폭력집단으로 몰아가면서 체포하는 모습이 TV에 생중계됐어요. 도서관 앞에 대자보를 붙이고 있으면 동기나 선배들이 소련 무너진 게 언젠데 아직도 사회주의냐고 나를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쳐다봤죠. 다들 취업 준비에 혈안이 되어 있었어요. 우리는 소련에서 발간한 사회주의에 관한 책을 읽으며 운동이란 걸 배운 세대예요. 이상적 사회의 모습이 곧 소련이었죠. 소련이 무너졌다는 건 지향을 잃어버린 것과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떠났어요.

그때 저에게 힘이 되었던 말이 있어요. 사회주의가 망했다 해서 민중들이 억압받는 현실이 사라진 게 아니라고, 착취당하는 민중들이 있는 한 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고요. 소련이 망했다고 운동을 떠나는 사람들은 운동을 가슴으로 하지 않고 머리로 한 것 같다고 했어요. 민중가수 박준 선배의 말이에요. 박준 선배는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모금을 하느라 매주 명동성당 앞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외롭고 힘들 때마다 그 말이 나를 붙들어줬어요. 아는 것은 많지 않지만 나는 가슴으로 운동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죠. 전태일도 그랬을 거라고요.

1995년 2월, 대학 졸업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 꽃다발을 들고 있는 남성이 문상민 활동가. 어머니가 아들의 학사모를 쓰고 있다. 사진 제공 문상민 
대학 졸업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 꽃다발을 들고 있는 남성이 문상민 활동가. 어머니가 아들의 학사모를 쓰고 있다. 사진 제공 문상민 

- 봉주르 선생님, 장애인운동을 시작하다

졸업 후 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저를 이끌어줄 선배도, 조직도 없었고, 갈 수 있는 현장도 없었어요. 한동안 과천의 학원에서 중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어요. 재밌게 가르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나를 좋아했어요. 내 얼굴이 마라톤 선수 이봉주를 닮았다면서 복도에서 나를 만날 때마다 “봉주르~!” 하면서 인사했죠. 우리 반 학생들 성적이 쑥쑥 올라서 원장이 나를 붙잡아두려고 전셋집을 구해줄 정도였는데 오래 못하고 때려 쳤어요. 과천은 비평준화 지역이라 교육열이 높아서 시험 성적이 나쁘면 커다란 죽도로 아이들을 때려야 했어요. 어깨가 빠지도록 때리는데 이게 뭔 짓인가 싶었어요. 비록 운동은 그만두었지만 적어도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았어요.

그즈음 선배가 철도공사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만들려고 투쟁하고 있다면서 나보고 와서 같이하자고 했어요. 운동을 할 수 있다니 기뻤어요. 철도공사에 입사하려면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데 전기 공사 2급 자격증을 따면 훨씬 유리하단 말을 듣고 곧바로 노량진 학원에 등록했어요. 10개월 동안 학원과 집만 오가며 공부해서 자격증을 땄어요. 그런데 IMF와 맞물리면서 철도공사가 사람을 아예 안 뽑더라고요. 시험이 열리기를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어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노동자 대회에 갔다가 예전에 장애인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됐어요.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라는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더라고요. 장애인들은 노동시장에 진입조차 못하니까 생존권 투쟁의 일환으로 노점을 하는 거였어요. 원광대 조성남도 장자추에서 노점을 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만난 장애인 형, 누나들이 같이 활동해보자고 제안했어요. 어렵게 딴 자격증도 아깝고 노동운동도 하고 싶었어요. 철도공사에 들어가면 월급도 받고 나를 끌어줄 선배도 있는데 장애인운동은 활동비는커녕 사무실도 없었어요. 그런데 또 그 척박함 때문에 한번 가보고 싶더라고요. 대학을 다니던 1995년 인천 아암도에서 노점을 하던 장애인 이덕인이 구청의 단속으로 살해되었을 때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병원에 갔었어요. 거기서 이덕인 열사의 사진을 봤죠. 상의가 벗겨진 채 손은 묶여있고 몸엔 상처와 피멍이 가득했어요.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말해주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어요. 노동운동은 나 아니어도 할 사람들이 많지만 장애인운동 쪽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 일을 하고 싶었어요. 맨땅에 헤딩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 전태일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지금의 노동운동이 있는 거니까. 걱정하면서 말리는 선배한테 딱 1년만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오겠다고 말했던 게 벌써 25년 전이네요.

지난 8월 16일, 인천 민들레장애인야학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문상민 활동가. 뒤에 책장에는 책이 빼곡하다. 사진 현다혜 
지난 8월 16일, 인천 민들레장애인야학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문상민 활동가. 뒤에 책장에는 책이 빼곡하다. 사진 현다혜 

- 너는 왜 장애인운동을 해?

장자추에서 내가 맡았던 일은 노점 하는 회원들에게 회비를 걷는 거였어요. 청계천엔 비장애인들이 차린 노점이 줄지어 있는데 그 끝에 장애인들의 노점이 몇 개 붙어 있었어요. 번화하고 목 좋은 곳은 이미 비장애인들의 땅이라 한적한 곳을 새로 뚫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으니 장자추가 붙어서 치열하게 싸우며 노점 자리를 하나씩 늘려갔어요. 회원들은 자리를 얻기 위해 열심히 싸웠어요. 간신히 얻은 자리가 단속으로 털리면 억울하고 분하니까 더 열심히 투쟁하고 연대해요. 그런데 점차 자리가 안정화되면 그다음부턴 하루하루가 다 돈이니까 집회에 안 나와요.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계속 운동하자고 설득하는 것도 저의 일이었어요.

한번은 노점을 하느라 운동을 잠시 쉬었다 돌아온 성남 형이 나한테 묻더라고요. “노점도 장애인운동도 나에겐 생계이고 생존이라 안 할 수가 없는 일지만 너는 비장애인인데 왜 이 운동을 해?” 나는 대답을 잘 못했어요. 학생 운동할 때 선배들이 하던 말, 그러니까 비장애 대학생들이 나에게 했던 그 질문을 이번엔 장애 당사자에게 들은 거예요. 장애인들한테 운동하자고 설득하러 다니면서도 정작 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어요. ‘그러게. 나는 왜 장애인운동을 하지?’ 불쌍한 사람 돕는 게 운동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아마 제 마음속엔 헐벗고 굶주린 민중들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선민사상 같은 게 깔려 있었던 것 같아요.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어요.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이 하고 학생운동은 학생이 하고 여성운동은 여성들이 하는데 장애인도 아니고 노점상도 아닌 나는 왜 이 운동을 하지? 장애해방을 위해 싸운다고 말해왔는데 그건 대체 어떤 거지?

고민은 많았지만 속 시원히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게다가 함께 활동했던 선배가 말로는 혁명이 어쩌고 해방이 어쩌고 새빨갛고 번드르르하게 하면서 실제 행동은 그렇지 않은 모습이 실망스러웠어요. 회원들을 조직화하려면 사업계획도 세우고 고민도 나눠야 할 텐데 그런 건 없었어요. 나는 오직 돈만 걷으러 다니는 것 같아 회의가 느껴졌죠. 그러던 어느 날 장애운동판에서 장애인실업자연대(아래 장실연)라는 조직을 만들 거라고 했어요. 노동운동을 하고 싶었던 나한텐 솔깃한 소식이었죠. 실업문제가 사회적 화두였고 장애인은 워낙 실업자가 많으니까 장애인을 조직하는 데에도 중요한 매개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1999년 장실연을 함께 만들고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로부터 1억 원을 지원받아 경증장애인이 중증장애인을 데리고 나와 문화체험을 하는 사업을 했어요. 중증장애인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비용은 우리가 전부 대니까 당신은 그냥 나오기만 하면 된다고 열심히 홍보했어요. 롯데월드, 서울대공원, 63빌딩을 사흘이 멀다 하게 다녔고 한강 유람선도 지겹게 탔어요. 중증장애인은 세상과 소통하는 기회를 얻고 경증장애인은 일자리와 소득을 얻는 건데 사업이 잘됐어요. 그 사람들을 운동에 끌어들이고 싶었으니 장애문제에 대한 교육도 열심히 했죠. 그런데 1년 뒤 사업이 끝나니까… 사람들이 발길을 딱 끊고 회비도 안 내더라고요. 더 이상 얻을 게 없었던 거예요.

인터뷰를 하고 있는 문상민 활동가. 사진 현다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문상민 활동가. 사진 현다혜 

1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바깥에선 장애인이동권 투쟁이 활활 타올라서 수십 년 동안 집안에 갇혀 지냈던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지하철을 막고 버스를 점거하며 싸우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사무실에 처박혀 하루 종일 영수증을 붙였어요. 나는 운동을 하고 싶었던 건데 지금 이게 뭐지? 싶었어요. 장실련은 한국DPI(한국장애인연맹) 사무실 한켠에 책상 두 개를 놓고 지냈어요. 함께 활동했던 장애인들이 DPI로 흡수되는 분위기였는데 저는 뭔가 거부감이 들었어요. DPI라는 조직은 핵심 이념으로 당사자주의를 제시했어요. 기존의 장애인단체들은 재활협회나 시설협회처럼 장애인을 ‘위한’ 단체들이 많은데 DPI는 장애인에 ‘의한’, 장애인이 주도하는 단체이고 여기는 장애인단체만 들어올 수 있다고 했어요. ‘어? 그럼 난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에 비장애인은 당시 장실련 조직을 제안했던 다른 한 사람과 나밖에 없었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 같은 건 우리가 다 했어요. 우린 뭐지? 우린 그냥 소모품인가? 장애인운동에 있어 필요한 존재이긴 하지만 절대적인 건 아닌 그런 존재들인가?

내가 이 운동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괴로워도 참고 열심히 했는데 일한 보람은 없고 회원들은 다 떨어져 나가버리고… 힘들고 짜증 나서 도망쳤어요. 잠수를 탄 거죠. 장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동대문 원단 가게에 취직했어요. 운동을 그만할 생각이었고 사람들 연락도 받지 않았어요. 처음엔 일 배우고 허둥대느라 정신없어서 아무 생각도 안 들고 좋았어요. 그런데 반년이 넘어가고 일이 점점 익숙해지니까 슬슬 옛날 생각이 났어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궁리하는 이야기만 해서 재미가 없었어요. 어느 날 연세대에서 장애인 동아리 ‘게르니카’가 후원주점을 한다기에 용기를 내 놀러 갔어요. 조그마한 무대가 설치된 잔디밭에 앉아 사람들이 발언하는 걸 듣는데… 심장이 막 떨려오고 민중가요가 나와서 팔뚝질을 하는데 발끝에서부터 찌릿찌릿하게 전율이 올라왔어요. 그래, 난 어쩔 수 없다, 난 운동해야겠구나, 다시는 운동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돌아왔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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