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지난 8월 25일, 문상민 활동가가 인천 민들레(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장애인야학을 통칭) ‘불나비’ 회원들과 장애인운동 세미나를 하고 있다. 불나비는 ‘불꽃같이 나의 인권을 찾아 비상한다’는 뜻으로, 집회에서 가장 잘 싸우는 사람들 중심으로 만들어진 모임이다. 그는 빨간색 불나비 단체 티셔츠를 입고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8월 25일, 문상민 활동가가 인천 민들레(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장애인야학을 통칭) ‘불나비’ 회원들과 장애인운동 세미나를 하고 있다. 불나비는 ‘불꽃같이 나의 인권을 찾아 비상한다’는 뜻으로, 집회에서 가장 잘 싸우는 사람들 중심으로 만들어진 모임이다. 그는 빨간색 불나비 단체 티셔츠를 입고 있다. 사진 현다혜 

- 한국 최초 장애인노동조합 오픈에스이

2001년 오픈에스이라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대학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그 후배가 장애 당사자였어요. 오픈에스이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회사였는데 서울DPI(서울장애인연맹) 회장이었던 최○ 씨가 사장이었고 60명의 장애인을 고용하고 있어서 장애인실업자연대(아래 장실연)에서도 취업알선을 했던 곳이었어요. 후배는 회사가 2년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준다고 했었는데 그렇게 안 해줄 분위기이고 임금도 깎으려고 하고 있다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왔어요.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평소 알고 지내던 비정규직 노동자 운동을 하는 김혜진(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동지에게 상의했어요. 그랬더니 서울경인사무서비스노동조합(아래 서사노)을 연결해주셨어요. 문제의식을 가진 장애인 노동자들과 서사노에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 뒤 우리는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했어요.

2002년 1월 제가 상근활동을 하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노조를 조직하기 위해 뛰어다녔어요. 주체가 없는 장애인실업자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라는 주체가 있는 노동조합운동으로 전환할 계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60명 중 40명이 가입해 2월에 창립총회를 했어요. 그리고 4월 17일 출범식을 갖기로 했죠. 한국 최초의 장애인노동조합이 출현하는 역사적인 날이었어요. 사전행사로 남대문 상공회의소 앞에서 ‘장애인 의무고용 외면하는 삼성 재벌 규탄대회’를 열고 서울역으로 행진을 했어요.

당시 장애인이동권연대가 자꾸 도로점거 시위를 하니까 경찰이 차도로 행진하는 것을 불허해서 어쩔 수 없이 인도로 집회신고를 냈어요. 그런데 행진이 시작되니까 이동권연대 박경석 대표가 차도로 내려갔고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오니까 경찰이 행진대오를 막아버렸어요. 경석 형은 인도가 울퉁불퉁해서 휠체어 탄 사람은 갈 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경찰들은 꿈쩍도 안 했고 여기저기서 싸움이 벌어졌어요. 저는 방송차에 타서 사회를 보고 있었는데 집행부 중 누군가가 나한테 와서 “장애인은 차도로, 나머지는 인도로 가기로 경찰과 협의했다”고 전달했어요. 저는 그렇게 알고 경찰들을 향해 빨리 길을 열라고 소리를 쳤지만 경찰은 요지부동이었어요. 출범식을 하기 위해선 더 지체되어선 안 되는데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게 화가 나서 마이크를 잡고 “밀어! 밀어!” 그랬어요. 그랬더니 방송차를 운전하던 사람이 경찰들을 향해 진짜로 전진해버렸어요. 티도 안 날 만큼 아주 조금이었지만, 순간 저도 놀랐던 게 사실이었어요. 그때 경찰이 몰려와 나를 살인미수라면서 체포했어요.

지난 8월 25일, 인천 민들레 ‘불나비’ 회원들과 장애인운동 세미나를 하고 있는 문상민 활동가. 사진 현다혜 
지난 8월 25일, 인천 민들레 ‘불나비’ 회원들과 장애인운동 세미나를 하고 있는 문상민 활동가. 사진 현다혜 

그렇게 구속됐어요. 살인미수라고 한 건 지금 생각해도 욕이 나오려고 하지만 구속된 것 자체는 그렇게 억울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 자랑스러웠던 것 같아요. 같은 시기에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해 구속된 노동자들이 여럿 있어서 민주노총에서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내 얼굴도 있었어요. 위원장과 나란히 있으니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죠. 장애인을 위해 앞장서서 무언가를 했다는 마음,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희생했다는 느낌, 내가 읽은 책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어요. 감옥에서도 혁명을 위해 담배도 끊고 열심히 체력을 단련했던 레닌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운동하고 책을 읽었어요.

총 두 달 반 정도 지냈는데 한 달쯤 되니까 사람이 늘어나서 방이 점점 비좁아졌어요. 나 하나 빠지면 그만큼의 공간이 생기니까 다른 사람들이 편해질 것 같아서 교도관에게 독방으로 보내달라고 했어요. 거긴 독방 재소자들만 이용하는 운동장이 따로 있었어요. 조그마한 공간이었는데 그 벽에 돌로 뭔가 잔뜩 쓰여 있었어요. 가까이 가봤더니 자주민주 통일, 혁명, 민중해방, 노동해방 같은 단어들이었어요. 이곳을 지나갔던 사람들이 원했던 새로운 세상, 해방 세상의 이름들이었죠. 찬찬히 다 훑어봤는데 장애해방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장애해방 쟁취하자’라고 대문짝만하게 썼죠.(웃음) 그게 지금 생각해도 제일 뿌듯한 일이에요. 출소했을 땐 월드컵 스페인전을 앞두고 응원 인파가 차도와 인도를 온통 점거한 때였죠.

지난 8월 25일, 신경수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장애인권리예산보장을 촉구하며 97차 삭발결의자로 삭발 투쟁을 했다. 삭발 투쟁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 민들레 활동가들. 제일 앞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모자를 쓴 사람이 문상민 활동가다. 사진 현다혜 
지난 8월 25일, 신경수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장애인권리예산보장을 촉구하며 97차 삭발결의자로 삭발 투쟁을 했다. 삭발 투쟁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 민들레 활동가들. 제일 앞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모자를 쓴 사람이 문상민 활동가다. 사진 현다혜 

- 법대로 하겠습니다

오픈에스이 노조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는데 가장 중요한 건 장애인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산재투쟁을 했고 승리했다는 거였어요. 장애인 노동자는 워낙 취업하기 어렵기 때문에 회사를 상대로 싸우기가 더 힘든데 당시엔 생소했던 근골격계 질환으로 산업재해를 신청한 10명 전원이 산재승인을 받고 요양 치료를 받았어요. 단체협상을 통해 청각장애인들에게 수화통역사를 지원한다거나 대중교통 이용에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이동수당을 지원하는 내용도 얻어냈어요. 제가 생각하는 장애인노동조합의 모습은 바로 그런 거였어요. 일반 노동조합이라면 장애인 조합원이 있더라도 그런 걸 주요한 요구사항으로 걸지 않을 거예요. 잘해야 양념으로, 아니면 버리는 카드로 쓰겠죠.

첫해엔 그렇게 승리하는 듯했어요. 사장인 최○ 씨가 장애 당사자이면서 유명한 운동권 출신이었고 사측 간부들 중 학생운동 출신들이 많아서 우리의 요구를 쉽게 거부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다음 해가 되니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사측 교섭 대표로 나온 사람이 대우자동차 노무담당 출신에 IMF 때 울산에서 세 개의 섬유회사 노동자들이 연대파업을 했다가 패배했을 때 사측 담당이었죠. 협상테이블에서 이 사람이 했던 첫마디는 “법대로 하겠다”였어요. 근로기준법엔 ‘해야 된다’ 보다 ‘할 수 있다’가 더 많고 ‘할 수 있다’는 건 ‘안 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단체협상은 결국 힘의 문제인데 노동조합이 힘이 있으면 ‘할 수 있다’를 ‘한다’로 바꿔내는 거예요.

법대로 하겠다는 건 안 하겠다는 뜻이에요. 노동자가 2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법이 있지만, 오픈에스이는 2년이 되기 전에 계약을 해지하니까 문제없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협상이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다 조합원들이 모두 비정규직이어서 계약이 끝난 사람들이 한 명씩 빠져나갔어요. 파업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투표를 앞두고 사람들을 열심히 설득했어요.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경험도 있고 사장이 가진 상징성도 있었고 그가 국회의원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압박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어요.

지난 8월 25일, 인천 민들레 ‘불나비’ 회원들과 장애인운동 세미나를 하고 있는 문상민 활동가. 사진 현다혜 
지난 8월 25일, 인천 민들레 ‘불나비’ 회원들과 장애인운동 세미나를 하고 있는 문상민 활동가. 사진 현다혜 

그런데 고용이 불안하니까 설득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노동청 의견도 안 받아주는데 우리가 파업한다고 되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미 계약이 끝나서 자신은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파업은 부결됐어요. 비정규직 투쟁이라는 게 정말 힘든 거구나, 그때 알았어요. 조합원들의 계약이 끝나자 오픈에스이 노조도 그렇게 없어졌어요. 위원장은 남아서 새롭게 장애인노조를 조직해보고 싶어 했는데 나는 이 일에 대한 확신이나 전망이 없었어요. 외롭게 혼자 남아있던 그분께 미안했지만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며 떠났어요. 그분도 나중엔 노동조합을 탈퇴하고 다른 일 하신다는 소식만 들었어요.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장실연, 오픈에스이…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끝이 다 좋지 않았어요. 왜 내가 하는 것마다 망하지? 자괴감이 들었어요. 운동이란 게 책 좀 읽은 똑똑한 활동가들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중들이 하는 거예요. 대중을 운동의 주체로 조직하지 못하는 운동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는데 저는 그걸 놓친 거예요. 선배들은 말했어요. 대중성, 투쟁성, 현장성을 잃는 순간 운동은 망한다고요. 대중들과 현장에서 몸을 부대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투쟁을 통해 성과를 만들어야 해요. 나는 사무실에 앉아 서류 만지면서 “내일 버스 점거 투쟁이 있는데 너무 중요하니까 꼭 나가세요”라고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돌이켜보면 저는 세 가지가 다 부족했던 것 같아요.

장애해방이 뭔지 알고 싶었어요. 노점 자리를 얻으면 싸울 동력을 잃게 되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싸울 이유도 사라지는 그것. 너도나도 외치지만 그게 뭐냐고 물어보면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는 그것. 장애해방 세상이 어떤 것인지 그 상이 분명해진다면 계속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나는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었어요. 자본가가 없고 노동자, 민중이 해방되는 세상을 꿈꾸었죠. 대학 졸업 후 줄곧 ‘노동자의 힘’이라는 정치조직에 속해 있었어요. 그곳의 사람들은 노동자만 조직하면 노동해방이 이루어진다고 했지만 장애인운동을 통해 나는 그게 아니란 걸 어렴풋이 알아갔어요. 하지만 여전히 설명할 언어가 없었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이 차별받고 배제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자본주의 모순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나아가 장애해방 세상이 어떤 것인지 공부하고 싶었어요. 노동해방과 장애해방 둘 사이를 잇고 싶었어요. 그땐 장애에 관한 변변한 책조차 없어서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심정으로 한신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어요. 거기엔 독일에서 맑스를 공부하신 남구현 교수님이 계셨어요. 그분이라면 내가 품었던 질문에 대해 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2007년 문상민 활동가는 춘천 교육청 앞에서 장애인 교육권 확보를 위한 투쟁을 하던 중 연행됐다. 춘천구치소에 수감됐을 당시, 김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가 영치물로 넣어준 자본론. 사진 현다혜 
2007년 문상민 활동가는 춘천 교육청 앞에서 장애인 교육권 확보를 위한 투쟁을 하던 중 연행됐다. 춘천구치소에 수감됐을 당시, 활동가들이 영치물로 넣어준 자본론. 사진 현다혜 

- 우물을 파는 사람

모든 활동을 접고 아무도 안 만나며 2년 동안 공부에 매달렸어요. 영어를 진짜로 못했는데 읽어야 할 책이 다 영어로 쓰여 있어서 한 달 보름 동안 하루 10시간씩 영어공부를 했어요. 자본론도 다시 읽고, 레닌, 로자, 그람시 같은 혁명가들의 책도 다시 읽었는데 알고 봤더니 로자와 그람시는 장애인이었더라고요. 사회과학 이론이 머릿속에서 정리되면서 장애인운동도 다르게 보였어요. 논문을 어떻게 쓰는 줄 몰랐을 땐 내가 읽은 책들에서 좋아 보이는 걸 죄다 가져와 붙였어요. 교수님이 “네 생각을 써야지, 왜 남이 쓴 걸 표절하느냐”고 하셔서 “아, 그렇구나, 죄송합니다” 하고는 처음부터 다시 썼어요. 학교에서 먹고 자면서 쓰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쓰고 운동하다가도 아이디어 떠오르면 잊어버릴까 봐 곧바로 컴퓨터로 달려갔어요. 그렇게 쓴 논문이 ‘장애인 사회운동 연구’예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이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원인을 내 나름대로 정리한 거예요.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상품으로서 고용해서 잉여 노동을 뽑아내요. 노동자가 물건을 10개 만들면 실제 임금은 7개만큼 주고 3개는 자본가들이 가져요. 3개보다 더 가져가고 싶으니까 4개, 5개를 가져가거나 노동자가 11개, 12개를 만들도록 노동시간을 늘리고 노동 강도를 강화시키죠. 장애인은 이 속도를 못 쫓아와요. 장애가 있으면 자본가에게 3개를 갖다주기 어려운데 그나마 3개는 갖다 줄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해요. 하지만 장애인은 손상된 상품이니까 비장애인보다 임금을 적게 주고 이 사람들은 다른 데 취업하기 힘들다는 걸 이용해 일은 더 시키죠. 차별이 발생하는 이유예요. 자본가에게 3개도 못 갖다주는 사람들은 필요 없으니까 배제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배제한 이들은 살아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국가가 관리하죠. 사회복지가 필요하고 수용시설이 존재하는 이유예요.

장애인이 차별받는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기 때문에 장애해방운동이란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었어요. 장애인운동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노동운동과 연대해야 하고 거꾸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이들도 장애인운동에 함께해야 해요. 그전까지는 말도 안 되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컸다면 이젠 내가 이 운동을 통해 뭘 얻고자 하는지, 내가 원하는 사회가 어떤 건지 그 언어를 스스로 정리한 거예요. ‘너는 당사자가 아닌데 왜 이 운동을 하느냐’는 질문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나갈 이론적인 근거를 찾으니까 사람들에게도 이 운동을 함께하자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게 됐죠.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어요. 2006년 3월 졸업하자마자 경석 형을 찾아갔어요. 나의 구속에 원인을 제공했던 형은 한창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조직하고 있었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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